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1)
17. 로난 -完- >
#A17
“···우리 아버지한테 죽은 적이 있다고?”
【그래. 이 끔찍한 흉터가 그 증거지. 칼로 조각조각 썰린 뒤에 절벽에서 추락했거든.】
란세의 질문을 들은 다르만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겉으로 드러난 부위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태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치카가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했다.
“웁.”
【몸 전체가 이 꼴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접합한 흔적만큼은 사라지지 않더구나.】
다르만이 클클거렸다. 란세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며 빈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다르만이 입을 열었다.
【헌데···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모르는 듯하군. 네 아비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나? 검의 제전에서 벌어진 혈전에 대해서.】
“몰라. 당신 같은 사람은.”
【이거 서운한걸. 나름 명승부를 펼쳤다 생각했는데.】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냐?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많이 하던데.”
란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물론 아데샨이 해 준 로난의 소싯적 무용담 중에서 다르만의 이야기가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다르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아픈 부분을 찌른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빈틈을 포착한 란세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지금이다!’
그를 필레온에 수석 입학시켜 준 발도술이 쏘아졌다. 솔직히 아직도 당황스러웠지만 이거 두 개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납치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 그리고 몹시 위험하다는 것.
호를 그린 칼날이 다르만의 목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카각! 강한 반동과 함께 검이 정지했다.
“무슨···!”
【설마 이게 최선이었나?】
다르만이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칼날은 그의 집게손가락 사이에 붙들린 채 고정되어 있었다. 란세가 안간힘을 써봤지만, 검은 바위 사이에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란세와 검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다르만이 피식 웃었다.
【터무니없이 느리구나. 나이를 참작하더라도 아버지에 비하면 쓰레기 수준이야. 뒷골목에서 날린 참격은 그나마 생채기라도 났거늘.】
“크윽···이거 놔!”
【그러지.】
갑자기 다르만이 칼날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정말로 놓을 줄 몰랐던 란세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동시에 파고든 다르만이 그의 복부에 무릎차기를 꽂아 넣었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란세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커억!”
【이제 조용히 있어라.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
“라, 란세!”
란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세치카는 거의 반사적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창 십여 개가 다르만을 향해 쏘아지려는 찰나였다. 쉬릭! 한순간 흐릿해진 그의 형체가 세치카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끼어들지 마라. 주문쟁이 주제에.】
“아아악!”
다르만은 그대로 세치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마법이 취소됨과 동시에 그녀가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난 란세가 이를 악물었다.
“으윽···세치카···.”
【대마법사의 따님도 별 거 없군. 듣자하니 네 아비는 추락하는 섬을 멈췄다는데. 역시 피는 대를 거칠 때마다 탁해지는 건가.】
“그 애한테···손 대지 마. 커헉, 어차피 당신의 목적은 나잖아!”
【그렇지만은 않아. 이 계집에게도 용건이 있는 분이 계시거든. 메이지 아셀의 첫째에게 말야.】
다르만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로난을 어중간하게 닮은 주홍색 눈동자는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구···! 갑자기 지축이 울리는듯한 진동과 함께 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올라오는 머리는 눈앞에서 산이 솟아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마침내 이쪽을 바라본 뱀이 입을 열었다.
【아···셀?】
【그렇소. 복마전의 주인이여. 당신 원수의 딸을 잡아왔소이다.】
【그래···과연 닮았구나. 특히 그 머리 색이···내 모든 것을 앗아간 놈···.】
하나 남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한 목소리에 란세와 세치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제야 두 사람은 뱀의 온몸을 뒤덮은 상처가 누구의 짓인지 알게 되었다.
“아, 아빠가 신대륙에서 잡았다는 뱀이 설마···!”
세치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마르야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을 임신했을 무렵에 아셀이 신대륙에서 엄청나게 큰 뱀을 잡은 적이 있다고. 얼음으로 뒤덮어서 저 심해 속에 처박아 버렸다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 뱀이 분명했다. 아셀이 별 일도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치던 모습을 떠올린 세치카가 헛웃음을 쳤다.
뭐라고요 아빠? 저게 별 거 아니라고?
봉인은 다르만이 풀어준 것이 분명했다. 드래곤조차 자력으로 풀지 못하는 것이 아빠의 봉인이었으니까. 불현듯, 그녀를 노려보던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단번에 삼켜주마! 크아악!】
“허억!”
세치카의 눈이 커졌다. 덩치에 맞지 않는 번개 같은 몸놀림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녀가 헛숨을 들이키는 차였다. 앞으로 걸어 나온 다르만이 그녀를 가로막음과 동시에 뱀이 멈춰섰다.
