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6)
12. 검성(2) >
#A12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즐겨 본 것이.”
자이파가 말했다. 스산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동공은 완전히 세로로 좁혀져 있었다. 폐를 쥐어짜 내는듯한 살기가 투기장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피를 뱉어낸 슐리펜이 탄식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자이파의 부상은 도저히 근성으로 이겨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넝마가 된 전신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페일 로드에 찔렸던 꼬리는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절단면이 깔끔한 걸 보아하니 회오리바람 속에서 스스로 자른 듯했다.
“위험하군.”
나비로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린 그녀가 쇄골에 남아 있는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일전의 검성 결정전에서 자이파에게 당한 흔적이었다. 자신을 패배시킨 것이 바로 저 상태의 자이파였다.
“후우우우···.”
슐리펜이 호흡을 바로잡았다. 척추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도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침착해야 한다. 유효타를 먹인 이상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승산은 차고 넘친다.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아직 더 놀 수 있겠지. 응?”
그리 말한 자이파가 갑자기 몸을 낮췄다. 두 손으로 땅을 짚은 것이 꼭 사냥감을 덮치기 전의 맹수를 연상케 하는 자세였다. 찰나, 검을 바람으로 바꾸려던 슐리펜이 멈칫거렸다.
‘위험하다.’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 준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지금 그 선택을 하면 안 된다고. 오러를 거둔 슐리펜이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벼락이 작렬하는듯한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 나타난 자이파가 감탄을 흘렸다.
“대단하군. 이걸 읽었나.”
“무슨, 속도가···!”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다섯 개의 발톱이 페일 로드와 맞물려 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쥔 자신의 손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오십 걸음도 더 되었던 간격은 의미를 잃고 좁혀져 있었다. 자이파가 서 있던 포석 위에는 거미집 같은 균열이 남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다릿심으로 찍어누르며 도약한 흔적이었다. 자이파의 손은 두 개였기에 곧바로 다음 공격이 날아왔다. 촤악! 좌측 아래에서 사선으로 올라온 발톱이 슐리펜의 가슴팍을 긁으며 지나갔다.
“크윽!”
피가 튀었다. 깊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슐리펜이 뿌리치듯 검을 휘둘렀다. 카앙! 가볍게 검격을 튕겨낸 자이파가 목청 높여 포효했다.
“잔재주는 그쯤 부리고 제대로 덤벼라!”
쾅! 검과 발톱이 닿으며 다시금 벼락이 내리쳤다. 연달아 쏟아지는 공격에 슐리펜이 입술을 비틀었다. 무기를 버린 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이파의 공격은 오히려 언월도를 들었을 때보다 더욱 위험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검신을 바람으로 화하게 할 틈이 없었다. 결국 단념한 그가 자세를 바로잡고 응수에 나섰다. 발톱을 세운 자이파는 확실히 빨랐지만 속도라면 슐리펜도 밀리지 않았다.
발톱과 검신이 충돌할 때마다 허공에서 불씨가 피어났다. 보통 사람은 인지하기조차 힘든 검격이 수십 번을 오가던 와중이었다. 푸확! 자이파의 어깻죽지 위로 피분수가 튀어 올랐다.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크하, 제법이군!”
“당신···!”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막히리라 예상했던 공격이었다. 합을 몇 차례 더 주고받던 그가 입을 열었다.
“···검성. 기권하십시오.”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지금 뭐라고 했지, 애송이?”
“기권을 종용했습니다. 죽을 생각이십니까?”
“눈치는 또 쓸데없이 빠르군그래.”
자이파가 실소했다. 슐리펜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그의 몸 상태는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 보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자이파가 정통으로 맞은 것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간부 여섯을 갈아 버린 회오리였다. 칼바람에 난자당한 상처는 실시간으로 그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경기를 속행하다가는 정말 잘못될 수도 있었다. 여기는 제국제일검을 결정짓는 자리지, 살인을 저지르는 불법 검투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이파의 뜻은 다른 듯했다.
“네놈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하지만···!”
“닥쳐라! 그딴 식으로 나온다면, 더는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해 주마!”
“크윽!”
자이파가 슐리펜을 걷어찼다. 불시의 일격에 튕겨 나간 그가 제비를 돌며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콰앙! 갑자기 몸을 웅크린 자이파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확실히 인간과 웨어타이거의 신체 능력은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났다. 슐리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도약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저, 저렇게 높이···!”
“대단하군. 정말로 대단해.”
“이런 젠장,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그의 궤적을 따라 고개를 꺾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자신과 함께 와이번을 조지던 때와 비슷한 높이었다. 자이파의 형체가 거의 점처럼 보이게 될 무렵이었다. 스아아아···! 강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자이파 주변의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아셀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마나의 범상치 않은 움직임을 읽어내고 있었다. 점이 된 자이파를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바, 방어막을 전개해야 해요! 어서!”
“메이지 아셀? 어, 어서 방어막을 펼쳐라!”
대기하던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아셀의 비명을 그들이 일제히 주문을 영창했다. 반투명한 역장 수십 겹이 투기장과 관중석 사이를 겹겹이 메우는 차였다. 스각! 투기장 위로 검은 선 다섯 개가 그어졌다.
“이건···!”
자이파의 오러인 공간 균열이었다. 그의 발톱 자국과 똑같이 생긴 다섯 균열의 크기는 투기장을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를 정도로 거대했다.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슐리펜이 방어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검은 선이 사라짐과 동시에 박살난 포석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으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관중석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고 작은 파편에 직격당한 역장들이 연달아 파괴되고 있었다. 물론 여러 장이 겹쳐진지라 그들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검성···!”
