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40)
외전24. 푸른 봄을 그대에게(6)
#A24
“붉은 죽음···붉은 죽음이라.”
나비로제가 혼잣말했다.
턱수염은 배후의 정체가 붉은 죽음이라 했다.
분명 언젠가 로난의 입에서 나왔던 단어인데, 명쾌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올락말락한 재채기를 겪는 것 같아서 짜증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건데.’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하수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곰팡이 핀 석벽이 빠르게 양 옆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운 주법은 지면에 붙어 나는 제비를 연상케 했다.
‘역시 몸이 가볍다. 환골 탈태인지 뭔지 했던게 진짜였나.’
그 와중에 몸의 변화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최고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데도 숨이 전혀 차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받는 중력만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몸이 작아지면서 완력이 약해진 것은 단점이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다섯 살 정도만 더 먹어도 최고일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달리던 나비로제가 멈춰섰다.
‘여기인가.’
막다른 곳이었다.
물길이 감아도는 공터는 축구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고밀도의 마나가 대기 중에 함유되어 있었다.
위를 쳐다보자 직경이 5m쯤 되는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득한 어둠 저편에 티끌같은 적색광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드렌의 심장인 화염궁의 빛이었다.
나비로제가 웃었다.
‘녀석들. 요란하게도 부수고 갔군.’
무용담을 자세히 듣지 않았어도 유추할 수 있었다.
저건 필히 로난 일행과 오르세가 부수며 빠져나간 자리일 터였다.
아직 화염궁이 하늘탑이던 시절에.
이런 식으로 제자들의 발자취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가볼까.”
자세를 낮춘 나비로제가 심호흡했다.
상당히 먼 거리를 한번에 뛰어넘어야 했다.
심장에서 맥동하던 마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가 팽창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는 좋군.’
그 와중에 나비로제는 처음으로 치마의 장점을 발견했다.
바지와는 달리 뻥 뚫려 있어서 훨씬 더 시원한 것이었다.
열기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부 위로 일렁거리던 차였다.
찰나 흐릿해진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앙-!!!!
뒤늦은 굉음이 하수도를 흔들었다.
****
“끄흑···으흐흑, 제기랄···! 제기랄!”
턱수염 사내가 신음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오른쪽 눈구멍이 숯불을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잘려나간 팔다리의 단면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는다. 이건 정말로 죽어.’
지혈 마법을 조금이라도 늦게 썼다면 즉사했을 터였다.
그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다시 한 번 주문을 영창했다.
은은한 빛무리가 몸을 감싸며 통증이 잦아들었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사내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나왔다.
“빌어먹을, 리사···.”
가장 먼저 나비로제에게 죽은 여인은 그의 약혼자였다.
그녀는 심장이 꿰뚫리고 상체가 절반 이상 썰려나간 상태에서도 공간 마법 스크롤을 발동해서 자신을 살렸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도대체 그 계집애는 뭐지?’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자타공인 최고의 모험가 다섯 명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기습을 당했다.
저항할 틈새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 토막 난 고깃덩이가 되기까지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오러를 각성한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검성급의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탄을 설치해야 해.’
순조로워야 할 작전이 왜 이딴 식으로 틀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둘러서 폭탄을 설치하는 것만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전의 소녀가 추적해오기라도 했다가는 모든 것이 끝이었으니.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화염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생각했던 것과는 풍경이 많이 달랐다.
화려한 장식도, 웅장한 기둥들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궁전의 내부는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대기가 작열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꼭 지옥 같군.’
사내가 굵은 침을 삼켰다.
거대한 화염의 회오리가 궁전 중앙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회오리의 가운데에는 태양을 연상케 하는 불덩어리가 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작열하는 염구(炎球)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드래곤을 감싸고 있었다.
달군 쇠처럼 달아오른 비늘, 하늘을 향해 휘어솟은 한 쌍의 뿔.
이 별의 최강자 중 하나인 불의 어머니 나바르도제였다.
“···저게 탈피라고?”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보통 사람은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나바르도제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화염 폭풍은 그녀의 허물을 조금씩 벗겨내고 있었다.
허물은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불로 변했는데, 그것이 불길이 갈수록 거세지는 원인이었다.
【······.】
나바르도제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 같은 몰골을 보아하니 탈피 도중에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그렇다면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사내는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최대한 그녀와 가까운 곳까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구를 때마다 주변의 기온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정도밖에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두께의 방어 마법이 불길을 가두고 있는 덕이었다.
‘수학 여행을 허락한 이유가 있었군. 이 정도의 방어막이라니.’
예상했던 요소였지만 실물의 박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게 없었다면 화염궁으로 전이되는 순간 뼈도 안 남고 소사했을 것이다.
수백 바퀴를 구른 사내는 어느새 방어막 앞에 도착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해내야 했다.
그는 스스로 목젖을 건드려서 속에 있는 내용물을 게워 냈다.
“우웩.”
작은 보석 하나가 사내의 턱 앞에 떨어졌다.
화염궁을 날려 버릴 폭탄이었다.
정팔면체의 수정 속에서는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한 불이었지만, 의뢰인은 이것만이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자부했다.