【다르만.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곧 준비가 끝나니 조금만 참으시는 게 어떻소. 우리의 목적은 완전한 부활이지, 사소한 복수가 아니지 않소.】
【흥···서두르지 않으면 네놈도 잡아먹어 주마.】
【고맙군. 어서 끝내고 이 애송이들의 피로 축배를 듭시다.】
다르만이 가볍게 묵례했다. 세치카를 노려보던 뱀이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부활하려는 거구나. 이 사람들의 마나를 흡수해서.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 복수할 생각이고.”
【그래. 정답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제도 변두리에서만 사람들을 납치한 거야? 다른 곳에서 했으면 아예 안 들켰을 수도 있는데.”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제도를 사냥터로 삼아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다르만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머리는 쓸만하군.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특별히 알려주마. 우리가 제물을 모은 곳은 제도의 변두리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졌던 장소다.】
“전쟁?”
【그래. 가증스러운 연합군과 교단 간의···이제는 시간이 지나서 마을이 복구되었지만, 당시에 범람하던 마나는 고스란히 남아 주민들의 몸에 축적되었지. 이해가 좀 되나?】
“그럼 아이들 위주로 납치한 것도···!”
말뜻을 이해한 세치카가 기겁했다. 그들은 순도 높은 마나를 구하기 위해 과거 전쟁터였던 곳에서 먹잇감을 구한 것이었다. 다르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나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했거든.】
“이 악마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어차피 우리가 부활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리고 아이야, 기왕 연기할 거면 좀 잘했어야지.】
별안간 다르만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란세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세치카가 말을 시키는 동안 일격을 먹이기 위해 기척을 지운 채 접근하고 있었다.
“이런.”
“드, 들켰다!”
세치카가 기겁했다. 동시에 란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르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무슨···!】
조금 전의 검격보다 배는 빠른 속도였다. 다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란세의 검은 이미 그의 몸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촤아악! 다르만의 가슴 위로 붉고 긴 사선이 그어졌다.
“···젠장.”
피를 뒤집어쓴 란세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칼날이 너무 얕게 들어갔다. 격노한 다르만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 망할 애송이가!】
“아.”
전대 뤼코포스 수장이라는 직위에 걸맞는 훌륭한 발도였다. 란세의 시간이 느려졌다. 기괴한 각도로 날아오는 참격은 한때 자이파조차 꺾은 전적이 있엇다.
‘끝이다.’
검로를 볼 수는 있었지만 대응은 불가능했다. 세치카의 비명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강물처럼 눈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다정한 엄마와 사랑스러운 여동생.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과, 사실은 지금도 정말 존경하는 아버지. 죽음을 앞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후회가 가슴 속에서 아른거렸다.
‘왜 나는 솔직하지 못했을까.’
더 솔직하고 사랑했어야 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끝내 체념한 란세가 눈을 감았다. 불현듯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크윽?!】
“꺄악!”
아공간이 온통 밝아질 정도로 강렬한 빛무리에 다르만이 멈칫거렸다. 눈 먼 칼날이 란세의 머리를 쪼개려던 찰나였다. 카창! 사나운 금속음과 함께 다르만의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뭣이!】
뒤늦게 눈을 뜬 다르만이 눈썹을 치켜떴다. 굳이 따지자면 매를 닮은, 온몸이 하얀 새 한 마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날갯짓하고 있었다.
“휘리릿!”
【새? 잠깐, 이건···.】
불현듯 다르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괴한 색채의 방어막이 새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란세와 세치카를 완전히 뒤덮은 반구형의 장막은 그가 익히 봐 온 것이었다.
【벼, 별의 가호?!】
다르만이 경악했다. 틀림없는 별의 가호였다. 거인도, 교주도 모조리 죽은 이후 유실되었던 권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란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는···!”
더는 주머니에서 구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깨고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넘어진 세치카를 일으킨 란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 여기서 나온 거야?”
“휘릿!”
새가 회답했다. 꼭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벙쪄 있던 다르만이 재차 행동에 나서려던 차였다.
촤아아악-!
백만 장의 종이를 동시에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어둠 자욱하던 공간에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졌다.
【이건 또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르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머니처럼 벌어진 천장 위로 별 가득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여, 열렸어! 로난!”
그 중심에는 머리 색이 다른 사내 두 명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아셀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란세와 세치카를 발견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아, 아빠?!”
란세가 기겁했다. 너무 놀라서 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쾅! 그대로 두 사람 앞에 착지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냐? 안 다쳤어?”
