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4)
외전 18. 그랑시아의 아침
#A18
“···흠.”
잠에서 깬 슐리펜이 상체를 일으켰다.
넓고 화려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한 서광 한 줄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거슬려.’
수면에 방해되기에는 터무니없이 미약한, 오히려 운치가 느껴지는 빛이었지만 슐리펜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커튼을 치고 방이 완전히 암실로 변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수면 모자를 벗었다.
‘이제 좀 낫군.’
힐끗 쳐다본 시계는 오전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상 시간이었다.
별안간 어깨와 무릎 부근에서 미약한 통증이 발생했다.
“윽.”
전날에 한 무리로 짐작해 보건대 근육통인 듯했다.
일상에 지장이 생길 만큼 거슬리지는 않았기에 그는 곧바로 일과를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언제나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 슐리펜이 침대를 돌아보았다.
“에헤헤···어디 가는 거니, 아리아···.”
이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베개 위로 쏟아진 은백색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뭔가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지 딸의 이름을 불러대며 헤실헤실 웃는 중이었다.
‘아름답군.’
그 모습을 본 슐리펜이 미소 지었다.
로난의 누이이자 별의 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가 되었음에도 처음 만났던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슐리펜과 같은 암청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잠옷은 온 가족이 다 함께 맞춘 것이었다.
잠버릇이 워낙 발랄한 탓에 이불은 몸의 절반만 덮고 있었다.
“똑바로 덮어야···감기에 안 걸립니다.”
슐리펜은 밖으로 삐져나온 이릴의 팔다리를 제대로 덮어 주었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쿡쿡거리며 이불 속에 있는 딸을 끌어안았다.
웬일로 얌전히 있는 걸 보니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그냥 가야 하나?’
슐리펜이 턱을 매만졌다.
그에게 있어 하루의 시작은 아내와 딸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것을 의미했다.
위험하지만 한 번 자면 업어가도 모르는 아이니까 깨지는 않을 터.
한참을 더 고민하던 슐리펜은 결국 이불을 들췄다.
귀금속을 다루듯이 섬세하고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거진 일 분에 걸쳐서 이불을 치우는 순간이었다.
“······이런.”
슐리펜의 얼굴이 굳었다.
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큼직한 베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딸과 체격이 비슷한 베개에는 [숨바꼭질!]이라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른 채 중얼거렸다.
“당했군.”
전날에 피로가 쌓인 터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올해로 다섯 살인 딸아이는 한창 기운이 넘칠 시기였다.
심호흡으로 평정을 되찾은 슐리펜이 딸의 자리에 손을 올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침대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이릴에게 베개를 넘겨준 뒤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선선한 새벽 공기가 확 몰려왔다.
하인들도 일과를 시작하지 않은 시간인지라 저택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감기라도 걸렸다가는 큰일인데.’
슐리펜이 침음을 흘렸다.
지금은 여름.
농담으로라도 감기에 걸릴 날씨가 아니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딸을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마법이 개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저택 중앙으로 걸어간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 더 잘 시간이니까 돌아와라.”
당연히 딸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옅게 한숨을 내쉰 슐리펜이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 아니면 접객실이겠군.’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런 보건대 이벤트가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2층으로 올라간 슐리펜이 서재의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여기에는 없나.”
슐리펜은 국어책을 읽듯이 중얼거렸다.
바로 잡으면 조금 미안하니 일종의 접대를 해 주는 것이었다.
어설픈 연기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커튼 아래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나왔다.
“이히히.”
아리아가 있는 게 확실했다.
슐리펜의 발이 지면에서 미세하게 떠올랐다.
바람 마법을 정밀하게 운용하여 발소리를 감추는 고급 기술이었다.
더 어울려 주고 싶었지만 아이의 수면 시간은 제대로 지켜져야 했다.
미끄러지듯 서재를 가로지른 슐리펜이 커튼을 들추는 순간이었다.
“잡았······음?”
슐리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리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앙증맞은 신발 한 켤레만이 남아 있었다.
커튼을 부풀게 한 것은 신발 안쪽에서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이었다.
‘마법진?’
바람은 깔창에 새겨진 두 개의 마법진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아주 작고 정교한 것이 그리는데 제법 애를 먹었을 것 같았다.
이런 사소한 장난을 치는데 재능을 낭비하다니.
슐리펜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라벨 가의 장녀가 가르쳐 줬나. 신기한 걸 배웠구나.”
“받아랏!!”
그때, 바로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슐리펜은 가볍게 어깨를 비틀었다.
딱!
책장 위에서 뛰어내린 소녀가 그가 있던 자리에 목검을 내리꽂았다.
“기척을 제법 잘 숨기게 됐군.”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이 악당!”
목검을 거둔 소녀가 혀를 찼다.
암청색 머리카락이 불처럼 너울거렸다.
다섯 살배기 답지 않게 또랑또랑한 이목구비는 놀라울 정도로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이릴과 슐리펜의 외동딸이자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 그랑시아의 후계자, 아리아 시니반 데 그랑시아.
곧바로 자세를 다잡은 그녀가 다시금 목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건 무리일 거다! 뽁풍검!”
