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42)
외전26. 푸른 봄을 그대에게(8)
A26
“수상해. 둘이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런 으슥한 곳으로 온 거야?”
세치카가 도끼눈을 뜬 채 중얼거렸다.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그녀는 아드렌의 하수도를 거닐고 있었다.
결국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미행에 나선 것이었다.
하수도는 어두침침하고 으스스한 것이 밀회를 즐기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아셀에게 물려받은 마력 감지 능력이 란세와 나로의 흔적을 푸르스름한 발자국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우리가 얼마나 오래 만났는데···솔직히 얼굴은 내가 더 낫잖아?’
세치카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란세가 바람이 났다는 가설이 유력해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란세는 올곧은 심지만큼이나 여자 취향이 확고한 놈이었고, 불꽃처럼 등장한 전학생은 그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으니.
모퉁이를 돈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아무도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녀는 란세와 나로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한편, 모퉁이를 돌았을 때 두 사람이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게 아닐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벽에 기댄 채 하는 키스라든가, 아무튼 뭐 그런 거.
만약 그런 꼴을 목격해버린다면···.
‘제발 그러지 마. 나는 너희가 다 좋단 말야.’
세치카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성미가 고운 그녀는 기본적으로 정이 많았다.
란세야 말할 것도 없고, 나로도 하루 같이 논 게 전부였지만 좋은 애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다음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으앗!”
“윽.”
무언가와 부딪힌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개를 든 세치카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토록 찾아 헤메던 란세가 눈앞에 서 있었다
“라, 란세!?”
“세치카···? 왜 이런 곳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그나저나 너 꼴이 왜 그래?”
세치카가 당혹성을 흘렸다.
란세의 몰골은 척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하얗게 질린 데다가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있는 것이 꼭 기절했다 방금 깨어난 사람 같았다.
허둥지둥 다가온 세치카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누구한테 맞은 거야? 그리고 보니 나로는? 역시 그 도둑고양이가···!”
“그런 게 아니야···우웁.”
고개를 내저은 란세가 헛구역질했다.
나비로제에게 얻어맞고 졸도한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고작 몇 분 전이었다.
위를 비롯한 장기 전반이 뱃속에서 탭댄스를 추는 것 같았다.
“세치카···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나로가 위험해.”
“뭐, 뭐라고? 나로가 왜?”
“화염궁에 폭탄을 설치하려는 악당들이 있어···우욱, 혼자서 제압하러 갔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된 것 같아.”
“그럴 수가···! 너는 어떡하려고?”
“가서 도와줘야지···넘어뜨려서 미안해. 어서 사람들을 불러와 줘.”
그 말을 남긴 란세가 걸음을 옮겼다.
세치카는 벙찐 채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폭탄 테러라고?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저 멍청이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란세의 심각한 표정으로 미루어 봐서 장난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그런 걸로 장난을 칠 애도 아니었고.
두뇌가 명석한 그녀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세치카가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그리고 혼자 폼 잡으며 걸어가는 멍청이를 향해 소리쳤다.
“야! 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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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바르도제의 힘을 전부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그릇에 잉걸불을 담으려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짓이었으니.
딱 전성기의 힘까지만 되찾은 뒤 화염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방심에서 기인한 참패를 두 번이나 겪은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크으으윽! 크하아악!】
그런데 왜 이따위 상황이 닥친 것인가.
흡수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몸이 재생되지 않았다.
나비로제의 참격을 맞고 추락한 가르가렌스가 목놓아 포효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나는 화룡의 일족이다!!】
몸을 휘감았던 뱀은 사라졌으나 육신은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뿔과 심장, 역린이라는 세 개의 급소를 단번에 파괴당한 탓이었다.
그는 이제 드래곤이라기보다는 드래곤 형상을 한 불에 가까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가르가렌스의 모습은 파도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연상케 했다.
“그만 사라져라···너는 이미 졌어.”
나비로제는 묵묵히 공격을 회피하는 중이었다.
지치기도 했거니와 굳이 더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가르가렌스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참격과 동시에 녹아내린 칼날에는 로난의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이제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군.’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무사히 귀환하지 못한다면 다 허사였다.
그게 분명히 남아 있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정지했다.
‘찾았다.’
방어막 한구석에 균열이 남아 있었다.
나비로제가 진입할 때 파괴한 흔적이었다.
다만 서서히 닫혀 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도 아직 충분하군.
가르가렌스를 등진 그녀가 막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크하아악! 감히 어딜 도망치느냐!】
뒤쪽에서 포효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화염의 벽이 솟구쳤다.
암적색으로 끓어오르는 불길은 화염궁의 천장에 닿을 만큼 드높았다.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불꽃으로 변한 가르가렌스가 보였다.
【너를 저주한다 필멸자여! 모든 것을 잃더라도 네년과 이 화염궁만큼은 날려버리겠다!!】
“부질없는 짓을.”
【그 뒤에는 내 권속들이 세상에 외칠 거다! 화염궁의 붕괴는 다름아닌 인간의 짓이라고! 땅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은 다시금 용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가르가렌스가 노호했다.
나비로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머리마저 불꽃으로 화해 버린 그의 몸이 거대한 화구(火球)로 변모했다.
