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0)
16. 아버지와 과거 >
#A16
“저,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 주십쇼!”
험악하게 생긴 중년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한 시간 전까지 흑전갈 도적단의 두목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 그의 뒤편으로는 만신창이가 된 조직원 수백 명이 같은 자세를 취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우, 우린 다 죽을 거야…왜 저 놈이 여기에···.”
“두목님…! 크흑!”
하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도 변두리의 한적한 객지. 언뜻언뜻 새나오는 달빛이 폐허가 된 요새를 비추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참상은 모두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똑바로 안 불어? 너희가 이 주변에서 가장 큰 도적단이라며. 뭐라도 뱉어내야 할 거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저희에게도 상도라는 게 있습니다. 수금은 지정된 구역에서만 했거니와 제도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다구요. 믿어 주십쇼!”
“수금 이러고 자빠졌네. 자랑이다 이 새끼야.”
딱! 로난이 칼등으로 두목의 머리를 내리쳤다. 반질반질한 대머리라 그런지 목탁을 두들기듯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흑···!”
두목이 이를 악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물을 삼키며 부들거리는 것 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두목이 몸서리쳤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요새를 통째로 베어 버리다니.’
4년 전통을 자랑하는 흑전갈 도적단이 붕괴되기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단신으로 쳐들어 온 로난은 최근 벌어지는 실종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냐 묻더니 다짜고짜 요새와 사람들을 썰어 버리기 시작했다. 쿵! 두목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호소했다.
“하늘에 맹세코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살려 주십쇼!”
“살려 주십쇼!”
그 말을 부하들이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복창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감옥이든 어디든 좋으니 이 괴물에게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썅, 그럼 도대체 누가 이딴 짓을 저지르는 거야?”
도적들을 쳐다보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표정과 말투로 미루어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러면 또 어디선가 사람이 실종될 텐데.
‘빌어먹을,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진척이 없군.’
그는 언제나처럼 실종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라와 있는 놈들을 잡아 족치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바람에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해야 할 책무에 애로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 새끼들은 규모가 있어서 뭐라도 알 줄 알았는데, 낭패스러울 따름이었다. 로난이 다음으로 조질 곳을 고민하며 신음하던 와중이었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 로난! 큰일 났어!”
“엉?”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몰두하고 있어서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옷 차림의 아셀이 밤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앳된 얼굴은 조금 헬쓱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십 년 전과 다른 게 없었다. 타오를 듯이 붉은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도적들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대, 대마법사···!”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라도 알 수 있었다. 로르혼에 이어 마도의 정점에 오른 메이지 아셀이었다. 별을 베어낸 검사에 이어 대마법사라니. 절망하는 도적들을 뒤로 하고 로난이 질문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우, 우리 아이들이 사라졌어! 란세랑 세치카가···!”
“···뭐?”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아셀은 울먹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갑자기 사라진 란세와 세치카, 지금까지의 실종 사건과 일치하는 맥락. 그리고 현장에 남아 있던 정체불명의 혈흔. 이야기를 전부 들은 로난이 입을 뗐다.
“란세나 세치카의 피야?”
“그, 그건 잘 모르겠어. 방금 발견한 거라…지금 시타가 북부에서 날아오는 중이야.”
“그래···결국 그렇게 된 건가.”
로난이 중얼거렸다. 불현듯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도적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생전 경험한 적 없던 살기가 로난의 어깨 위로 번져 나오고 있었다.
“수, 숨이···!”
“살려줘. 제, 제발.”
살기가 너무 강해서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흐느끼거나 오줌을 지리는 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필사적이 된 도적들이 자비를 호소하던 와중이었다. 로난의 팔이 한순간 흐릿해지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파앙!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의문을 갖기도 전이었다. 촤아아악-!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좌우로 갈라지며 쏟아질 듯한 별무리가 머리 위로 펼쳐졌다.
“허어억!”
도적들이 경악했다. 검풍에 베인 구름의 단면이 매끄러우리만치 깔끔했다. 비어 있던 로난의 손에는 어느새 라만차가 쥐어져 있었다.
하늘을 나는 거인들마저 도륙한 검. 그것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두목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네, 네엡!”
“긴말 안한다. 자수해라.”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호랑이를 마주쳐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두목이 다시 한 번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외쳤다.
“무, 물론입니다! 바로 자수하겠습니다!”
“꺼져.”
싸늘하게 선포한 로난이 아셀과 함께 자리를 떴다. 완전히 짓눌린 도적들은 그들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일어선 도적들은, 감시하는 이 하나 없음에도 자연스레 인근의 경비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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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으···.”
