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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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
여름바람이 무더웠다. 전함처럼 육중한 적란운이 새파란 제도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나비로제가 아닌 다른 도전자는.”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가 검성을 뵙습니다.”
슐리펜이 검례를 보냈다. 그는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전투용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암청색 머리카락이 뙤약볕 아래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드넓은 투기장 한복판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새하얀 포석으로 뒤덮인 원형의 공간은 어지간한 시골 마을 하나를 통째로 넣을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제국에서 가장 큰 투기장인 그랜드 서클이었다.
“전쟁 이후 첫 개시로군.”
“내가 설마 자이파 님과 제국의 샛별이 붙는 걸 보게 될 줄이야···평생 운을 다 쓴 것 같아요.”
전대미문의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은 요란스레 술렁거리고 있었다. 점점 고조되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서클의 관객석은 발들일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검성 결정전을 보기 위해 찾아온 인파였다.
“너 아니면 그 로난이라는 애송이가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 그놈은 네게 패배한 건가?”
“아뇨. 참가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검성 자리에는 별 관심이 없던 모양이더군요.”
“크크크···하여튼 시건방진 놈이군.”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사실 이 또한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로난은 검성 같은 명예직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때 귀빈용 객석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 노친네 말 많네. 신혼 생활 즐기기도 바쁜데 와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거기 있었나.”
고개를 돌린 자이파가 픽 웃었다. 로난은 아데샨과 함께 그랜드 서클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주변 자리는 아셀과 마르야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혼인을 했었지. 한창 좋을 때군.”
“기가 막히네. 피로연 술을 모조리 작살내 놓고 간 주제에 그걸 까먹어?”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아데샨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데샨의 바램에 따라 필레온 아카데미의 대광장에서 치러진 결혼식에는 지금껏 그들이 인연을 맺어 온 사람 대부분이 찾아왔다.
자이파는 가장 먼저 온 하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축하한다는 짧막한 말을 남긴 뒤 피로연에 사용할 술을 싹 해치우고 돌아갔다. 물론 결혼식 비용 전체를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의 만년설화 담금주를 선물로 보냈지만, 그건 결혼식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내가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용들이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데···원래대로라면 넌 나바르도제 누님이랑 오르세한테 죽었어!”
“내버려 두지 그랬나. 불의 어머니는 몰라도 그 마룡하고는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지지. 슐리펜! 저 재수 없는 고양이를 날려 버려!”
로난이 입가에 손을 말아 외쳤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나비로제가 동의하듯 주억거렸다.
슐리펜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이릴이 두 손을 모은 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슴처럼 큼직한 눈망울에는 걱정이 가득 맺혀 있었다.
“슐리펜 님.”
이릴이 읊조렸다. 슐리펜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자이파라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역대 최강의 검성. 굳이 싸울 필요 없다고 만류도 해 봤지만, 결국 슐리펜은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나섰다. 다시 자이파를 돌아본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질 생각은 없습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닌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단상 위로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번 경기를 주관하는 사회자이자, 제국의 황제인 발론 44세였다.
“오우, 흰머리 늘어난 것 봐. 고생 좀 하셨나본데.”
“로난, 쉿···!”
오직 로난만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옆에 앉은 아데샨이 그의 입을 덮었다. 온통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이 끝나고 황제가 겪은 고생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천천히 투기장을 둘러보던 그가 입을 뗐다.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폐하를 뵙습니다.”
슐리펜과 자이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황제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목청을 두어 번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무위와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제국제일검을 결정짓는 자리인 만큼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
“뭐야. 설마 저게 끝이야?”
“최고의 경기를 기대하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제가 등을 돌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소한 연설에 로난이 실소했다.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황제의 옆에는 검의 제전을 주관하는 원로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럼 시작은 언제 하는···”
로난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찰나였다. 흐릿해진 자이파의 형체가 앞으로 쏘아졌다. 슐리펜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신의 눈앞에서 비적거리는 언월도와 페일 로드를 보며, 자이파가 웃었다.
“이제는 밀려나지 않는군.”
“덕분입니다.”
슐리펜이 답했다. 자이파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발자국만큼도 밀려나지 않았다. 첫 인사를 받던 때와 비교하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관객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맙소사···!”
그들의 눈에 자이파는 한순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걸로 보였다. 그때 칼날이 길항하며 전투가 재개되었다. 카앙-! 높이 솟아오른 언월도가 슐리펜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흐읍!”
어깨를 비튼 슐리펜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검격을 피했다. 쾅! 육중한 날붙이는 특수 소재로 이루어진 포석을 두부처럼 가르며 파고들었다. 슐리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푸르스름한 페일 로드의 칼날이 바람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자이파가 땅에 박힌 창날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슐리펜이 횡으로 칼자루를 휘두름과 동시에 바람이 자이파를 덮쳤다. 촤자작! 수십 마리의 맹금이 할퀴고 간 듯한 상처가 그의 몸 위로 새겨졌다. 슐리펜이 다루는 바람은 가닥가닥이 예리한 명검과 마찬가지였다. 검은 털 위로 솟구친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애송이가.”
자이파의 눈이 좁아졌다. 유효타를 입힌 슐리펜이 연격에 나섰다. 하지만 자이파는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월도를 마저 뽑아 휘둘렀다. 쾅! 예상보다 빠르게 날아온 묵직한 일격이 페일 로드를 강타했다.
“윽!”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밀려난 칼배가 갈비뼈를 때리는 바람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바람에 베이는 고통이 상당했을 텐데.’
