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29)
15. 소년과 소녀 >
#A15
“우웅···오빠. 우리 어디 가?”
잠에서 깨어난 에린이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위의 풍경은 어느덧 제도의 저잣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따사로운 봄볕이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더욱 밝게 만들고 있었다.
부모 중 누구도 닮지 않은 백발은 구원자에게서 격세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에린을 업은 채 걸어가던 란세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아무데나. 그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오빠는 아빠가 싫어?”
“···싫어.”
로난의 얼굴을 떠올린 란세가 미간을 찌푸렸다. 매사에 무신경한 행동거지도, 그런 사람과 결혼한 엄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린이 말했다.
“거짓말. 사실은 좋아하면서.”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냥 입학식 때 안 와서 삐진 거잖아. 기껏 수석으로 불사조 명판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 모습을 못 보여줘서. 이해는 되지만 슬슬 화 풀고 옛날처럼 잘 지내면 안 돼?”
“윽···!”
란세가 당혹성을 흘렸다. 송곳처럼 예리한 지적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로난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었다.
분명 더 예전에는 그 넓은 등을 동경하며 자랐다. 세상을 구한 영웅을 아버지로 둔 것은 아들로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로난은 나름 자상한 면이 있어서, 아들에게 직접 칼 쓰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난은 점점 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걱정이 되어 물어봐도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절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란세는 검에 매진했다. 소원해진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어서. 누구나 인정하는 성과를 내면 돌아봐 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올해 초. 란세는 기어코 올해 필레온 무예과 수석을 차지했지만, 로난은 결국 입학식에 오지 않았다. 씁쓸한 기억을 떠올린 그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너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라서 그래. 이제 내려.”
“힝···조금만 더 업어 주면 안 돼?”
“안 돼.”
“이렇게 부탁해도?”
에린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노을빛 눈동자의 조합은 이릴 고모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침묵하던 란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이야.”
“히히, 우리 오빠 최고.”
에린이 환호하며 란세의 목을 끌어안았다. 란세는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린이랑 이것저것 사 먹으면서 시간 때우다가 들어가면 되겠지.
“오빠도 얼른 키 커지면 좋겠다. 엄마 정도만 됐으면 좋겠는데···나중에도 나 업어 줄 거지?”
“너 하는 거 봐서.”
어쨌든 날씨가 좋아서 산책할 맛은 났다. 남매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광장을 지나가던 와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괄괄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란세! 에린!”
“윽. 귀찮은 놈한테 걸렸네.”
란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 또래의 소년소녀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금발에 키가 작은 두 명이 먼저 다가와 란세에게 인사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란세 오빠···.”
“어라, 란세 형. 오늘은 아카데미 안 가요?”
카라벨 가 오남매 중 셋째와 넷째인 카밀라와 진이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금발은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마르야 이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유들유들한 성격은 아셀 삼촌을 조금 더 닮아 있는 것 같았지만. 업힌 채로 머리를 빼꼼 내민 에린이 진에게 말했다.
“오늘은 주말이잖아. 멍청한 진.”
“에, 에린···!”
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라 말도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는 것이 에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남아 있던 소녀 한 명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둘이 사이좋게 어디 가? 나도 좀 업어 주라.”
“너는 무거워서 안 돼.”
“숙녀한테 무례하기는. 세상은 좀 잘생겼다고 전부가 아니야.”
소녀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나이에 비해 다부진 체격과 화톳불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아셀과 마르야의 첫째 자식이자, 오남매의 장녀인 세치카 카라벨이었다.
무재를 타고난 란세와는 달리 아버지의 마법적 재능을 물려받은 그녀는 이번 필레온 아카데미의 마법과 수석을 차지한 인재이기도 했다.
“마르야 이모는?”
“집에 아빠랑 같이 있어. 잠깐 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나가서 놀고 오라던데? 하여튼 금슬이 너무 좋아도 탈이라니까.”