“로, 로난 삼촌. 여긴 어떻게···.”
“니들이 사라진 곳에 피가 한 방울 떨어져 있더라. 그걸 쫓아왔지.”
로난이 천장을 향해 눈짓했다. 안도하고 있는 아셀 옆으로 익숙한 괴조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포효했다.
“뺘아아!”
“란세 네가 한 거지? 잘했다.”
히죽 웃은 로난이 아들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다르만의 혈흔이 아니었다면 추격이 매우 힘들어졌을 터였다. 그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피던 와중이었다.
“잠깐만. 너···.”
“왜, 왜 그래요?”
“다쳤냐? 어디 봐봐.”
로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예리한 시선은 란세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세히 몸을 살펴 보니 갈비뼈가 두어 대 나가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르만을 돌아보았다.
“···어이. 누더기.”
【드디어 이쪽을 보시는군. 그런데 누더기라니, 너무한 거 아닌···】
이죽거리던 다르만이 얼어붙었다. 노을의 색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칼자루를 고쳐 잡은 로난이 말을 이었다.
“니가 이랬냐?”
【흐, 흐흐···별달리 누가 있겠나. 그나저나 분위기가 많이 변했군 로난. 몰라보겠어.】
과거에 파르잔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살기에 짓눌리는 어깨가 무거웠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그가 입을 뗐다.
【하지만 나 역시 강해졌다. 교단의 버려진 유물을 모아 흡수하고 힘을 길렀지. 여기 백련왕과 연합한 우리를 이기기는 쉽지는 않을···】
시선을 돌린 그가 뱀에게 눈짓하려던 차였다. 쿵! 갑자기 집채만한 덩어리 하나가 다르만의 옆에 떨어졌다. 새하얗고 거대한 뱀의 머리통이었다.
【허억···!】
다르만이 헛숨을 들이켰다. 한때 복마전을 이끌었던 지도자의 머리는 자신의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한 듯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푸화아아악! 머리 잃은 몸통이 피분수를 토해내며 허물어졌다.
“맙소사.”
“배, 뱀이···!”
란세와 세치카가 경악했다. 뱀의 참수는 로난이 아공간에 진입함과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누구도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다르만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건···이건 말도 안 돼!】
무언가 잘못되었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다르만이 달아나려던 차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쥠과 동시에 노을의 색채가 검신을 타고 차올랐다.
화아아악! 동시에 주홍색 섬광이 붕괴되어 가는 아공간을 뒤덮었다. 다르만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그는 로난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나저나···.”
다르만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기도 전이었다. 로난의 팔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몸 위로 붉은 선 수백 가닥이 그어졌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씨부렁대던데, 넌 누구냐?”
【그럴, 수가···.】
다르만의 얼굴에 절망이 차올랐다. 로난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퍼어억-! 뭐라 할 새도 없이 육편이 되어 버린 몸뚱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버지.”
란세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강한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퉷! 핏물 위에 침을 뱉은 로난이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별 거지 같은 게 다 아는 척을 하네···거기 검성 나리, 뒷처리 좀 부탁합니다.”
“그러지.”
그때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훤칠한 사내 한 명이 란세의 앞에 착지했다. 암청색 머리카락에 조각 같은 외모. 익숙한 얼굴을 본 란세의 입이 다시금 벌어졌다.
“고모부…?!”
“오랜만이군. 란세.”
슐리펜이 끄덕였다. 정식으로 그랑시아 공작이 된 그는 란세가 가장 좋아하는 친척이었다. 란세와 세치카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슐리펜이 옅게 미소지었다.
“못 본 새에 용감해졌구나. 부상당한 와중에도 네 여자를 지키다니.”
“네, 네에?!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세치카는 그냥 친구라고요!”
“뭐라고 이 나쁜 놈아? 아, 아니지···맞아요! 누가 이런 거랑 사귀어 준대요?!”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빽 질렀다. 곧바로 눈이 마주친 란세와 세치카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미소를 남긴 채 돌아선 슐리펜이 검을 쳐들었다.
“어쨌든. 고생했다.”
콰아아아! 지면에서 솟구친 회오리가 다르만과 뱀의 시체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탄하던 와중, 다시 한번 다르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세치카! 우리 딸!”
“어, 엄마?”
세치카의 눈이 커졌다. 상단에 있어야 할 마르야가 금색 머리카락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가 세치카와 란세를 끌어안았다.
“이 못된 망아지 같으니. 너는 한 달동안 외출 금지야!”
“켁! 수, 숨 막혀···!”