“이 다음으로는···.”
간신히 폭탄까지는 꺼냈지만 아직 단계가 남아 있었다.
사내는 온몸을 비틀며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검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팩.
이 손바닥만한 걸 구하기 위해서 모험단은 1년치 예산을 투자해야 했다.
팩을 이빨로 찢은 사내가 내용물을 폭탄 위에 들이부었다.
흠뻑 젖은 수정의 안팎이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부탁한다.’
혀 끝에 닿은 액체가 비릿했다.
액체의 정체는 영웅 로난의 피였다.
마나를 아무런 대가 없이 분해해 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 중 하나.
과거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 당시 사용되던 것을 암시장에서 정말 겨우겨우 구한 것이었다.
로난의 피가 발라진 폭탄은 기폭과 동시에 방어막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터였다.
“이제···마지막이군.”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각오를 마친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약혼자가 죽고 팔다리가 잘렸다.
한쪽 눈까지 뽑힌 마당에, 의뢰인에게 무엇을 보상으로 받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사내는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설치한 뒤 도망칠 계획이었지만, 죽음을 감수하고 직접 폭탄을 기폭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그 정도 마나는 남아 있었다.
폭탄을 노려보던 사내가 주문을 영창하려던 찰나.
“······아?”
갑자기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화염 폭풍도, 나바르도제도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기를 찢는 작열음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기폭을 위한 주문은 헐어 버린 목구멍을 맴돌고만 있었다.
오감이 사라진 세계에서 허락되는 것은 생각 뿐.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내가 전전긍긍하던 와중이었다.
“팔다리가 잘린 것 치고는 제법 움직였군.”
“······!!!”
머릿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틀림없는 살인귀 소녀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그의 옆까지 다가온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그게 폭탄인가···뭔가 했더니, 로난의 피를 이런 식으로 악용할 줄이야.”
워낙에 화염궁이 넓어서 간신히 따라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수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수정에 발라진 액체에.
비장의 무기가 어쩌고 했던 말을 떠올려 봤을 때 액체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 넘치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 제자의 피를.”
“·········!!”
나비로제의 목소리는 내장이 동파될 것처럼 차가웠다.
눈물을 쏟아내던 사내의 바지 아래로 누런 오줌이 새나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어지간한 건물보다 큰 독사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 전전대 검성 나비로제의 오러, 만사였다.
“사···사려주세···.”
그러고 보니 방금 로난을 두고 제자라 했었다.
티끌만큼 남아 있던 희망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왜 그런 괴물이 여기에, 저런 모습으로 있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모든 힘을 쏟아 목소리를 짜낸 사내가 목숨을 구걸하려던 차였다.
스각!
나비로제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호를 그렸다.
“그 아이가 무슨 심정으로 피를 짜 냈는지 아느냐?”
나비로제가 물었지만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으로 다섯 명이 모두 죽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
나비로제가 으르렁거렸다.
아드렌에 테러가 일어날 뻔 했다는 것보다 제자의 피가 악용되었다는 것이 더 화가 났다.
누구도 아닌 그 로난이 수 개월에 걸쳐서 뽑아낸 피였다.
외계의 침략자들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황제께 단속 강화를 부탁드려야겠군. 설마 아직도 남아 있었을 줄이야.’
남은 물량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로난의 피는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엄중한 법도 아래 회수되어 왔으니까.
뒤늦게나마 테러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일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저 상태면 말도 못 붙이겠군.’
불의 어머니를 지켜보던 나비로제가 입술을 질겅였다.
테러는 막았지만 자신의 상담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나비로제가 수정을 집어들려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화염궁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수정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었다.
“무슨.”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비로제는 직감적으로 수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수정은 간발의 차로 그녀의 손가락을 벗어나 방어막을 파고들었다.
화염 폭풍이 기름을 부은 것처럼 거세졌다.
콰아아아아아-!!
휘몰아치던 화마는 모조리 작은 수정 속으로 빨려들었다.
화염궁을 메운 불길의 절반 정도가 흡수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이군. 어머니.】
일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동시에 수정이 깨지며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비늘과 두 쌍의 뿔.
몸의 절반 가량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은 불의 어머니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나비로제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너는···.”
언젠가 바렌의 집무실에서 그림으로 본 적 있었다.
70m에 달하는 덩치, 흉악하게 휘어진 네 개의 뿔이 그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히 오르세에게 살해당했다 알려진 레드 드래곤 가르가렌스였다.
“붉은 죽음···!”
그제야 나비로제는 붉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정체를 떠올려 냈다.
바로 저 드래곤을 칭하는 말이었다.
로난은 저주가 만들어 낸 심상 세계 속에서, 구원자가 가르가렌스의 뿔을 자르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의문이 속속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지만 질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탈피 중인 나바르도제를 바라보던 가르가렌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럼,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아가겠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지며 광풍이 일어났다.
나바르도제의 몸을 감아돌고 있던 화염이 다시금 그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 검을 들고올걸 그랬군.”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해야 할 일은 알 것 같았다.
검신에 로난의 피를 바른 그녀가 방어막을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