세치카가 키득거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마르야가 쥐어준 동전 주머니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란세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이랑 똑같네···아무리 친하다지만 이런 주기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잖아···.”
“솔직히 그쪽은 아직 괜찮지.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나 봤자 겨우 세 명이잖아. 이쪽은 무려 여섯 명이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세치카 언니? 나 동생 생겨?”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어른들의 사정을 알기에는 이른 나이었다. 음흉하게 키득거리던 세치카가 에린의 볼을 콕콕 찔렀다.
“흐흥, 역시 에린은 애구나. 그런 게 있단다. 쉽게 말하자면···.”
“내 동생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린세는 제빨리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세치카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그렇고 너 들었어? 그 소문.”
“소문이라니?”
“요즘 상인들끼리는 난리도 아니잖아. 제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 실종 사건.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
란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전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눈웃음친 세치카가 말을 이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어른들은 우리가 이런 소문에 현혹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아직 제도 변두리에서만 벌어지고 있어서 무덤덤한 것도 있고.”
“변두리라 하면 어디쯤? 제도가 보통 넓어야지.”
“동부 접경지 부근이라는데 확실하지는 않아. 아무튼 내 정보망에 의하면 사건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 같아. 벌써 실종자가 백 명에 가깝다는 걸 보면.”
“···백 명?”
란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업혀 있는 에린을 힐긋 돌아본 그가 입을 뗐다.
“에린. 잠깐 내려볼래?”
“웅? 왜?”
“세치카랑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자, 여기 돈 줄테니까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라도 사먹고 있어.”
란세가 로난에게 받은 은화를 꺼냈다. 에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와. 정말로? 오늘은 내가 맘대로 써도 돼?!”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에린이 란세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쭈뼛거리는 카밀라와 진의 손을 붙잡고 시장으로 달려갔다. 세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란세가 세치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역시 눈치가 빨라. 있지 란세,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
“뭐?”
“솔직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들이 너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잖아. 별을 베어낸 검사와 대마법사마저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해결하는 건 정말 끝내주는 일 아냐?”
불현듯 세치카가 팔을 뻗어 광장 중심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하나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거인의 머리를 짓밟은 채 검을 치켜든 사내는, 방금까지 란세의 집에서 얼굴에 잡지를 얹은 채 퍼질러 자던 아저씨와 똑 닮아 있었다. 조각상을 빤히 바라보던 란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 엄마가 알면 기절하실 거라고.”
“로난 삼촌이랑 우리 엄마아빠가 부모님의 눈치를 보셨을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잠깐만, 란세!”
말을 맺은 란세가 등을 돌렸다. 세치카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쟤는 머리도 좋으면서 왜 저러는 건지. 입속말을 중얼거린 란세가 시장 쪽으로 걸어가던 와중이었다. 양손을 말아 입 앞에 가져다 댄 세치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말 못 들었어?! 기회는 지금뿐이라니까!”
“저 바보.”
란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야 이모를 닮아서 목소리 하나는 정말 컸다. 주변의 이목이 쏠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치카는 계속해서 꽥괙 떠들어 댔다. 그마저도 무시한 란세가 로난의 조각상 앞을 지나가던 차였다.
“이 쪼다야! 평생 부모님의 후광에 갇혀 지낼 거야!?”
“···뭐?”
우뚝. 란세의 다리가 멈췄다. 그가 정지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세치카가 당혹성을 흘렸다.
“뭐, 뭐야…멈췄네?”
란세는 망치로 얻어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부모님의 후광. 그 말이 자그마한 머릿속을 빙글빙글 떠다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은 실종 사건이니 뭐니 해서 소란스럽다지만 위대하신 부모님들은 금세 일을 해결해 버릴 테고, 또다시 평화가 찾아올 터였다.
어쩌면 아버지가 입학식에 찾아오지 않은 것은 바빠서가 아니라 단순히 시시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로난의 조각상을 올려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아버지의 얼굴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 표정 한번 볼만하군 겁쟁이. 바지에 똥이라도 지리셨나?
