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4)
10. 신대륙에서(4) >
#A10
“아. 개운해.”
잠에서 깨어난 마르야가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밝아온 서광이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녀에게 안긴 채 잠들어 있던 아셀도 눈을 떴다.
“마르야···이, 일어났어?”
“응. 좋은 아침.”
마르야가 웃었다. 복마전의 사천왕인지 뭔지 하는 늙은이를 가둔 구체는 여전히 호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주변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셀 수 없이 만들어져 있었다. 구체를 만들기 위해 아셀이 지반과 나무를 뽑아 올린 흔적이었다. 잘도 이런 곳에서 해 버렸네. 킥킥 거리던 마르야가 아셀을 돌아보았다.
“역시 사람은 자기 전에 운동을 해줘야 한다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으으으···”
아셀은 대답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에 윤기가 반질거리는 마르야와는 달리 수척해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새하얀 몸에는 모기에 물린 듯한 자국이 잔뜩 남아 있었다.
“흐흥. 그래도 어제는 별로 안 남겼네.”
마르야가 눈웃음쳤다. 언제 봐도 정복감을 고조시키는 광경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아셀을 본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은데. 별로였어?”
“아, 아냐. 좋았어. 그런데 다음번에는 조금···그···.”
아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살살 해달라는 말을 도무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나눴을 때부터 일방적으로 당해 온 그에게도 남자의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마르야를 힐끗 올려본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일단 옷부터 입어. 감기 걸리겠어.”
“아. 그래야지.”
마르야가 끄덕거렸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속옷을 입기 시작했다. 문득 지난밤을 떠올린 아셀이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이 누워 있던 자리의 풀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이, 이게 맞는 걸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기는 했지만 빈도가 너무 잦았다. 어째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적당히 없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도 큰 문제였다.
‘소리를 누가 들으면 어쩌냐 물어봤을 때는···까짓거 좀 들려 주면 어떠냐고 말했었지.’
이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용기를 쥐어짜낸 아셀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촤악! 갑자기 호수가 찢어지며 거대한 도롱뇽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위험해!”
복마전의 간부에게 조종당하던 그 도롱뇽이었다. 화들짝 놀란 마르야가 어깨를 움츠렸다. 반사적으로 뛰쳐나온 아셀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방어막을 전개했다. 촤아악! 반투명한 역장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셀.”
마르야가 헛숨을 들이켰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셀의 표정은 사나우리만치 진지해져 있었다. 날카로운 얼음 가시 대여섯 개가 당장에라도 쏘아질 것처럼 아셀의 주변에 생성되었다. 도롱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오?”
“···공격하려는 건 아닌가?”
아셀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도롱뇽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굴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눈이 천천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조,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쉿. 언제 공격할지 몰라.”
아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긴장감 어린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퉤엣! 구역질한 도롱뇽이 무언가를 뱉어냈다.
“저건···!”
아셀의 눈이 커졌다. 웬 반짝거리는 구체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아셀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도롱뇽의 입에서 나온 구체를 붙잡았다.
어지간한 사람 몸통보다 큰 구체는 진주처럼 불투명했다. 문득 구체를 살피던 아셀이 어깨를 움츠렸다.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맥동하고 있었다.
“이, 이건!”
옆에 있던 마르야가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건 분명 내단이라 불리우는 보물이었다.
수백에서 수천 년을 묵어 강성해진 영물이 품고 있는 기의 덩어리. 마르야가 신대륙에서 반드시 손에 넣고자 했던 물건 중 하나였다.
“내단이 틀림없어. 이런 행운이···.”
“이걸 왜 우리에게···.”
나름 복마전에게서 구해 준 은혜를 갚은 모양이었다. 아셀이 얼음 가시를 거두었다. 마르야가 팔을 크게 휘적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마워! 건강해!”
도롱뇽은 히죽 웃어 보인 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육중한 꼬리가 수면 아래로 사라짐과 동시에 물보라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촤아아아···잔비처럼 쏟아지는 호숫물이 햇살에 맺히며 무지개가 일어났다.
“우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복마전의 탁기가 사라진 호수 위로 새들이 노니고 있었다. 아직은 선선한 아침의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헤집어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물이 다 떨어진 뒤에도 한참이나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무지개가 희미해져갈 즈음이었다. 아셀을 힐긋거리던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있지. 아셀.”
“응.”
“우리도 확 결혼해 버릴까?”
“좋지······응?”
아셀의 눈이 커졌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벙쪄 있던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뭐라고?”
“결혼하자고.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겨, 겨, 결혼? 이렇게 갑자기?”
“응.”
마르야가 끄덕거렸다. 아셀은 입을 벙긋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싫어?”
