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5)
외전19. 푸른 봄을 그대에게(1)
#A19
“아.”
나비로제가 눈을 떴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혼자 사는 집답지 않게 높은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따라 몸이 가볍군.’
가끔 이렇게 개운한 날이 있다.
어제 밤늦게까지 격한 훈련을 했음에도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았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녀가 방을 나섰다.
바닥에 이불만 깔고 자는지라 침대는 없었다.
이불을 개고 문을 나서자,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들도 한번 날을 잡아서 치우기는 해야 할 텐데.’
나비로제가 입술을 질겅였다.
깔끔한 침실과는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졸업앨범, 시들지 않는 마법이 걸린 꽃다발, 받는 사람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프릴이 달린 원피스나 반짝거리는 장신구 등.
싹 버리면 일이 쉽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증식하는 잡동사니들은 모조리 학생들이 선물해준 것이었으니.
배를 긁으며 그 참상을 바라보던 나비로제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열대 과일처럼 큼직하고 화려한 속옷 하나가 의자 위에 걸려 있었다.
‘역시 그때 한방 쥐어박을 걸 그랬나.’
나비로제가 실소했다.
저건 무려 아데샨이 졸업할 때 준 선물이었다.
더 늦기 전에 교관님도 짝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내민 상자에는 바로 저 요사스러운 물건이 위아래 세트로 들어 있었다.
화려하다 못해 도발적인 디자인으로 보아 소위 말하는 ‘결전용’ 인 듯했다.
아직도 당시의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 제정신이 아니군. 나보고 이런 걸 입으란 말이냐?
– 아이 참, 요즘은 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효?과도 좋아요. 당장 어젯밤에 로난이···.
– 그만. 더는 알고 싶지 않다.
당연히 입은 적은 없었다.
짝을 찾을 생각이 전무하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치수가 틀렸던 탓이었다.
심지어는 작은 게 아니라 큰 쪽으로.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전이라니.
나비로제의 시선이 다시 옮겨졌다.
‘이제 보니 별걸 다 받았어.’
기존에 있던 소파나 테이블 따위의 가구는 파묻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전시해둔 것은 벽에 걸린 로난 패거리의 사진뿐이었다.
아직 검의 제전에 가기도 전에 찍은, 인생에서 가장 즐겁던 시절의 박제.
‘도대체 이게 언제적 일인가.’
나비로제가 미소 지었다.
청춘을 덩어리째 썰어온 것 같은 사진이었다.
장소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갈레리온 관.
정확히는 거기에 위치한 제1연무장.
사진 속에서는 아직 앳된 티가 나는 로난과 슐리펜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막 대련을 마친 뒤라 온몸은 흙먼지로 더러워진 채였다.
그 뒤에서는 조교로 일하던 아데샨과 자신이 서 있었다.
아데샨은 양손 가득 수통을 들고 있었고, 자신은 팔짱을 낀 채 두 제자를 내려보는 중이었다.
찬란한 보물을 바라보듯 흐뭇한 눈빛으로.
‘참 부러웠지.’
그럴 만했다.
단지 두 사람이 제국 역사에 전례가 없는 천재라서만은 아니었다.
나비로제는 청춘을 알차게 보내는 학생들을 좋아했다.
공부든, 사랑이든, 쌈박질이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바에 투자하며 살아가는 학생들을 좋아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난과 슐리펜은 최고로 멋진 청춘을 보낸 부류였다.
어쩌면 대리만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비로제는 청춘 전부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불사른사람이었으니.
피와 죽음, 약육강식의 논리와 목숨은 돈이 된다는 가혹한 철학이 상식이던 삶.
그녀에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다함께 공부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등의 추억은 없었다.
교육자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청춘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러지 못하는 제자들을 이끌어주고 싶어서.
실제로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누구보다 만족하는 중이었다.
문득, 사진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나비로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젊군.’
나비로제는 새삼 본인이 늙었다는 걸 실감했다.
실력과는 별개인 외모 측면에서의 이야기였다.
여름 과실 같은 피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현재와는 달리 생기가 넘치는 삼십대의 자신.
물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고 있었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바는 또 다른 것이었다.
“흥.”
아마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야속한 세월 속에서 꾸준히 늙어가겠지.
언젠가는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팔다리나 다름없는 검을 들어 올리지 못하게 되는 날이 기어코 찾아올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삶이란 앞을 향해서 나아갈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으니까.