“폭풍검이겠지. 내 옷은 또 언제 꺼내온 거냐.”
슐리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놀이 종목이 숨바꼭질에서 칼싸움으로 변한 듯했다.
아리아는 자신의 제복 코트를 망토처럼 목에 두르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제국에서 제일가는 명장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물은 움직이는 빗자루가 되어 바닥을 쓸고 있었다.
사실 그건 별 상관없었다.
혹시라도 밟고 넘어질까 걱정될 뿐.
톡.
슐리펜은 검지와 중지만으로 목검을 멈춰세웠다.
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이익! 놔요!”
“아이는 잘 시간이다. 또 꾸벅꾸벅 졸아서 어머니를 걱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라.”
“으으으으···!”
온 힘을 다해 목검을 빼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가락이 아닌 무슨 거대한 바위 틈새에 끼인 것 같았다.
슐리펜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 반대쪽 손을 뻗는 찰나였다.
“흥! 내가 이대로 잡힐 줄 알고!”
결국 목검을 놓은 아리아가 서재 밖으로 달아났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몸놀림이 재빨랐다.
당연히 노력이 가상해서 일부러 놓아 준 것이었지만, 슐리펜은 이내 자비를 베푼 것을 후회했다.
주인 잃은 신발이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가시라도 찔리면 어쩌려고.’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중무휴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되는 그랑시아 저택이었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복도 쪽에서는 하인들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 아리아 아가씨?!”
“교양 없게 맨발로 다니시다니···! 꺄악! 치마 들추시면 안 돼요!”
“이런 새벽에 돌아다니시면 마님이랑 주인님이 걱정합니다! 어서 이리···끄아악!”
그 외에도 우당탕거리는 발소리와 비명, 아리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결과였다.
아리아는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별의 딸과 검성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였으니까.
기사라도 나선다면 모를까, 일개 하인들이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슐리펜이 밖으로 나왔다.
“다들 볼 일 보시오. 내가 잡을 테니.”
“주, 주인님!”
하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진작에 놓쳐 버린 아리아는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난 뒤였다.
슐리펜은 다시금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을 전한 뒤 눈을 부릅떴다.
슬슬 이릴이 일어날 시간이라 서둘러야 했다.
저택을 찬찬히 훑어보던 슐리펜의 시선이 천장 쪽에서 정지했다.
“재빠르기도 하군.
거기는 또 언제 간 건지.”
****
“이히히, 여기는 못 찾겠지?”
아리아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그랑시아 저택의 지붕에 걸터앉아 다리를 파닥거리는 중이었다.
황금빛으로 아른거리는 해가 동녘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까와는 다른 목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예비용으로 챙겨 둔 것이었다.
짜릿한 승리의 감각이 전류처럼 체내를 흐르고 있었다.
“내가 악당을 따돌렸따!”
아리아는 목검을 쳐들며 승리를 선언했다.
지붕에 올라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시도는 했지만 매번 하인이나 기사,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도달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바로 그때 해가 숲 위로 떠올랐다.
짤막하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일출을 마주 본 그녀가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예쁘다아···.”
지금까지는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고작 눈높이가 달라진 것뿐인데 완전히 새로운 장소처럼 보였다.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는 청량한 바람, 정원 곳곳에 울창한 수목과 가지런히 피어난 여름꽃의 군무.
자신을 애타게 찾는 하인들의 목소리까지.
“완벽해.”
기분이 한껏 고조된 아리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여기 숨어 있다가 배가 고파질 즈음에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나중에는 꼭 엄마랑 세치카 언니도 데려와야지.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던 와중이었다.
“동감한다. 확실히 여기는 나쁘지 않지.”
“흐에에에에엑!!!”
아리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지옥의 솥단지를 긁어내는 것처럼 무겁고 중후했다.
고개를 돌린 아리아가 펄쩍 뛰어올랐다.
웬 크고 시커먼 호랑이.
정확히는 호랑이 머리에 사람 몸통을 한 생물체가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호랑이는 고개만 슬쩍 든 채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 색을 보아하니 네가 검성의 딸이군. 반갑다.”
“너, 너, 너, 너는 누구십니까?!”
아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목검을 집어들었다.
위기를 감지한 몸뚱이가 잠재력을 일깨웠다.
스아아아아···!
푸르스름한 기류가 나무로 된 검신을 타고 차올랐다.
그 광경을 본 자이파가 눈썹을 으쓱였다.
“호오. 벌써?”
“누구냐고 물었습니닷!”
“자이파 터르겅. 한낱 늙은 칼잡이다. 네 이름은 뭐지?”
“자, 자이파? 자이파 터르겅이라면···힉!”
분명히 전대 검성의 이름이었다.
당황한 아리아가 뒷걸음질쳤다.
동시에 왼발이 지붕 바깥으로 나가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본 그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 안돼!”
저택이 원체 거대한지라 지상은 까마득했다.
불행한 미래의 단편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빠 말을 듣는 건데!’
팔을 아무리 휘적여 봐도 무너진 균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아의 양쪽 발이 모두 지붕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저 아래에서 불어온 돌개바람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아으악!”