“아, 아니! 절대로 싫지 않아!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랑 일 년 넘게 뒹굴어 놓고 갑작스러울게 뭐가 있어. 설마 실컷 즐기기만 한 뒤 떠나갈 생각이었어? 설마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있다던가···.”
갑자기 마르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스산한 살기를 느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손을 얹고 있는 바위에 굵직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응?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있냐고.”
“아,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는 마르야 너뿐이야!”
“진짜겠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마, 마법사의 명예도 걸 수 있고!”
아셀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제야 살기가 잦아들었다. 바위에서 손을 뗀 마르야가 싱긋 웃었다.
“믿어줄게. 그럼 나랑 결혼해.”
“결국은 그쪽으로···! 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냥 무지개를 보는데 확신이 생겼어. 우리는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지.”
마르야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물에 젖은 금발이 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솔직히 나 정도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편이잖아? 특히나 이런 건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아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의 말마따나 저 흉악한 물건이야말로 영물의 내단보다 진귀한 것일지도 몰랐다. 시선을 피한 그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그, 그건 그렇지···.”
“그래. 완벽하잖아. 너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빼는 거야?”
“빼, 뺀 적 없어. 그러니까 사실은···.”
울상이 된 아셀이 말꼬리를 끌었다. 말을 입으로 꺼내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마르야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던 그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프, 프로포즈는 내가 하고 싶었단 말야···.”
그리 말한 아셀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빼꼼 삐져나온 귀는 달아오른 쇠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 나름대로 근사한 프로포즈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
마르야가 헛웃음을 쳤다.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가 마른세수를 했다.
사랑스러운 것도 이쯤 되면 범죄 수준이었다. 얘를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벗어.”
“···응?”
“벗으라고. 아니면 이번에도 내가 벗길까?”
아셀이 얼굴에서 손바닥을 뗐다. 마르야는 이미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벗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가, 갑자기 왜!”
“솔직히 이건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을 해 놓고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지. 그리고 도장이라도 찍어 놔야지, 불안해서 안 되겠어.”
“도, 도장?”
마르야가 끄덕거렸다.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눈빛이 평소의 몇 배로 끈적했다. 머지않아 말뜻을 이해한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 아이를 가지자고?!”
“응. 그렇게 놀랄 일인가? 우리 엄마도 이맘때쯤에 나를 낳았는데.”
“그, 그,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 우리는 아직 결혼도 안했고···심지어 너는 귀족이잖아···!”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마르야는 이제 일반적인 시민이 아닌 귀족이었다.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 중 하나인 아르말렌을 다스리는 백작.
틀림없이 몇 년만 지나면 대륙에서 손에 꼽는 권세가가 될 터였다. 게다가 왕족이나 귀족의 혼인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마르야는 그딴 건 신경쓰지 않았다.
“귀족이면 뭐 어때. 너도 귀족 되고 좋지 뭐. 게다가 로난이랑 아데샨 언니도 과속이었는걸.”
“그, 그 두 사람은 조금 특이한 경우···!”
“하아···솔직히 차기 대마법사인 네가 아까우면 더 아깝지, 나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잖아. 이제 그만 단념해. 아셀.”
저고리를 풀어헤친 마르야가 성큼 다가왔다. 아셀이 뒷걸음질쳤지만 뒤는 호수로 막혀 도망칠 곳이 없었다. 벌써 미래 계획을 세운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너랑 나를 반반씩 닮으면 정말 완벽할 거야. 애가 혼자면 심심할 테니까 먼저 서너 명 정도만 낳아 보자. 집도 넓은데 북적거리고 좋네.”
“아, 안돼 마르야. 이제는 정말로 안 돼···.”
이건 결혼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슬슬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셀의 눈물겨운 호소에도 불구하고 마르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너는 누워서 구름 관찰이나 하고 있으면 되니까. 지금까지 자주 그래 왔잖아?”
“그, 그건 너무 비인도적이야. 하고 나면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머지않아 닥쳐올 미래를 상상한 아셀이 히끅거렸다. 그것은 쥐어짜내진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였다. 쾅! 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걷어차 버린 마르야가 방긋 웃었다.
“내가 업어 주면 되지. 문제 해결이네.”
“시, 싫어어엇!”
아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그의 위로 마르야가 올라탔다. 한창 포장지를 벗기던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복마전 일이 끝나면 우리끼리라도 잠깐 제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며칠 뒤에 슐리펜이 자이파 님한테 도전한다네. 나비로제 교관님은 이미 예선전에서 꺾었나 봐. 어쩌면 정말 새로운 검성이 탄생할지도.”
마르야가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아셀에게 감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가 시간을 벌기 위해 뭐라도 말하려던 차였다. 마르야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