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1)
7. 신대륙에서(1) >
#A7
“···그렇군요. 소망이라.”
“네. 시타는 제 꿈을 마시고 태어났어요. 아마도 다른 꿈새도 그렇겠죠.”
로난이 끄덕거렸다. 그는 시타와의 해후를 마친 뒤 바렌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시타는 창문으로 머리만 쏙 들이민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뺘우우웅···뺘우···.”
꿈새의 비밀을 들은 바렌은 평생의 숙원을 이룬 사람처럼 기뻐했다.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 그가 노트를 덮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의문이 드디어 풀렸군요. 이거 정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교수님이랑 세크리트가 다 했잖아요.”
“그래도 로난 학생과 시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혹시 원하시는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성심성의껏 보답하겠습니다.”
“원하는 거라…그럼 그 마법 스크롤 몇 장만 더 줄수 있어요?”
로난이 물었다. 뭐 빠지게 고생하기는 했지만, 인간으로 변한 시타와 함께한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어쩐지 곧 있으면 태어날 자식을 기르는 예행 연습도 되는 것 같았다. 바렌이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주실 수 있을까요? 워낙에 어려운 마법이라 제작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서요.”
“받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우니까.”
로난이 히죽 웃었다. 매사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평화로운 시기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차를 한 번 홀짝인 바렌이 책상 위에 놓인 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벨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바렌이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혹시 봉인이나 파괴 등의 조치를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파괴요?”
“네. 일단 평범한 꿈새의 알은 아니니까요. 만약 세간에 존재가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바렌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설마 저 입에서 동물의 알을 부숴 버리자는 제안이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흔적도 하나둘씩 말소되어 가고 있는 지금, 저 알은 아벨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새로운 재앙을 피워낼 수 있는 씨앗이었으니까.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 말씀은?”
“내가 책임지고 가지고 있을게요. 알에 대한 비밀은 꼭 지켜주시리라 믿어요.”
“그, 그야 비밀은 반드시 엄수하겠지만···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렌이 불안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알을 집어든 그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교수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콩 심은데 콩이 난다고, 언젠가 저 알이 깨지면서 제2의 아벨이 튀어나올지도 모를까 걱정되겠죠. 하지만 시타는 생물학적 모친인 마르페즈를 자신의 어머니라 칭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전승자라 칭했다 하던가요.”
“예.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지만, 시타는 전승자를 집을 마련해준 사람에 비유했어요. 그 말대로라면 아벨은 언젠가 여기서 태어날 존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죠. 중요한 건 알이 어떤 소망을 감명 깊게 받아들이고 마시냐는 거에요.”
아벨이 남긴 알은 여전히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 까슬까슬한 껍데기 안쪽에서 뭐가 맥동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어날 아이에게는 죄가 없어요. 물론 전승자가 워낙 호로새끼다 보니 불안할 수도 있겠죠. 저도 알아요. 그럼에도 제가 이걸 당장 밟아서 부수지 않는 건···”
별안간 아벨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붉은 바다가 철썩이는 백사장 위에서 그는 아벨의 유언을 분명히 들었다. 말꼬리를 끌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새끼도 마지막에는 미안하다고 했거든요.”
“···과연. 그렇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바렌이 미소지었다. 애초에 알의 발견자인 로난이 그렇게 나온다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끼이익.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남녀가 걸어 들어왔다. 발루스가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오. 발루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발루스의 얼굴은 삼 일은 재우지 않은 사람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에르제베트가 그의 뒤편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그···로난 님. 그러니까요···저는 분명 로난 님의 아이인 줄···.”
“그래 아가씨. 이제는 좀 오해가 풀리셨나?”
“···네. 죄송해요.”
에르제베트가 웅얼거렸다. 참으로 면목 없어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발루스가 설명을 잘 한 듯했다. 갑자기 휘청거린 그가 벽을 짚으며 균형을 잡았다.
“뭐야, 너 괜찮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도 결국 저 불한당과 한 패 아니냐면서 저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데···으흐흑···정말 무서웠어요.”
발루스가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나이를 먹고 성숙해졌다지만 불 같은 성격은 어디 두고 올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아으으···그러니까 정말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입으신 피해는 아칼루시아의 이름으로 반드시 보상해드릴 테니까···.”
그래도 절대 나쁜 애는 아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발루스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슐리펜도 그렇고, 이 나라를 양분하는 귀족의 후예들이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어 다행이었다.
불현듯 나비로제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여자에게는 여자만이 도와줄 수 있는 점이 있다고 했던가. 머리를 긁적거리던 로난이 에르제베트를 불렀다.