오늘따라 길었던 잡념을 떨쳐낸 나비로제가 발걸음을 옮겼다.
‘가볼까.’
슬슬 씻지 않으면 지각할 수도 있었다.
교감씩이나 돼서 그런 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
그녀가 욕실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응?”
괴리감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세면대가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원래는 허리 높이까지 와야 하는데 지금은 가슴께까지 와 있었다.
욕실용 슬리퍼도 평소보다 헐렁거리는 것이 뭔가 낯설었다.
‘기분 탓인가?’
그래도 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평소 세면대나 슬리퍼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원래 이 크기였거니 생각한 나비로제가 세면대 앞에 멈춰 섰다.
껍질이나 다름없는 뱀 무늬 잠옷을 벗고 막 얼굴을 씻으려던 찰나.
“뭣.”
나비로제가 얼어붙었다.
거울 속에는 웬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그것도 십대 초중반의, 당장에라도 오늘 급식 뭐냐고 물어볼 것 같은 애송이가.
매끈하다 못해 젖살이 남아 있는 얼굴.
머리가 작아지면서 더 커진 눈.
지금에서야 발견했는데, 잠옷은 아예 쇄골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어깨가 유달리 가벼웠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뒤.
반 정도로 줄어든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이건···너무 청춘인데.”
****
만월 마탑의 탑 메이지.
대지 마법의 일인자.
웨어 자벌레 등.
자로딘이라는 남자를 요약하는 말은 그 외에도 많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아내를 되살린 마법사’였다.
로난의 도움을 받아 인생의 전부였던 아내 수냐를 소생시킨 자로딘은 여전히 필레온 아카데미의 마법과 교수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돌아온 수냐는 자로딘의 참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정상인으로 보일 만큼 살을 찌웠고, 당장에라도 자살해 버릴 듯한 표정이 기본값이던 얼굴을 웃는 상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
집무실의 인테리어 변화도 그 중 하나였다.
원래는 버림받은 황무지를 연상케 하던 자로딘의 집무실은 이제 관엽식물과 수냐가 직접 만든 인형, 다채로운 색의 가구로 가득 차있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흥겨운 음악을 듣고 있자면 여기가 집무실인지 남부 원주민 문화 체험 클럽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런 곳에서 지내게 된 자로딘은 자연스레 성격도 유들유들하게 변했다.특유의 냉소적인 면모도 많이 사라지고, 더는 학생들에게 짓궂은 농담도 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다사다난한 자신의 과거에서 기반한 해답을 제시해 줌으로써, 현재는 필레온에서 가장 상담을 잘 하기로 소문난 인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인 법.
가끔씩은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자로딘조차도 참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고는 했다.
자로딘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푸···크흐흡···크흑.”
“웃지 마라.”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꼴을 보고 어떻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새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갑자기 집무실에 들이닥친 꼬마 손님을 최선을 다해 응대하는 중이었다.
아이가 된 나비로제는 맞은편의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턱을 치켜든 채 자로딘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존의 관능미나 위압감은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몸에 걸쳐져 있는 잠옷, 바닥에 닿지 못한 채 흔들거리는 발이 우스꽝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쓰읍-하-
심호흡한 자로딘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선 이것부터 받아라.”
“그 구슬은 뭐지?”
“뭐긴 뭐냐. 요즘 아이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바렌표 캔디···크학!!”
쾅!
사탕을 꺼내 들던 자로딘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정권 세 방이 명치에 직격한 탓이었다.
똥을 지릴 만큼 아픈 걸로 봐서 나비로제의 사칭범은 아닌 듯했다.
“더 맞고 싶다면 계속 떠들어 보시지. 헛소리를 한 번 할 때마다 뼈의 개수를 늘려줄 테니까.”
“흐억, 헤으악···이 무식한 계집애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아이가 되어 버리다니.”
나비로제가 침음을 흘렸다.
그녀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곧장 자로딘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학생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니 두꺼운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쓴 채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자로딘이 입을 열었다.
“젠장, 내장이 망가진 건 아니겠지······우선 축하한다. 너는 이제 늙어 죽지 않는 몸이 됐어.”
“그게 무슨 소리냐. 저주에 걸린 건가?”
“저주보다는 축복에 가깝지. 대마법사 로르혼 님의 경우와 비슷하다. 왜, 마법사는 일정 경지에 도달하면 자신의 몸에 흐르는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봤겠지? 실제로 그분은 필요에 따라서 아이와 어른의 모습을 오가시잖아.”