“으읍. 저는 왜···.”
마르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슴에 얼굴이 눌린 두 사람이 바동거렸다. 어쩐지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에 로난이 실소했다.
“좋은 경험 하네 아들. 부럽다.”
“시, 시끄러워요···!”
그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폭력적인 흉부의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산소 부족으로 헤롱거리는 란세의 어깨 위에 일전의 하얀 새가 내려앉았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엉? 얘는 뭐냐?”
“아···! 아버지가 주신 구체에서 태어났어요. 저한테 도대체 뭘 주신 거죠···?
“뭐야, 그게 깨어났어?”
로난의 눈이 커졌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가 건네준 것은 아벨의 알이었다. 십 년이 넘도록 변화가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 부화한 모양이었다.
온몸이 설원처럼 하얀 새의 눈동자는 란세와 같은 주홍색이었다. 누구의 꿈을 마시고 태어났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새를 응시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은 잘 지내 봐. 인마.”
“퓌이익.”
하얀 새가 회답하듯 울었다.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곧바로 날아오른 새는 시타와 둘이서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곧이어 서서히 걷히던 어둠이 사라졌다. 마침내 소멸한 아공간 너머로 달 걸린 하늘과 들판, 슐리펜이 부른 병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이건!”
“···황제 폐하 맙소사.”
일렬로 누워있는 사람들과 하늘까지 솟구치는 회오리가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로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범들은 치웠으니 뒤처리는 알아서 해주겠지. 그가 쭈뼛거리는 란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우리도 갈까.”
****
란세가 납치당한 아공간은 제도 변두리의 시골에 펼쳐져 있었다. 마차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건물들 틈새로 비쳐오는 서광이 부자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쭈뼛거리던 란세가 힙겹게 입을 뗐다.
“엄마는···많이 우셨어요?”
아직도 자신이 겪은 일을 믿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불효막심한 일을 저지르고 왔는지 체감되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서 로난과 아셀을 비롯한 제국 최고의 전력들이 똥을 치우게 만들어 버렸다. 로난이 주저 없이 끄덕거렸다.
“그야 당연하지. 울고 불면서 따라오겠다는 걸 말리느라 내가 얼마나 애썼다고. 너도 알지? 너네 엄마가 평소에 착해서 그렇지 화나면 진짜 무서운 거.”
“네···으으, 역시.”
“여동생에게 감사해 인마. 에린이 집에 없었으면 무조건 따라왔을 테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네 볼기짝을 걸레짝이 될 때까지 때렸겠지. 세치카도 보는 앞에서.”
“네. 죄송해요···.”
란세가 머리를 푹 숙였다.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와중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하다.”
“···네?”
“입학식 말이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났어. 실종 사건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거든. 정말로 일부러 안 간건 아니야.”
로난이 면목 없는 투로 말했다. 한 발 늦게 말뜻을 이해한 란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저,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기는 개뿔이 괜찮냐. 나같아도 기분 더럽겠구만. 솔직히 속으로 생각했을 거야. 내가 머리만 더 커지면 로난 이 개자식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밤마다 내 이름 붙인 베개도 칼로 막 쑤시고, 응?”
갑자기 자세를 잡은 로난이 허공에 대고 마구 찌르는 시늉을 했다. 란세가 다급하게 손사래쳤다.
“그, 그런 짓 안 했어요!”
“쫄기는. 농담이야.”
“아윽! 윽!”
로난이 낄낄거렸다. 거친 손이 아들의 등을 두드릴 때마다 란세의 몸이 휘청거렸다. 기골을 보아하니 십 년만 더 지나면 나보다 커지겠군. 흐뭇하게 웃음짓던 그가 툭 내뱉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
“네? 지금 뭐라고···.”
“네가 자랑스럽다고 인마. 불알이 쪼그라들었을 상황인데 잘 해줬어. 너는 분명 겁나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그리 말한 로난이 먼저 걸음을 뗐다. 란세는 벙찐 채 아버지의 뒷모습을 쳐다만 보았다. 지금 내 귀가 망가진 건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
하지만 당황스러움과는 별개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마냥 사이가 좋던 과거의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어느덧 현관 앞에 다다른 로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나보다는 아니지만.”
“아, 기껏 감동했는데 그러는 게 어딨어요?!”
“꼬우면 너도 세상 구하던가. 아빠 들어간다.”
란세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로난이 낄낄거리며 문고리를 당겼다.
“아 진짜, 아빠!”
새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씩씩거리던 란세는 뭐라도 따지려는 듯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입은 웃는 채로.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정말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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