“에르제베트. 잠깐만 따라와 봐.”
“···네? 아, 네에.”
에르제베트가 움찔거렸다. 목소리가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로난이 이번 오해에 대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를 집무실 구석으로 데려간 로난이 입을 열었다.
“에르제베트. 한동안 제도에 머무를 거면 아데샨한테 가봐라. 가급적이면 지금 바로.”
“어, 언니한테요? 갑자기 왜?”
“그래. 얼마 전에 애가 생겼거든. 네가 가서 축하해주면 엄청 좋아할 거야.”
“······뭐라구요?”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나 그녀도 아직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딱! 갑자기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반투명한 장막이 주변을 감싸는 것을 본 로난이 입술을 말며 감탄했다.
“사일런트 마법이라니, 역시 넌 착한 애야. 비밀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챈 거지.”
“자, 잠깐.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아데샨한테 애가 생겼다고 했어. 이번에는 진짜로 내 자식이야.”
“그, 그, 그, 그게 무슨···!”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에르제베트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아데샨의 이름을 외치며 집무실에서 뛰쳐나갔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멈출 즈음, 로난의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하해요! 일단은!] “오냐.”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로난이 낄낄거렸다. 바렌과 시타, 발루스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에르제베트와 로난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자식 이름을 본인이 짓겠다며 난리 칠 것이 분명한데, 나비로제와 그녀가 지어준 이름 중 누구의 것이 채택될 지가 기대되었다. 어둑해진 창밖을 본 로난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슬슬 갈게요. 또 봐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참 많은 일이 있던 하루였다. 몸을 일으킨 바렌이 악수를 건넸다. 발루스와도 작별인사를 한 로난이 막 돌아가려던 차였다. 우연히 집무실 구석을 쳐다본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이걸 잊고 있었네.”
시타가 뱉어 놓은 봉인석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부적들에서는 불길한 적색광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아차 싶은 바렌이 갈기를 움켜쥐며 말했다.
“헉,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시타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물건이라 하셨죠?”
“네. 무언가 지독한 걸 봉인하고 있었다는···.”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성대하게 저질러 줬다면 신대륙에서는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개가 싼 똥은 주인이 치워야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한 여자친구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에르제베트도 붙어 있으니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집에만 들렀다가 바로 출발해야겠군. 시타를 깨운 그가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시타의 뺨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음? 이건···.”
“뺘?”
튤립처럼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검은 털에 엉겨 붙어 있었다. 길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살펴 보던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아셀 머리카락인데…아하.”
시타가 왜 신대륙까지 다녀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가 필레온을 졸업하는 날, 마르야는 카라벨 상단을 신대륙까지 진출시키겠다고 당당히 선언했었다. 그리고 아셀은 상단의 호위로서 마르야와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너 아셀이랑 마르야한테 다녀온 거였어?”
“뺘잇!”
시타가 긍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그 둘을 따라 신대륙에서 놀다 온 모양이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안 가도 되겠네.”
“음? 안 가신다구요?”
“네. 아셀 그 자식이 있는데 굳이 저까지 갈 필요가 없죠. 알아서 잘 해줄 거에요.”
로난이 단언했다. 지금의 아셀은 누가 뭐래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깨어진 봉인 안쪽에서 뭐가 튀어 나오든 간에 대처할 능력이 있을 터였다.
“아셀 그 자식이 무서워해야 하는 건 마르야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만 안심해요.”
“화, 확실히 아셀 학생의 강함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바렌이 말꼬리를 끌었다. 아셀이 있다고 하니 긴장감이 확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타의 머리 위에 올라탄 로난이 웃음으로 말을 맺었다.
“걱정 마세요. 별 문제 없을 테니까.”
****
“이, 이제 그만···!”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아셀은 깎아지른 기암절벽 사이를 날아서 도망치고 있었다. 오백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로는 좁다란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살기를 느낀 아셀이 등을 돌리며 비명을 질렀다.
“흐야아아악! 오, 오지 마세요!”
동시에 아셀이 팔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절벽 위에 놓여 있던 바위를 밀쳤다. 쾅!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바위가 길을 틀어막았다. 발소리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아셀이 입을 뗐다.
“이, 이제 안 따라오나?”
그의 등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셀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쉬쉬식! 길을 틀어막은 바위 위편으로 수십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히에에엑!”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달을 등진 복면인들의 그림자가 아셀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그들의 손에는 기존에는 본 적이 없던 검이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아셀을 가리키며 외쳤다.
“수상쩍은 사술을 쓰는 걸 보니 역시 놈들의 첩자가 분명하다. 죽여라!”
<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