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6)
외전20. 푸른 봄을 그대에게(2)
#07
사흘은 금방 지나갔다.
아드렌으로 향하는 비공정들은 필레온 아카데미의 대광장에 정박한 채 학생들이 탑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에 바글거리는 2학년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에 들뜬 채였다.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가보지 못할 용의 도시를, 필레온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게 된 것이었으니.
짝!
수학여행의 인솔을 맡은 바렌 파나시르 교수가 손뼉을 쳤다.
“자, 자. 모두 너무 흥분하지는 말아 주세요. 반 순서대로 비공정에 탑승하겠습니다!”
“교수님! 가는데는 얼마나 걸리나요?”
“쾌속 비공정이라 열두시간 정도면 도착합니다. 아드렌의 권역에 들어가면 경계용 소환수나 헤츨링을 마주칠 수도 있는데,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도록 해주세요.”
바렌이 말을 할 때마다 갈기와 뱃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여전히 전사로 살아가는 자이파와는 정반대의 체형이었다.
일흔다섯번째 다이어트에 실패한 이 웨어라이온은 현재 필레온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다.
이미 가문 전체가 놀고 먹을 수 있는 부를 축적했음에도 교단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순수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참 보람찬 일이라니까.
흐뭇한 얼굴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바렌의 시선이 일순 정지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별 문제 없으련지···.’
그의 시선은 군중 한복판에 있는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소녀는 당장에라도 주변 사람을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회춘을 맞이한 나비로제였다.
‘환골탈태라니. 지금이라면 정말 자이파 님보다 강할지도.’
어려진 나비로제는 누가 봐도 십대 소녀였다.
물론 뇌까지 어려진 것은 아니었기에 실시간으로 파릇파릇한 학생들에게 기를 빨리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뭔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티를 내서 학생들에게 들키는 날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말했으니까.
흔해빠진 협박이었지만,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검호가 한 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미쳤다. 내가 미쳤던 거지. 왜 그런 말에 혹해서는.”
나비로제가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로딘을 오 분 정도 두들겨 팬 뒤에야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십대 소녀로 회춘한 몸에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무예과 하복이 입혀져 있었다.
‘빌어먹을. 아래가 허전해.’
나비로제는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셔츠와 블레이저까지는 어찌어찌 견딜 수 있었지만 문제는 하의였다.
치마라는 게 이렇게 바람이 잘 통하는 의복인 줄 처음 알았다.
한여름에도 긴 바지만 입는 그녀에게 맨 다리를 드러내는 것은 굉장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수냐 이 계집은 도대체 이런 옷을 왜 입고 싶어하는 거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냐의 옷은 나비로제에게 조금 작았다.
필연적으로 몸의 윤곽이 드러났고, 특유의 묵직한 양감은 어른일 때보다 절반 넘게 줄어들었음에도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를 힐긋거리는 학생들이 해당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쟤는 누구야? 처음 보는데.”
“나비로제 교관님의 먼 사촌이래. 너무 닮아서 나는 처음에 따님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굉장하다.”
“역시 정열의 남부 출신···얼굴도 은근히 예쁜데 가서 말 걸어볼까? 저렇게 촌구석에서 온 애들이 은근히 꼬시기 쉽다고 형이 그러더라.”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명문 아카데미에 다녀도 수컷은 수컷이었다.
자기네들 딴에는 안 들리게 속닥거리는 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야생 토끼보다 뛰어난 청각의 소유자였다.
‘운이 좋은 놈들이군. 원래대로라면 교사 희롱죄로 즉시 정학을 먹였을 텐데.’
그들이 누가 말을 걸 것인지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던 와중이었다.
슬쩍 돌아본 나비로제가 극미량의 살기를 방출했다.
“히이이익! 뭐, 뭐야?!”
“몸이 안 움직여···자, 잠깐! 너 오줌 쌌어!”
“이게 도대체 무슨···!”
지극히 약한 살기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당한 소년들이 그대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동시에 세 명의 바지 위로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살기를 이겨내지 못한 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이완된 것이었다.
“끼아아아아악!! 저리 가! 이 오줌싸개들아!”
“자, 잠깐만 페니! 내가 싼 게 아니야!”
“지금도 싸고 있는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꺼져!”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세 오줌싸개는 뭐라도 변명하려 했지만,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물줄기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문득 시선을 느낀 나비로제가 정면을 돌아보았다.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바렌이 당혹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 교관님···?”
“쉿.”
나비로제는 말없이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댔다.
적당히 넘겨 달라는 뜻이었다.
이윽고 끄덕거린 바렌이 학생들에게 갈아입을 바지를 가져다 주자, 그들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비로제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내가 지금 애들하고 뭘 하는 건지.”
몸이 어려지니 마음까지 어려져 버린 걸까.
평소의 자신은 하지 않았을 유치한 행동이었다.
머지않아 모든 학생들을 태운 비공정이 날개돛을 펼치고 이륙했다.
그녀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
“정말로 오랜만이군. 용의 도시라.”
나비로제가 혼잣말했다.
용의 도시에 방문하는 것은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그녀는 비공정의 갑판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아드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바다처럼 너울거리는 구름층 저 높이 거대한 부유섬이 떠올라 있었다.
‘나름 운치가 있어.’
온 세상을 떠돌았던 나비로제에게도 절경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풍경이었다.
휘영청한 보름달에서 스며나오는 월광이 비공정과 구름 바다를 감싸고 있었다.
바람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거칠었고, 은은하게 묻어나는 바다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배의 가장자리로 걸어간 그녀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혼자였으면 웃통을 까고 담배라도 폈을 텐데.
나비로제가 아쉬운 마음에 품 속의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던 와중이었다.
