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3)
9. 신대륙에서(3) >
#A9
“잠깐만, 지금 뭐 하려고?”
소파에서 책을 읽던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하도 넓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제도를 떠나 자신의 영지에 지은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막 지하실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려던 아데샨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응? 오랜만에 창고나 한번 가 보려고 하는데.”
“그 먼지떨이랑 행주는 뭐야?”
“그냥 청소도 조금 해 두려고 그랬지. 왜 그래?”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님버튼에 다녀온 지 석 달이 지난 지금, 아데샨의 배는 제법 티가 나게 부풀어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한 짓 하지 말고 앉아 있어. 다치면 어쩌려고.”
“아이 참, 몸이 무거워서 별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집안일 정도는 하게 해 줘.”
아데샨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로난의 과보호는 조금 심했다. 한 마리 야생 늑대 같던 로난은 자신이 임신한 뒤부터는 슐리펜에 버금가는 주책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아데샨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심정은 알겠는데 지금은 안 돼. 엇차.”
“꺄악!”
아데샨이 짧막한 비명을 질렀다. 물론 무섭거나 싫어서 지르는 것이 아닌, 밀도 높은 행복에서 기인한 비명이었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린 로난은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아데샨을 눕혀 놓았다. 배에 손을 얹은 그녀가 키득거렸다.
“아빠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 알아야 할텐데.”
“나는 아데샨 너를 사랑하는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첫째도 안 낳았는데 둘째부터 만들고 싶어지잖아.”
아데샨이 눈웃음쳤다. 보통 아이를 가지면 살도 찌고 머리도 푸석푸석해진다는데, 아데샨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데 그런 걸까.
이대로 분위기를 타면 그대로 저질러 버릴 것 같았다. 말없이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로난이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심심하면 산책이라도 해. 기껏 잘 가꿔놨는데.”
유리창 너머로는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겨우내 척박하던 발투레의 대지는 여름 볕 아래에서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데샨이 씨를 뿌린 들꽃들이 곳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응. 그럴게. 고마워.”
“나도 금방 나갈게.”
아데샨이 끄덕거렸다. 로난은 그녀에게 양산을 쥐어 주고 나서야 안심하고 지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고 역할도 겸하는 어두침침한 공간은 예상했던 것처럼 뽀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말리기를 잘 했군.’
개인적인 물건도 많아서 시종들에게 청소를 금지한 탓이었다. 로난은 먼지와 거미줄을 툭툭 털어 내며 창고를 둘러보았다. 어느 선반을 살펴 보던 와중이었다.
“이건···.”
무언가를 발견한 로난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박만 한 조각상 다섯 개가 일렬로 늘어선 채 부서져 있었다. 파편 중간 중간에는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가 적힌 종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 예전에 시타가 물고 왔던 신대륙의 봉인석이었다. 하나 빼고는 죄다 참혹하게 부서져 있었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로난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각상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쩌적! 갑자기 굵직한 균열이 발생함과 동시에 조각상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힘을 봉인하고 있던 존재가 죽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린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뭐야 시발.”
****
하얀 달이 아름다웠다. 아직은 검푸른 저녁 하늘 아래로 거대한 호수가 드리워 있었다. 울창한 활엽수림이 호반을 둘러싸고 있었다.
신대륙의 마경 중 하나인 청야(靑夜)호수였다. 경치가 좋고 물고기도 많아 백여 년쯤 전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던 운치 좋은 휴양지였지만, 복마전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뒤로는 완전히 버려진 땅이 되어 버렸다.
“아, 안 나오시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어요.”
아셀은 그런 호수의 상공 위에 떠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수면 위에서 일렁이는 또 하나의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기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성이 호수 밑바닥에서 울려 퍼졌다.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가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촤아악! 머지않아 수면이 찢어지며 거대한 도롱뇽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감히 복마전의 사천왕인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도롱뇽이 소리쳤다. 동시에 넙데데한 아가리 사이로 보랏빛 독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인간은 한 모금만 삼켜도 즉사하는 맹독이었지만, 아셀의 방어막은 입자 하나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아셀은 독안개를 무시하며 인양 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짧막한 주문을 영창하자, 물 아래에 감춰져 있던 도롱뇽의 몸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촤아아악! 터무니없이 거대한 몸뚱어리를 본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히이익···! 죄, 죄송해요!”
“크아악! 네년의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 놓겠다!”
꼬리의 길이만 어지간한 고래만 했다. 양서류 특유의 미끌거리는 피부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도룡뇽은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아셀의 염력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숫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본체는 안에 있을 거야.”
“으응.”
아셀이 끄덕거렸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보이지 않는 주먹이 도룡뇽의 배를 강타했다. 쾅! 도롱뇽이 구역질하자, 벌어진 아가리에서 웬 덩어리 하나가 튀어 나왔다.
“끄아아아악!”
염력에 붙들린 덩어리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백 살은 되었을 법한 노인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는 복마전의 상징인 검은 도포가 걸쳐져 있었다. 노인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도롱뇽의 눈을 잠식하고 있던 탁기가 사라졌다.
“귀이익!”
“이제 잡히지 마.”
아셀은 노인은 붙잡은 채 도롱뇽을 쥐고 있던 힘을 해제했다. 그대로 떨어진 도롱뇽은 자신의 몸만큼이나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노인이 당혹성을 내뱉었다.