“···젠장.”
란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치카는 염력으로 몸을 띄운 채 그에게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은 진작에 눈치챘지만, 란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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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구름에 가려진 밤이었다. 부스러기 같은 별빛마저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서는 가로등이 만들어낸 인공광만이 남아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런 작위적인 빛마저 닿지 않는 뒷골목에서 이루어졌다. 란세가 좁다란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후후. 겁쟁이는 아니군. 미행은 없었겠지?”
동시에 저 어둠 속에서 감색 로브를 뒤집어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인처럼 보이는 사내 두 명이 그녀의 발치에서 졸도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란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해.”
“훌륭하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별 거 아니었어. 아버지는 외출, 엄마는 에린이랑 자고 있었으니까.”
“시타는?”
“사흘 전부터 오필리아 누나랑 놀러 나갔어.”
완벽하군. 그리 말한 소녀가 후드를 벗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생글생글 웃는 세치카에게 란세가 질문했다.
“그래서 저 두 명은 뭐야?”
“그냥 시시껄렁한 불량배들. 거칠게는 안 다뤘으니 걱정하지 마.”
“그렇다기에는 거품을 물고 있는데···.”
란세가 쯧쯧 혀를 찼다. 자세히 보면 팔다리도 약간 이상하게 돌아가 있는 것이 멀쩡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시비 걸 사람을 잘못 골라서는.
키득거리던 세치카가 입을 뗐다.
“내 쪽도 안전해. 좋았어 란세. 우리 한번 전설을 써 보자고.”
“뭐가 됐든 해 봐야지. 그래서 계획은 뭐야?”
“이미 완벽하게 짜놨어. 제도 서문으로 가면 내가 빌려 놓은 유령마가 두 마리 있을거야. 먼저 그걸 타고…음? 너 혹시 주머니에 뭐 있어?”
“응?”
불현듯 계획을 설명하던 세치카가 갸웃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란세의 외투 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 이거?”
눈썹을 으쓱인 란세가 주머니 안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동글동글한 구체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색은 칙칙하고 표면은 상어 비늘처럼 까슬거리는 것이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세치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응. 그거. 안에서 마나가 느껴지길래.”
“갑자기? 언제나 들고 다녔었는데.”
“언제나 들고 다녔다고···? 그게 정확히 뭔데?”
“나도 잘 몰라. 내가 엄청 어릴 때 선물받은 거라서.”
란세가 말했다. 아주 어릴 적에 로난에게서 받은 물건이었는데, 그냥 늘 지니고 다니라고 언질을 들었었다. 구체를 쳐다보던 란세가 의아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거 색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기분 탓인가?”
“별 거 아니면 됐어. 그럼 계획을 마저 설명할게. 일단 유령마를 타고···”
싱겁다는 듯이 실소한 세치카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과연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단의 후계자 답게 치밀한 계획이었다. 란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경청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그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
“왜 그래?”
세치카가 질문했으나 란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뒷골목의 어둠 속을 떠나디고 있었다. 꼭 은하수가 안개로 변하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게···뭐지?”
“뭐야, 거기에 뭐가 있어?”
고개를 돌린 세치카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과 쓰러져 있는 멍청이 두 명 뿐이었다.
“너는 이게 안 보여?”
“보인다니···지금 뭘 가리키고 있는 거야?”
세치카가 당황하며 물었다. 반짝거리는 기류는 오직 란세만 볼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현상에 그가 홀린 듯이 다가가던 와중이었다. 뚜벅. 갑자기 뒤쪽에서 발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란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뒤에 있던 세치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치카?”
이름을 불러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잔향과 어둠, 반짝거리는 기류만이 남아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란세가 칼자루에 손을 얹는 찰나였다.
【아이야. 같이 가자.】
“무슨···.!”
귓가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발도한 란세가 검을 휘둘렀다. 스각! 어둠으로 뒤덮인 뒷골목에 나지막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빛나는 기류가 잦아든 자리에서, 두 소년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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