“저기, 너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어?”
“음?”
고개를 돌린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얼굴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은 머리카락과 노을색 눈동자.
어머니를 닮아 차분한 목소리.
작지만 단단해 뵈는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벙쪄 있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란세.”
“뭐야, 나를 알아?”
란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학생이라 들었는데 얘가 날 어떻게 아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나비로제의 입장에서는 모를 리가 없었다.
로난의 자식인데다, 지금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제자였으니까.
그래도 지금 티를 내서는 안 되기 떄문에, 나비로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충은. 이모···에게 들었다.”
“아하. 나비로제 교관님의 조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진짜 닮기는 했네.”
“무슨 용건이지?”
“세상에, 말투도 비슷하네···다른 건 아니고 그냥 밥 같이 먹자고.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계속 혼자 있길래.”
그러고 보니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란세가 엄지로 뒤편을 가리켰다.
메인 마스트 바로 아래, 웬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교복이 다른 걸 보니 마법과인 것 같았는데, 그녀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아셀과 마르야의 장녀.
나비로제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세치카가 도끼눈을 뜬 채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또 누구야?”
얼굴도 몸매도 그렇고 피지컬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란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세치카. 어디 아파? 아까 화장실에서 다 못 내보냈어?”
“시끄러워 멍청아! 남들 앞에서 그런 얘기하지 마!”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배 아프면 약 줄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캬아아악!”
결국 폭발한 세치카가 염력을 사용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숟가락이 란세의 귀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나비로제가 작게 실소했다.
무슨 관계인지 너무나도 잘 보였기 때문에.
란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원래는 저런 애가 아닌데.”
“상관없다. 귀여운데 뭘.”
“그렇게 봐 주니 고맙네. 마법과의 세치카는 안 들어봤지? 내가 바로 소개해 줄···”
“야! 란세!”
란세가 말을 잇던 차였다.
갑자기 배의 후미 쪽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소년이 란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이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란세가 당혹성을 흘렸다.
소년들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걸로 봐서 뭔가 일이 생긴 듯했다.
소년들과 나비로제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란세가 면목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미안해. 잠깐만 들렀다 올 테니까 둘이 먹고 있을래? 금방 올게.”
“상관없다.”
“고마워.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는데.”
“나로라고 불러라.”
“그래. 금방 보자 나로. 다녀올게!”
그 말과 함께 란세는 사라졌다.
나로라는 이름을 되뇌이던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생각 나는 대로 지껄인 이름 치고는 괜찮은 것 같았다.
“뭐, 뭐야? 갑자기···.”
그리고 분위기는 지옥처럼 어색해졌다.
얼떨결에 혼자 남게 된 세치카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상황을 받아들인 그녀가 나비로제에게 말했다.
“하아, 정말로······얘, 거기 서있지만 말고 이리 와.”
나비로제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빈 손인 것을 본 세치카가 자신의 도시락을 풀어서 내밀었다.
안에는 두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의 식사가 들어 있었다.
“안 가져왔으면 같이 먹자. 내 이름은 세치카야. 세치카 카라벨.”
대부분이 고기인 걸로 봐서 마르야가 직접 만든 듯했다.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비로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경계심과 별개로 굉장히 착한 아이였다.
조금 도와줘 볼까.
고기 튀김 하나를 집어먹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심해라. 네 남자친구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뭐, 뭐라고?”
세치카가 먹던 보리차를 뱉었다.
그녀는 가슴을 수 차례 두들기고 나서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입가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가 격정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쟤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나는 조금 더 말 안 듣게 생긴 남자가 취향이다. 그나저나 란세 녀석, 아버지를 닮은 것도 정도가 있지. 안구가 궁둥짝에 붙어 있어도 저것보다는 눈치가 빠르겠군.”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좋아하는데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인 로난과 똑 닮아 있었다.
갑자기 검지를 뻗은 그녀가 세치카의 옆구리를 찔렀다.
“좋은 걸 알려주지. 이리 와라.”
“아앙!”
그 순간 세치카가 몸을 뒤틀었다.
감전당한 듯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요상망측한 소리가 입으로 새나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세치카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지, 지금 뭐 한 거야? 다들 쳐다보잖아···!”
“마나혈이라는 거다. 몸이 좀 편해졌을 텐데.”
“뭐라고? 어···그러고 보니···.”
세치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확실히 굳어 있던 몸이 풀린 것 같았다.
나비로제가 큭큭거렸다.
“내가 정확한 자리를 알려줄 테니 가끔씩 놈의 마나혈을 짚어줘라. 도움도 되고, 은근슬쩍 몸도 만질 수 있으니 좋은 기회 아니냐.”
“너, 너 정말···!”
세치카가 경악했다.
이런 계집애는 생전 처음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연애사에 훈수를 두고, 스킨십의 기술을 알려주다니.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나비로제의 양 손을 움켜쥐었다.
“좋은 애구나! 우리 친구하지 않을래?”
“친구?”
“그래. 나한테는 너 같은 친구가 필요했어. 이렇게 직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야!”
세치카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감격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비로제는 다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친구를 하자니.
내가 누군지 알면 까무러치겠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세치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싫어?”
“······아니다. 하자, 친구.”
“야호! 혹시 마법과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말해줘. 거의 다 비실이긴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귀엽게 생긴 애도 있으니까.”
“참고하지.”
나비로제가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특유의 예리한 청각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엿들었다.
– 그러니까···나바르도제···을 못 뵌다고?
– 끔찍하···그래도 우리는 물러설 수···
다른 게 아닌 나바르도제가 언급되는 것이 문제였다.
이야기는 배의 후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세 명의 대화 속에는 란세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도대체 이 수컷들은 무슨 작당모의를 하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