신음하던 란세가 눈을 떴다. 약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 불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어떤 구조물의 실내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란세가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뭐가···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집에서 나와서···뒷골목에 들어간 다음에···아.’
불현듯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던 란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두리번거리던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세치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입가에 손을 말아서 가져다댄 란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살아 있으면 대답해! 세치카!”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란세의 호흡이 가빠지던 와중이었다. 슈아악! 두리번거리던 란세의 몸이 갑자기 바람을 탄 것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뭐, 뭐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자신을 움켜쥐고 있었다. 몸을 누르는 압력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머지않아 정지한 란세의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 내지 마. 바보야.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너···!”
고개를 돌린 란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세치카가 팔짱을 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처럼 공중에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세치카.”
옷이 좀 지저분해지기는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입을 벙긋거리던 란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라, 란세?”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다, 당연하지. 이 세치카 누님을 뭘로 보고…일단 이거 좀 놔 줄래?”
세치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란세가 다급히 포옹을 풀었다. 서로를 등진 채 헛기침하던 두 사람이 다시 마주보았다.
“흠흠···그, 미안해.”
“아, 아냐. 너무 반가우면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래서…여긴 어디야?”
“모르겠어. 나도 방금 전에 일어났거든. 그런데 아마···정상적인 공간은 아닌 것 같아.”
세치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민한 마나 감응력을 타고난 그녀는 눈을 뜬 순간부터 여기가 이상한 장소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란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니?”
“모든 것이 뒤틀려 있어. 예전에 아빠 책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데···아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존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아공간이야.”
“아공간?”
“그래. 원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차원. 도대체 이런 걸 누가 만든 거지?”
세치카가 중얼거렸다. 이제는 눈이 어둠에 적응해서 슬슬 주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연 그 말을 듣고 보니 기이한 점이 여럿 눈에 띄었다.
꼭 거대한 동굴의 공동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목소리는 작게 말해도 웅웅 울렸고, 벽이나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닿는 곳곳에서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심호흡한 란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머니로부터 예민한 감각을 물려받은 그는 남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지않아 눈을 뜬 란세가 어둠 한복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정말로?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아냐. 확실해. 물소리···아니, 발소리인가?”
“으음, 가보면 확실해지겠지. 이제는 멀미 안 하지?”
세치카의 질문에 란세가 엄지를 쳐들었다. 피식 웃은 세치카가 주문을 영창했다.
스아아아···그녀의 손끝에서 발현된 바람이 두 사람의 다리와 발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이동 속도를 높여 주는 헤이스트 마법이었다.
아셀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닌 순수한 그녀만의 속성. 몸이 확연하게 가벼워진 것을 느낀 란세가 감탄을 흘렸다.
“숙련도가 더 늘었네.”
“기본이지. 소리는 네가 들었으니까 앞장서.”
란세는 그렇게 했다. 세치카는 염력과 바람 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를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란세가 전음으로 소리쳤다.
[멈춰!] “윽···!”뒤따르던 세치카가 급정지했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란세가 검지를 뻗어 바닥을 가리켰다.
[저길 봐.] “······!”고개를 숙인 세치카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지은 채 누워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지만 아이가 유난히 많았고, 전부 허옇게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입을 뗐다.
“시, 실종됐던 사람들이야···분명해.”
“···죽은 건가?”
“그,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나저나 몸에서 마나가 뽑혀 나가고 있는데···.”
세치카가 더듬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몸에서 마나가 실시간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은 모두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와중이었다. 어느 지점에 다다른 세치카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꺄아아악!”
“뭐야, 왜 그래···허억!”
같은 곳을 바라본 란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어지간한 드래곤보다 거대한 백사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 잠들어 있었다.
“···저게 뭐야?”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동상으로 인한 흉터가 미끈거리는 몸체의 절반 가량을 뒤덮고 있었다. 란세가 뭐라 더 말하려던 차였다.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거다. 지금 당장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면.】
“뭣···!”
【저래뵈도 복마전의 수장이었던 자니까 말이지.】
란세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사내 한 명이 뒷짐을 진 채 두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제법 잘 생긴 청년이었는데, 얼굴과 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사지 곳곳에 봉제인형을 연상케 하는 흉측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라, 란세…”
“당신은 누구지?”
세치카의 앞을 가로막으며 선 란세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으르렁거렸다. 골목길에서 보았던 반짝거리는 기류가 청년의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다. 침묵하던 청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 이름은 다르만이다. 위대한 네뷸라 클라지에의 잔불이자, 네 아비에게 한 번 죽었던 사람이지.】
<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