슐리펜이 경악했다.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가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불어온 바람이 흙먼지를 날려버렸다. 참혹한 광경을 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
다시 드러난 투기장은 쟁기로 갈아엎은 콩밭처럼 변해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에게 파괴된 이후 간신히 복구한 시설인데, 오히려 전보다 더 엉망이 되고 말았다.
황제가 뒷목을 잡으며 휘청거렸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콰아앙! 검은 유성처럼 낙하한 자이파가 슐리펜의 뒤에 착지했다.
“이런···”
“늦었다!”
슐리펜이 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자이파의 오른손이 그의 옆구리를 훑으며 지나갔다. 푸확! 다섯 갈래의 상흔이 새겨짐과 동시에 선혈이 튀어올랐다.
“허억.”
줄곧 냉정을 유지하던 슐리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자이파의 송곳니 사이로 웃음이 새나왔다. 하지만 슐리펜 역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던 그가 몸을 세우며 검을 올려 벴다. 촤아악! 검로를 따라 솟구친 바람이 자이파의 상반신을 휩쓸었다.
“크헉!”
의식을 잃을 정도의 통증이 덮쳐왔다. 하필이면 예전에 나비로제에게 칼을 맞았던 자리를 당했다 . 잠시 주줌거리며 물러났던 두 사람이 다시금 격돌했다. 카가각! 검과 발톱이 맞닿을 때마다 그들의 발치에 새로운 핏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
“마, 말려야 해.”
보다 못한 이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슐리펜이나 자이파나 당장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울먹거리던 그녀가 관계자를 찾아 움직이려던 차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로난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누나. 안 돼.”
“하, 하지만 이대로 가면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안 돼. 다시 앉아.”
이릴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로난은 단호하게 만류했다. 슬퍼하는 누이를 보는 것은 정말로 괴로웠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다시 앉힌 로난이 말을 이었다.
“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죽는 게 무섭지도 않은 거야?”
“그게 무서우면 칼잡이 노릇 못 하지.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냥 지켜봐 줘···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슐리펜 저 자식은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있거든.”
이릴이 갸웃거렸지만 로난은 말없이 미소만 머금었다. 그는 슐리펜이 자신에게 한 맹세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멍청이는 말했다. 가장 강한 검사가 되지 않고서는 평생 이릴 양을 지키겠다며 선언할 자격이 없다고. 슐리펜에게 있어 결혼이란 그런 의미였다. 전투는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팔짱을 낀 로난이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이겨라. 슐리펜.”
살다살다 누나를 데려가겠다는 놈을 응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백 년 간은 저것보다 괜찮은 놈이 대륙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이제는 걸레짝이 슐리펜과 자이파가 서로를 향해 검과 발톱을 내지르던 도중이었다. 한순간 자이파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큭···.”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부작용이었다. 잠깐. 아주 잠깐 정권을 내지르던 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찰나라고 부르기조차 아까운 한순간이었지만, 슐리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양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그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아압!”
첨예한 찌르기가 자이파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대로라면 주먹보다 검이 닿는 것이 빨랐다. 하지만 자이파는 멈추지 않았다. 푸확!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음과 동시에 거대한 주먹이 슐리펜의 이마에 직격했다. 검은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빗나갔지만 주먹은 틀림없이 골통을 부숴 놓았다. 끝났군. 그리 입속말한 자이파가 입꼬리를 올리려던 차였다. 스아아···슐리펜의 형체가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졌다.
“뭣이···!”
자이파의 눈이 커졌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던 페일 로드가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애초에 슐리펜은 그의 정면에 서 있지 않았다. 바람을 이용한 눈속임이었을 뿐.
‘그렇다면 어디 있지?’
자이파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불현듯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위기를 직감한 자이파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스각! 혜성처럼 쇄도한 참격이 그의 옆구리를 베어 가르며 지나갔다.
“···커헉!”
자이파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이번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관객석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검격과 함께 돌진했던 슐리펜이 스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윽.”
슐리펜이 비틀거렸다. 그는 검 끝을 땅에 박아넣으며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했다. 자이파는 옆구리를 베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피는, 칼이 흘리는 눈물이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슐리펜을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첨예한 손톱 아래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둘 중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그 눈물을 감당할 수 있느냐?”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한때는 아버지이자 사냥꾼, 북부 수인 연합의 수장에서 지금은 황제의 검이 된 그가 지금껏 베어 온 적은 말 그대로 셀 수조차 없었다.
칼의 눈물이란 곧 죽음이었다. 검성이란 제국 제일의 검.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많은 눈물을 거두어야 할 사람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금의 평화가 영원토록 이어지리라 확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이파는 책임에 대해 묻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토록 짊어져야 할 그 짐에 대해서. 잠시 침묵하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네.”
주저 없는 목소리였다. 슐리펜의 시선은 관중석에, 정확히는 거기에 앉아 있는 이릴과 친구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무리 막중하고 무거운 선택을 강요받을지라도 사랑하는 이들의 면면은 언제나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자이파를 돌아본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흥.”
자이파가 웃었다. 천천히 기울던 그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쓰러졌다. 아찔하리만치 새파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찢어 놓은 적란운은 이제 수십 마리의 양 떼가 되어 바람 위를 노니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상쾌하게 느껴졌다. 형체를 잃고 제멋대로 흩어지는 구름이 유난히 자유로워 보였다.
비틀거리며 그의 앞에 선 슐리펜이 검례를 보냈다. 함께 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손을 슬쩍 드는 것으로 유감을 표한 그가 눈을 감은 채 읊조렸다.
“내가 졌다. 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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