과연 불패의 검성다운 근성이었다. 하지만 슐리펜 역시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곧바로 자세를 다잡은 그가 자이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페일 로드의 검신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음···!”
자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고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리치가 긴 언월도로 응수하기에는 슐리펜과 그의 간격이 너무 좁아져 있었다. 슐리펜이 막 찌르기를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창을 휘두르던 척 연기하던 자이파가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파앙-!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른 슐리펜이 그의 무릎을 밟으며 재도약했다.
“아?”
자이파의 눈이 커졌다. 예측 당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디딤돌 삼아 재도약한 슐리펜은 거의 10m 가까이 솟구쳐 올랐다.
“꺄아아악!”
“끄, 끝내준다.”
상식을 초월하는 높이에 관객들이 경악했다. 자이파는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자신의 수를 읽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저렇게 공중에 떠오른 채로는 아래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 정도 상식을 슐리펜이 모를 리가 없겠지만서도.
“솜씨 좀 볼까.”
이 포지션을 잡았다는 건 검기로 한번 붙어 보자는 소리였다. 클클거리던 자이파가 창대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으로부터 퍼져 나온 시커먼 마나가 창날에 휘감겼다. 공간을 자르는 그의 오러는 검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 고점에 도달한 슐리펜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발도 자세를 취한 채 강하하던 그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하압!”
기합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반달 형상의 검기 두 개가 교차하며 쏘아졌다. 끝에서 끝의 길이가 투기장을 횡단할 만큼 길고 넓은 검기였다. 경기를 지켜보던 나비로제가 작게 감탄했다.
“벌써 저기까지 이르렀나.”
거의 자신의 검기과 근접하는 크기였다. 위력 또한 어마어마할 터였다. 그때 검기를 지켜보고만 있던 자이파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선을 그은 언월도가 제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슐리펜의 눈앞에 검은 선 한 가닥이 그어졌다.
“저건···!”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전에 함께 와이번 사냥을 할 때 본 적이 있었다. 닿는 것은 모조리 찢어발기는 공간의 균열이었다. 검은 선에 닿은 슐리펜의 검기가 허무하게 끊어졌다. 콰광! 쾅! 토막 토막 나눠진 검기는 자이파가 아닌 투기장 바닥을 때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벌떡 몸을 일으킨 로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등신아, 피해!”
아마 관객석에 있는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을 터였다. 슐리펜은 로난과 달리 마나를 벨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기는커녕 더욱 속도를 더했다. 그의 얼굴이 막 검은 선과 닿으려던 찰나였다. 쉬릭!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이 슐리펜의 궤도를 아주 조금 아래로 뒤틀었다. 공간의 균열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과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번잡하기는.”
자이파가 웃었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악마적인 동체시력을 가진 그는 슐리펜이 어떤 식으로 나오던 간에 파훼할 자신이 있었다.
파지법을 보니 짧고 빠르게 한 방을 쏠 생각이군. 순식간에 해답을 도출해낸 자이파가 막 반격에 나서려던 차였다. 쩌적! 갑자기 들고 있던 언월도의 창대 위로 수십 가닥의 절단선이 그어졌다.
“무슨.”
자이파가 당혹성을 흘렸다. 토막이 난 창대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첫 합을 겨룰 때부터 꾸준히 슐리펜이 손상을 줬는데, 그 결과가 지금에야 나온 것이었다. 창대를 집어던진 그가 맨손으로 응수하려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푹! 페일 로드가 자이파의 꼬리를 관통하며 바닥에 박혔다.
“시건방진···.”
자이파가 으르렁거렸다. 혹한을 머금은 검에서 퍼져 나온 냉기는 그대로 자이파의 꼬리 전체와 인근의 바닥을 얼려 버렸다. 그가 꼬리를 떼어낼 작정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칼자루를 놓으며 뒤로 몸을 뺀 슐리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폭풍이여.”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콰아아아-! 지반을 찢으며 나타난 회오리가 자이파를 휘감으며 솟구쳤다. 가닥 하나하나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칼바람은 투기장 위를 지나가던 뭉게구름에 거대한 구멍을 뚫기에 이르렀다. 조용하던 객석에서 우레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슐리펜 너 이 새끼···!”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끝내주는 페이크였다. 바람에 삼켜진 자이파의 형체는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간 슐리펜의 오러에 당했던 적의 사례를 생각해 봤을 때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이대로 결판이 나나 기대하던 와중이었다. 촤악! 갑자기 회오리 위로 검은 선이 그어지더니 바람이 좌우로 찢어졌다.
“뭣···!”
슐리펜의 얼굴이 굳었다. 위협을 느낀 그가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이었다. 섬전처럼 날아든 자이파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콰직! 동시에 날아든 검은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슐리펜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분명히 배를 맞았는데 척추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쾅! 일직선으로 튕겨 나간 그가 투기장 벽면에 충돌했다.
“슐리펜 님!”
이릴이 비명을 질렀다. 슐리펜을 날려 버린 자이파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회오리를 빠져나온 그의 몸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검붉은 웅덩이가 발치에 생성되고 있었다. 반 이상이 뜯겨나간 털 아래로는 시커먼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물론 자이파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 위로 피어나는 투기는 오히려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어느새 빠져나온 열 개의 발톱이 시커먼 손가락 위로 번득이고 있었다. 나비로제마저 격침시킨 자이파의 진정한 검이었다. 쾅! 휘청거리던 슐리펜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자이파가 섬뜩하게 웃음지었다.
“즐겁군. 그렇지 않나?”
<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