나비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로르혼이 자유자재로 나이를 바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연사할 나이를 맞이한 크라티르가 해당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너도 같은 원리다. 체내에 응축된 마나의 질이 육체라는 그릇보다 탁월하게 우월해지면서 몸을 전성기 시절로 돌려 놓은 거야. 신대륙에서는 환골탈태(換骨奪胎)라 부르는 현상이지.”
“이 꼴이 내 전성기는 아닌 것 같은데.”
소매를 파닥거리던 나비로제가 옆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영혼과도 같은 애검, 대태도 우루사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사실 옷은 둘째치고 이게 더 문제였다.
원래도 그녀의 신장보다 길었던 검이었는데, 몸이 작아진 지금은 무슨 기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자로딘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나도 뭐라 설명할 길이 없군. 개인차가 아닐까.”
자신감이 영 없는 목소리였다.
사례가 없다시피 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그 자이파도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해버린 것이었으니.
역사책을 뒤져 보면 한두 명쯤 나올까 의문이었다.
까득!
나비로제가 사탕을 씹어 삼켰다.
“그럼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건가? 로르혼 님처럼 시간을 조절한다든가.”
“유감스럽지만 그건 불가능해. 너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래도 몇 년만 지나면 정말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어? 밀림에서 나를 두들겨 팼을 때 네가 몇 살이었더라.”
“스무 살 정도였지···그렇게 된다 해도 너무 늦는군.”
나비로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로서는 시간이 지나면 성장한다는 확신도 치수가, 수 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당장 교감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꼴이라면 비웃음이나 안 당하는 게 용할 터였다.
자로딘이 말했다.
“확실히 당혹스러운 상황이군.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로르혼 님도 타인의 시간을 조종할 수는 없을 텐데.”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은 아예 없는 건가.”
“있기는 해. 사람은 아니지만.”
“뭐?”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녀가 자로딘을 쏘아보았다.
“그게 누구지?”
“말해줄 수는 있는데 괜찮겠어? 제법 껄끄러운 인물일 텐데.”
“상관없다. 말하기나 해.”
“나바르도제.”
나비로제의 얼굴이 굳었다.
자로딘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르혼 님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그 분 뿐이지. 불의 어머니라면 네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다.”
“······진심이냐.”
“내가 이런 상황에서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래도 만나뵈러 가는 수고는 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지?”
“왜, 이번 2학년 수학여행을 아드렌으로 가잖아. 겸사겸사 같이 가면 될 것 같은데.”
아드렌.
드래곤과 그 권속들만 살아가는 도시는 여전히 아득한 천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원래는 각국의 수장이나 특사도 허가를 받은 뒤에야 겨우겨우 출입이 가능한 장소였지만,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이 끝난 뒤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자로딘이 중얼거렸다.
“어디보자···마침 사흘 뒤에 출발하는군. 딱 좋아.”
현재 필레온 아카데미는 얼떨결에 가장 아드렌과 교류가 활발한 필멸자의 집단이었다.
도시의 멸망을 막은 로난과 아셀, 필레온에서 재학했던 나바르도제의 아들인 이타르간드 덕이었다.
수학여행 장소로 허락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학여행에 따라가는 것은 확실히 나바르도제를 알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성간요새 드리무어가 붕괴된 이후 그녀는 혈족과 함께 아드렌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나더러 이 꼴로 학생들을 인솔하라고? 차라리 따로 가고 말지.”
“그건 힘들걸. 아드렌을 오가는 배편은 철저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아무리 네가 필레온의 교감이라 해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어.”
“크윽···.”
나비로제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드렌이 필레온에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몰래 들어갔다가 걸리는 날에는 국가간의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 보겠나?”
“좋은 생각?”
“그래. 이건 수냐가 입어보고 싶다고 해서 마련한 건데···.”
자로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벽장으로 걸어간 그가 웬 옷가지를 꺼내들었다.
셔츠와 블레이저, 무늬가 들어가 있지 않은 세련된 치마.
나비로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네놈, 설마···.”
“그래. 그 설마다. 너는 언제나 내심 학생들을 부러워했지.”
본심을 간파당했지만 지금의 나비로제에게 그런 건 들리지 않았다.
자로딘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필레온 아카데미의 여자 하복 차림이었으니까.
그가 곱게 개어진 교복을 나비로제에게 내밀었다.
“교관이 부끄럽다면, 학생 신분으로 가 보는 건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