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37)
외전21. 푸른 봄을 그대에게(3)
#08
란세가 비공정의 후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멤버가 모여 있었다.
난간 저 아래 구름으로 이루어진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객실의 쪽문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이 협소한 발코니는 작당모의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두리번거리던 란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서, 정말로 나바르도제 님은 못 뵈게 된 거야?”
“응. 확실해.”
란세의 질문을 들은 소년들이 주억거렸다.
안경잡이 윌럼프와 창잡이 센센.
그와 뜻을 함께하는 무예과의 친구들이었다.
하나같이 면면에 비장함이 감도는 것이 어디 전쟁에라도 나가는 사람들 같았다.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피던 윌럼프가 말을 이었다.
“복도에서 교수님들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어. 모종의 사정으로 알현은 취소될 거래. 빌어먹을!”
“하아···잘못된 정보기를 바랬는데.”
란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작전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것도 몹시 위험천만한 작전을.
고민하는 얼굴을 본 센센이 그를 재촉했다.
“란세. 뭘 그렇게 고민하냐?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그래! 앞으로 아드렌에 올 날이 있을 것 같아? 너는 몰라도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사실 재촉이라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웠다.
아무리 필레온 아카데미의 재학생이라 해도 아드렌에 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남들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을 기회가 수학여행이라는 형태로 제공될 뿐.
오직 로난의 핏줄인 란세만이 자유롭게 아드렌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했다.
“란세. 아니, 란세 형. 제발!”
기어코 윌럼프가 란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뒤따라 무릎을 꿇은 센센이 머리를 연신 조아리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헤매다가 구조된 사람들도 이것보다는 덜 절박할 것 같았다.
절망에 빠진 친구들을 바라보던 란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으니까 일단 이것 좀 놔.”
“여, 역시! 역시 란세야!”
“영웅의 아들이여!”
소년들의 얼굴에 여명이 드리웠다.
너무 격하게 감격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었지만.
“그럼 준비물은 제대로 가져왔겠지?”
“물론이지. 이걸 보라고.”
윌럼프가 히죽 웃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기계장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육면체에는 둥근 렌즈가 붙어 있었다.
“디디칸 공방에 직접 의뢰한 초경량 사진기야. 깃털처럼 가벼울뿐더러 소리도 안 나서 들킬 염려가 없지. 죽여주지 않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평소에도 도촬 따위를 하는 건 아니겠지?”
“씨발,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건 오직 오늘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여기에 담길 수 있는 피사체는 불의 어머니 한 분 뿐이야.”
윌럼프가 으르렁거렸다.
안경을 내리며 인상을 쓰는 행동은 그가 극도로 진지해졌다는 증거였다.란세가 손사래쳤다.
“미안. 내가 잘못했으니까 진정해.”
“그래. 진심을 의심하면 못써 란세. 나도 너희 집에 놀러 갔을 때 본 사진을 아직도 잊지 못했거든. 로난 님과 함께 서있던 불의 어머니는 정말로···굉장했지.”
옆에 있던 센센이 주억거렸다.
로난의 졸업사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바르도제의 자태를 반추하는 그의 눈빛은 하늘이나 바다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삼자가 본다면 자살을 권유하고 싶어지는 한심한 모습이었지만, 란세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 또한 두 사람과 같은 꿈을 꾸고 있었기에.
란세가 말했다.
“좋아. 그럼 계획을 정리할게. 첫 번째는 도시 중앙의 화염궁으로 몰래 들어가는 거야. 비밀 통로를 타고 들어갈 거니까 별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교수님이나 친구들의 눈을 잘 속여야 해.”
“정확한 정보겠지? 로난 님이 한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술에 취해서 한 소리니까 무조건 확실해. 궁전에 들어간 뒤에는 곧바로 투명화 포션을 삼킬 거야. 센센, 인식저해 스크롤은 챙겼어?”
“당연.”
센센이 주머니에서 스크롤 세 장을 꺼내 흔들었다.
아칼루시아 가문에서 제작한 인식저해 스크롤은 그의 반년치 용돈을 주고 사온 명품이었다.
저 정도면 드래곤들도 곧바로는 눈치채지 못할 터.
“훌륭해. 인식 저해는 지속시간이 짧은 편이니까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쓰지 마. 최고의 시나리오는 사진을 찍을 때 발동하고, 궁전에서 빠져나올 때가지 유지되는 건데 잘 될지 모르겠다. 내가 강조한 점은 기억하고 있지?”
“응. 들켜도 무조건 나바르도제 님 앞에서 붙잡히라면서.”
“맞아. 높은 확률로 용서해 주실 테니까. 그렇게 되면 사진을 찍는데 실패했다 쳐도 두 번째 기회가 생겨. 사진기를 꺼내면서 존경한다고, 기념 촬영을 한 번만 할 수 있겠냐고 묻는거야. 최대한 불쌍하게. 그 분의 성격상 아마 거절하지는 않으실 거야.”
“여, 역시···영웅의 후손다운 발상이군.”
윌럼프와 센센이 감탄했다.
생긴 건 곱상해도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란세는 조금 전까지 빼던 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계획을 제시했다.
문득, 또 다른 변수를 떠올린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세치카한테만 안 들키면 돼.’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떨렸다.
솔직히 란세의 의지를 흐리게 만드는 상당 지분은 세치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작전이 들통나는 순간 그녀는 란세를 비롯한 주모자 전부를 염력으로 두들겨 팰 터였다.
요술 구타에서 살아남더라도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멸시가 기다리고 있겠지.
란세가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되뇌이던 차였다.