바람에 밀려난 아리아가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동시에 자이파의 꼬리가 그녀를 휘감았다.
“꼬, 꼬리?”
“바닥을 살피는 것은 검사의 기본이다. 네 아버지가 아직 안 가르쳐준 모양이군.”
자이파가 큭큭거렸다.
푹신하고 두툼한 꼬리 덕분에 아리아의 코가 깨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아이는 아직 검을 배울 나이가 아니니까요.”
어느새 올라온 슐리펜이 자이파의 옆에 서 있었다.
꼬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아리아가 경악했다.
“아, 아빠?!”
“아리아. 내가 여기는 위험하니까 올라오지 말라 했을 텐데.”
성큼성큼 다가온 슐리펜이 아리아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눈높이를 맞춘 뒤 딸을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에 비친 본인의 얼굴에서 잘못을 찾아 보라는 것처럼.
뭐라고 우물거리던 아리아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잘못했어요.”
“엄마가 걱정하실 거다. 더 늦어지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놀이는 끝났다.
슐리펜이 아리아를 안아 들었다.
시무룩해진 그녀를 바라보던 슐리펜이 툭 내뱉었다.
“다음에는 같이 오자꾸나. 엄마도 같이.”
“응. 미안해요.”
아리아가 끄덕였다.
갑자기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코를 훌쩍이던 그녀가 슐리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슐리펜이 자이파를 돌아보았다.
“결혼식 이후 처음이군요. 새벽부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바람이나 좀 쐬러 왔지. 겸사겸사 제자 얼굴도 보고.”
“북부의 일은 다 끝난 겁니까?”
“그럭저럭. 바르카 놈이 싸 놓은 똥이 어지간히 커야 말이지.”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을 간단하게 공유했다.
가족, 친구, 신변과 정세의 변화 같은 거.
자이파는 혼란에 빠진 북부를 평정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했다.
하도 일이 많아서 제국에는 도통 들르지 못했는데, 슐리펜도 거진 십 년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아침해가 완전히 떠오를 즈음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들어오시죠.”
“됐다.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 나중에 날을 잡아서 다시 오마.”
자이파가 몸을 일으켰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털이 예전보다 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렇다면야.”
“크크, 두 번 물어보지 않는 건 여전하군. 네 딸이 오러를 개화한 건 알고 있나?”
“드디어 성공했나 보군요. 어렴풋이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딸의 등을 토닥였다.
그는 아리아의 재능이 자신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갑자기 억울함이 치밀었다.
아버지로서 그 극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담지 못하다니.
입술을 질겅이던 그가 자이파에게 물었다.
“···혹시 사진 같은 건 안 남기셨겠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아쉽군요···. 혹시 무슨 계열이었습니까?”
“얼핏 보기에는 네놈과 비슷한 거 같더군. 각성을 시켜 봐야 알겠지만.”
슐리펜의 눈썹이 올라갔다.
자신과 오러의 형상이 비슷하다는 것은 곧 폭풍검을 계승받았음을 의미했다.
나비로제의 만사와 더불어 가장 압도적이라 불리우는 능력을.
아리아는 어느새 슐리펜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자이파가 흥미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나한테 맡길 생각은 없나? 지금부터 교육한다면 너를···어쩌면 로난 그 녀석도 뛰어넘는 검사가 될 수도 있는데.”
“나중에 이 아이가 원한다면 보내드리죠. 지금은 거절하겠습니다.”
“예상대로군. 듣자하니 로난도 자식을 낳았다는데 그쪽이나 한번 꼬드겨 봐야겠어.”
하여튼 귀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제자였다.
충분히 놀았으니 이제 떠나야 했다.
다음 목적지를 정한 자이파가 몸을 웅크렸다.
4m에 달하는 거구가 하늘로 쏘아지려던 찰나.
“이봐, 검성.”
“네?”
“행복해 보이는군.”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예전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웨어타이거의 붉은 눈동자는 검성 슐리펜과 그 후계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와 딸을 담고 있었다.
그래.
과거의 자신과 꼭 닮은.
“앞으로도 가족을 소중히 여겨라. 제국이나 가문, 폭풍을 부르는 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보물이니까.”
“그건···.”
슐리펜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앙-!
자이파의 몸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대 검성이자 검의 극의를 가르쳐준 스승.
그의 궤적을 바라보던 슐리펜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
“하아아암···좋은 아침.”
잠에서 깬 이릴이 기지개를 켰다.
시계는 언제나처럼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막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슐리펜과 아리아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둘 다 일어났을 시간인데 특이한 일이었다.
모자도 안 쓰고 잠든 남편도, 그 품에 완전히 파묻혀 있는 아리아의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후후, 많이 피곤했나 보네.”
이릴이 웃었다.
슐리펜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 전날에 딸과 격하게 놀아주던 것 같더니 상당히 무리를 한 듯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침대를 벗어났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겠지.
잠옷 위에 숄을 걸친 이릴이 작게 속삭였다.
“좋은 꿈 꿔요. 두 사람.”
이릴은 남편과 딸에게 키스한 뒤 방을 나섰다.
저택 로비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이 유난히 포근했다.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