콰아아아아-!
주변의 대기가 구체를 향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런.”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마치 탄생하기 직전의 별 같았다.
가르가렌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까지 제물로 삼아서 대폭발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마나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 화염궁을 무너뜨리기에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웃기지 마라.”
그녀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몸을 돌렸다.
드래곤과의 관계는 둘째치고 이 정도의 폭발이라면 아드렌을 관광하고 있는 학생들이 죽거나 다칠 위험성이 다분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나비로제의 심장이 거칠게 맥동했다.
“흐으읍···!”
전신의 마나가 한 곳으로 집중됐다.
그녀가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콰아아앙!
바닥을 뚫고 나온 독사가 구체를 집어삼켰다.
-샤아아아!
【이번에도 그 기술인가···!】
가르가렌스가 으르렁거렸다.
한순간 흡수가 멈추며 불길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극적으로 나아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뱀의 뱃속에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용 없다! 네년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크으윽···.”
【꼬리를 말고 도망쳐라!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을 그 눈으로 지켜봐라!】
나비로제가 이를 악물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 도마뱀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지만, 레드 드래곤.
그것도 화룡 일족의 불에 직격당한 것은 결코 쉬이 넘길 수 있는 타격이 아니었다.
그를 방증하듯 나비로제의 피부는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열기를 막는데 사용하던 마나까지 끌어서 사용하는 탓이었다.
이제 선택을 할 시간이었다.
이대로 만사를 유지한 채 가르가렌스와 함께 공멸하느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만사를 거두고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하느냐.
나비로제가 웃었다.
“하.”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움켜쥐고 있던 칼자루에 힘을 더했다.
“같이 가자. 도마뱀.”
【어리석은···!】
가르가렌스가 당혹성을 흘렸다.
나비로제는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도 잊은 채 만사를 유지하는 데만 집중했다.
‘여기까지인가. 기껏 늙어 죽지 않는 몸이 되었는데, 참 팔자도 기구하군.’
허무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제자들을 지키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었으까.자신의 목숨 하나로 푸른 싹들을 지킬 수 있다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눌어붙은 손바닥은 이제 칼자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살아온 나날이 단편적으로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전쟁터의 매캐한 포연.
자식을 잃은 부모와 부모를 잃은 자식의 절규.
칼날이 몸을 베는 순간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사람의 머리와 맞교환한 동전 몇 닢과, 그걸로 사먹은 맥주의 알싸한 맛.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피로 점철된 나의 청춘.
그 붉은 기억을 씻어준 것은, 지금껏 그녀가 가르친 제자들이었다.
‘그래도 즐거웠지.’
필레온에서 근무하며 쌓아올린 기억은 하나하나가 나비로제의 보물이었다.
덕분에 공허한 인생을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 것처럼, 학생들 또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로난과 아데샨, 슐리펜.
그 외에도 실력도 없으면서 말은 더럽게 안 듣는 멍청한 제자놈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비공정에서의 기억이었다.
세치카가 했던 말을 떠올린 나비로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친구라.”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어쩌면 이 나이대로 돌아온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마등이 끝나자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점점 밝아지는 화염의 구체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역시 소멸시키는 건 무리였나.
그래도 만사가 충격 정도는 확실히 완화시켜주겠지.’
각오를 끝마친 나비로제가 마지막 힘을 짜내던 차였다.
뒤쪽에서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에! 나로!”
“···뭐라?”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나비로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방어막 너머에서 란세와 세치카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세치카의 염력으로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아?!”
“저게 폭탄···! 얼른 거기서 나와!”
세치카가 경악했다.
란세가 다급하게 손짓했다.
두 사람을 본 나비로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살이 녹아내리던 고통에도 덤덤하던 그녀가 격분하며 외쳤다.
“너희들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당장 꺼져라!!”
“말도 안 돼. 너만 내버려두고 어떻게 가?”
“이런 바보 같은···윽!”
도대체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이었다.
재차 소리를 지르려던 나비로제가 피를 토했다.
한계에 다다른 몸이 무너진 것이었다.
집중이 깨지며 만사가 소멸했다.
【잘 버텼지만 여기까지다. 사라져라!】
가르가렌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다시 드러난 화염의 구체가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사에 갇혀 있던 덕에 위력은 확연하게 줄었지만 궁전 내부를 날려버리기에는 차고 넘쳤다.
나비로제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우려던 찰나.
“하아아압!”
지면을 박차며 쇄도한 란세가 검을 휘둘렀다.
방어막 위에 하얀 선이 그어지더니 아물어가던 균열이 무너져 내렸다.
딱 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나타났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 속으로 몸을 내던진 그가 나비로제를 끌어안았다.
“너···!”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란세의 옷이 불타고 있었다.
피부가 달아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크으으···대단하다 너. 여기서 어떻게 버틴 거야?”
“멍청한 놈이!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나가라!”
“안 말해도 그럴 거야! 세치카!”
나비로제를 안아든 란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세치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양 팔을 들어 올렸다.
대마법사 아셀의 첫 번째 마법이 주문과 함께 발동되었다.
“나도 알아! 인비저블 핸드!”
두 사람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그들이 들어왔던 균열로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절정에 다다른 화염구가 섬광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