“흥미롭군. 나바르도제라는 이름이 들리길래 무슨 작당 모의를 하나 싶었는데.”
“누, 누구냐?!”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든 소년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선실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 나로? 여기는 어떻게···!”
“다 들었다. 이 원숭이들아.”
란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비로제가 사뿐하게 발코니에 착지했다.
높이가 제법 있었음에도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년들의 면면을 쳐다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컷들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군. 아드렌까지 기껏 와서 한다는 게 가슴 엿보기라니···처음으로 내 직업에 회의감이 드는군.”
“가슴이 아니라, 화염 주머니다.”
갑자기 윌럼프가 안경을 내리며 삿대질했다.
표정만 보면 무슨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혁명가 같았다.
나비로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
“그리고 엿보는 게 아니라 전대미문의 아름다움을 역사에 새기려는 거야. 너 같은 황무지가 뭘 안다고 그래?”
그의 검지는 나비로제의 흉부에 머물러 있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모욕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황무지?”
“그래. 너도 자신감 꽤나 있어 보이지만 불의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주제에 사나이의 꿈에 훈수를 두지 마!”
“오래 살다 보니 별말을 다 듣는군······됐다. 용기가 가상해서 특별히 넘어가 줄테니 얌전히 계획을 물러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너아말로 여기서 보고 들은 걸 비밀로 하겠다고 맹세해. 나는 나비로제 교관님의 조카라고 봐주지 않아.”
그 말과 함께 윌럼프가 주머니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돌돌 말린 종이에는 일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한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비장한 눈빛을 본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수업도 좀 그렇게 진지하게 듣지 그러냐. 윌럼프.”
“뭐? 내 이름을 어떻게···”
“맹세는 거절한다. 이건 징계 대신이라 생각해라.”
윌럼프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나비로제의 형체가 사라지더니 그의 뒤편에서 다시 나타났다.
뻐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윌럼프의 눈알이 뒤집혔다.
“컥!”
윌럼프가 눈알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이마가 깨졌어야 했지만, 나비로제는 그의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잡아 주었다.
“윌럼프! 이게 무슨···!”
소년들이 경악했다.
센센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둘의 모습이 겹치나 싶더니 갑자기 윌럼프가 기절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알아챈 것은 오직 란세 뿐이었다.
그는 거리를 좁힘과 동시에 윌럼프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치는 나비로제의 움직임을 간신히 포착해 냈다.
그렇기에 란세는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공포에 질려 버렸다.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격차를 깨달아 버렸기에.
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센센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감히 내 친구를···! 레이디라고 해서 봐주지 않겠다!”
“동작이 여전히 딱딱하군. 센센.”
물론 들불에 뛰어드는 나방보다 무모한 짓이었다.
나비로제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그가 달려오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란세가 조심하라 외치려고 했지만 이미 승부는 끝난 뒤였다.
퍽!
뒤늦은 충격음과 함께 센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여튼.”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교복을 입었을 때만큼이나 자괴감이 극심했다.
당장 엊그제까지 가르치던 제자들을 기절시키다니.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음만 같으면 란세도 기절시킨 뒤 새로 사귄 ‘친구’에게 던져 주고 싶었지만,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나바르도제를 알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었으니까.
센센을 바닥에 눕힌 그녀가 란세를 돌아보았다.
“란세.”
“왜, 왜 그래?”
“오늘 일이 비밀로 남을 방법이 딱 하나 있다.”
“그게···뭔데?”
“이 녀석들 대신, 나를 데려가라.”
“······뭐?”
란세가 당혹성을 흘렸다.
나비로제는 벌써 윌럼프와 센센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바르도제를 알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 수모를 겪어 가면서 아드렌까지 왔는데, 공식적으로 알현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윌럼프와 센센을 겨냥한 나비로제가 스크롤 한 장을 찢었다.
스아아아···
종이 틈새로 피어오른 안개가 두 사람의 코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비싼 걸로 사놔서 다행이군. 부작용도 없겠어.”
나비로제가 혼잣말했다.
윌럼프가 꺼내 들었던 입막음용 스크롤이었다.
안개 속에는 단편적인 기억 소거와 수면 마법이 동시에 어 있었다.
란세의 대답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뒤처리를 마친 나비로제가 고개를 들었다.
“왜 대답이 없지. 혹시 싫은 건가?”
“이,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너는 왜 가려는 거야? 굉장히···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화보 촬영을 위해서 화염궁에 숨어들려던 놈에게 듣고 싶지 않군.”
“그, 그건···!”
란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도 부끄러운 짓이라는 자각은 있는 듯했다.
문득 그의 얼굴을 살피던 나비로제가 실소했다.
현 기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
올라간 눈꼬리와 긴 속눈썹, 노을색 눈동자는 로난과 판박이었다.
얼굴과 재능 정도만 닮았어도 충분했으련만.
“너는 정말 로난을 닮았군. 놀라울 정도야.”
“우, 우리 아버지를 알아?”
“알다마다. 덕분에 취향도 유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여튼 무조건 큰 게 좋다 이거지.”
“으응···?”
란세가 갸웃거렸으나 나비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손을 뻗은 그녀가 란세의 귀를 붙잡아 비틀었다.
“아아아악! 무, 무슨 짓이야!?”
“시끄럽다. 곧 착륙할 테니 따라와라.”
“귀! 내 귀 떨어져!”
“손맛이 훌륭하군. 이것조차도 닮았구나.”
나비로제가 웃었다.
십 년도 전에 로난을 가르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란세를 질질 끌며 갑판으로 돌아갔다.
휘영청한 보름달 아래, 하늘을 부유하는 용의 도시는 어느새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