“어, 어떻게···!”
“뻔하지. 영물 하나 잡아서 괴롭히는 게 너희 수법이더라고.”
마르야가 웃었다. 석 달째 복마전과 상대해 온 그녀와 아셀은 슬슬 놈들의 수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악당들은 소위 영물이라 불리는 강력한 짐승들을 세뇌해서 패악질을 부렸다.
돌이켜 보면 지난 세 달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신대륙에서 이름난 집단 중 하나인 영월림의 제의를 받은 뒤부터, 그들은 상단 일을 잠시 접어두고 복마전을 소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자선 사업은 아니었고 신대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만큼이나 훌륭한 홍보도 없을 터였으니. 소탕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사천왕이라는 걸 보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이대로라면 카라벨 상단이 신대륙의 새로운 거상으로 자리를 잡는 것도 마냥 꿈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모두 아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르야가 애정 섞인 눈빛으로 그를 올려 보던 와중이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어?”
갑자기 노인이 마르야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마나, 여기서는 기공이라 불리우는 덩어리 하나가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윽···!”
아차 싶은 마르야가 대검을 뽑아드는 찰나였다. 그녀의 주변에 적중한 덩어리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지름이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아셀의 눈이 커졌다.
“마르야!”
“크하하하! 방심했구나. 네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 쓰니 이런 일을 당하는 거다!”
노인이 광소를 터트렸다. 기공이 직격한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촤아아아···구름까지 솟아 올랐던 물기둥이 허물어지며 검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셀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우던 차였다.
“아우, 놀래라. 죽을 뻔 했네.”
갑자기 마르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거대한 나무 뒤편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도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마, 마르야···! 괜찮아?!”
“그럼. 완전 괜찮지.”
아셀이 울먹거렸다. 마르야는 손을 뻗어 브이 표시를 해 보이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행히도 옷과 얼굴이 더러워진 것 말고는 별 피해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을 본 노인의 얼굴이 와락 굳어졌다.
“뭣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야가 남자가 되어서 뭐 그렇게 눈물이 많냐고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였다.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아셀이 노인을 돌아보았다.
“···너.”
“뭐, 뭐냐?”
노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그가 도망칠 길을 모색하던 찰나였다. 노인을 조이고 있던 힘이 급격하게 강해졌다.
“커허억!”
노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제압당한 몸 곳곳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갑자기 발밑의 흔들거림을 감지한 마르야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우왓, 뭐야!?”
꼭 지진이 난 것 같았다. 별안간 반투명한 역장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셀이 대규모 마법을 시전할 때마다 휘말리지 말라고 걸어 주는 방어막이었다. 그와 노인을 번걸아서 쳐다본 마르야가 헛웃음을 쳤다.
“넌 이제 죽었다.”
“끄아아아악! 놔, 놔라!”
노인은 성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던 그의 몸이 구름 근처에서 멈춰섰다. 영창을 읊조리던 아셀이 양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렸다. 콰드드득! 주변의 나무와 지반이 통째로 지면에서 뜯어져 나오더니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노인이 경악했다. 이런 무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지형이 아예 뒤바뀌고 있었다.
아셀은 가만히 노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곱게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동방의 대륙에는 속성의 상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불은 물로 제압하고, 물은 흙으로, 흙은 나무로, 나무는 금속으로 제압한다. 마지막으로 금속은 다시 불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노인의 주 속성은 척 봐도 물 아니면 흙이었다. 계산을 마친 그가 눈덩이를 뭉치듯이 양 손바닥을 포갰다. 부유하던 지반과 나무들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쏘아졌다.
“그, 그만둬어어어!”
노인이 절규했다.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콰과광! 산 하나 분량의 흙덩이와 나무들이 그의 몸뚱어리를 과녁 삼아 충돌하기 시작했다.
“······!”
굉음이 노인의 절규를 삼켰다. 마치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는듯한 광경이었다. 머지않아 거대한 구체 하나가 달 아래 만들어졌다.
“이터널 플로팅.”
이어서 구체를 완성시킨 아셀이 새로운 주문을 영창했다. 사물에 반영구적으로 부유하는 속성을 부여하는 마법이었다. 촤아아···! 아셀의 손 끝에서 발현된 마나가 구체를 감싸듯 뒤덮었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노인을 가둔 구체는 영원히 이 자리에 떠 있을 터였다. 역광을 받아 검게 빛나는 모습이 나름 장관이었다. 작업을 마친 아셀이 마르야의 앞에 착지했다.
“마르야! 저, 정말로 괜찮아? 안 다쳤어!?”
“그러니까 괜찮대도. 나 멀쩡해.”
아셀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마르야는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바들바들 떠는 것이 노인을 족칠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이 표정의 갭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아름다웠다. 가만히 그를 내려보던 마르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 진짜. 꼴리게 하네.”
“응?···으읍!”
갑자기 마르야가 아셀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한참이나 혀를 뒤섞던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푸하, 자, 잠깐만. 여기서는···!”
“닥쳐.”
소매로 입가를 닦은 마르야가 아셀을 밀쳐서 넘어뜨렸다. 그가 뭐라 외쳤지만 호수가 찰랑이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신대륙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