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43)
외전27. 푸른 봄을 그대에게(9)
#A27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대단하구나. 정말로 대단해.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강할 수 있을까.】
“···으음.”
신음하던 나비로제가 눈을 떴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드높은 화염궁의 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처럼 휘몰아치던 불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는···.”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나비로제는 천천히 벌어졌던 일을 정리했다.
가르가렌스는 확실하게 죽었다.
다만 최후의 발악으로 자폭을 선택했다.
만사로 폭발을 막으려 해봤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동귀어진을 결심했다.
그 다음에는···.
‘······!’
나비로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폭발 직전, 분명 두 명의 제자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란세! 세치카!!”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둘이 잘못되기라도 했다가는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막 상체를 일으키려던 나비로제가 멈춰섰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무언가 몸을 누르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희들.”
란세와 세치카가 양 옆에서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자세를 보아하니 폭발에서 감싸준 것이었다.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네 개의 손은 그녀를 굳건하게 붙잡고 있었다.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질겅이던 나비로제가 고개를 위로 젖혔다.
“···이 못난 놈들이.”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감수성이 짙어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떠올랐다.
란세와 방어막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폭발이 일어났었다.
‘제자 덕에 목숨을 구한 건 이걸로 두 번째인가.’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뼈도 못 추렸을 터였다.
문득 얼굴을 매만지던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이건?”
손바닥 아래 만져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눈은 더 깊어졌고, 콧대는 보다 높아져 있었다.
조심스레 두 사람을 떼어낸 나비로제가 란세의 검을 집어들었다.
배면에 얼굴을 비춰본 그녀가 헛웃음을 쳤다.
“···허.”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성숙해진 얼굴은 20대 무렵으로 돌아가 있었다.
짙은 속눈썹과 오똑한 코.
젖살이 다 빠진 턱은 사과를 깎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심지어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많던 상처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이건 도대체···.”
그녀의 몸에는 거의 다 타버린 교복이 걸쳐져 있었다.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것이 의복의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였다.
다만 외부로 드러난 구릿빛 피부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근육까지 녹아내린 화상은 물론, 과거 자이파와 싸우며 생겼던 복부의 흉터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단발이 될 때까지 타버렸던 회백색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비로제가 벙쪄 있던 와중이었다.
잠결에 들었던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무슨···!”
나비로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처럼 적색을 띄었다.
“당신은.”
【때마침 탈피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너희의 부상은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거든. 특히 너는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란다.】
여인의 손가락은 나비로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비로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필멸자 나비로제가 불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느냐.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도 함께 겪은 전우 사이거늘. 조금 서운해지려 하는구나.】
“아닙니다. 먼저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저 두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가르가렌스를 벤 것은 저 혼자입니다.”
나비로제는 제일 먼저 자신이 가르가렌스를 참했음을 고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아픈 손가락이라 해도 그 멍청한 도마뱀은 불의 어머니의 일족이었으니까.
혹시러도 책임을 물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머지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있단다. 아이야.】
“예?”
【나는 탈피하는 중에도 의식이 있었거든. 네게 책임을 물 생각은 전혀 없거니와, 되려 내가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단다. 그러니 어서 고개를 들거라.】
나바르도제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탈피만 아니었다면 곧바로 개입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녀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르가렌스 그 아이는···카인에게 뿔을 잘리기 전부터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있었단다. 나와 자식들이 아무리 계도하려 해봐도 허사였지. 진작에 내가 책임을 지고 처리했어야 하는데···어미 된 자로서 자식을 죽이는 일이 쉽지는 않더구나.】
“이해합니다.”
【고맙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을 뿐이니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지 말거라. 그럼 상처는 완벽하게 나았을 테니···슬슬 여기까지 온 목적을 물어봐도 되겠느냐?】
“···그러지요.”
나비로제가 주억거렸다.
벌써 들켜버린 모양이었다.
실제로 가르가렌스와의 사투는 얼떨결에 벌어진 해프닝일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자신이 화염궁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어려졌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사정을 들은 나바르도제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하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렇다면 방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다. 확실히 제자들에게 보여 주기에는 너무 귀여운 모습이었지.】
“윽.”
나비로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교복을 입은 이래로 최대의 수치였다.
큭큭거리던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마법사도 아닌 검사가 역행의 경지에 이르다니 대단하구나. 단신으로 가르가렌스를 물리칠만 해. 헌데 지금은 이미 네가 바라던 나잇대로 돌아간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왜 남들처럼 전성기로 돌아가지 않고 과하게 어려졌는지. 갑자기 왜 나이를 다시 먹은 건지···.”
【일단 갑자기 나이가 든 것은 네가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란다. 가르가렌스와의 전투 도중 한 차례 더 성장하며 몸이 급속도로 커져 버린 게지. 유별나게 어려진 이유는···으음, 내 가설이기는 한데 들어보겠느냐? 거의 확실할 거야.】
나비로제가 끄덕였다.
어차피 불의 어머니가 모르면 아무도 모를 터였다.
가까이 다가온 나바르도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아. 쉽게 말하자면, 너는 네가 가장 그리워하던 시절로 돌아간 거란다.】
“···그리워하던 시절?”
【그래. 돌아가고 싶은 나잇대로 말이다. 이런 경우를 아주 못 본 것은 아니거든. 세간에는 역행을 겪는 자가 육체적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다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노력이 쌓아올린 기적인 역행 현상은, 그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비를 베푼다.】
한마디로 나비로제는 본인이 원해서 소녀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 무렵의 자신은 전쟁터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그때의 무엇을 그리워했단 말인가.
나비로제가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제가 다시 소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후후, 그건 너만이 알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참 착한 아이들을 제자로 두었구나.】
나바르도제가 미소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란세와 세치카에게 머물러 있었다.
스승을 지켜낸 제자들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스승을···아니, 사정을 미루어 보면 친구라 부르는 게 맞겠지. 너도 알겠지만 친구를 위해 드래곤이 뿜은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자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단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굴이 눈에 익은 걸 보니 로난과 아셀의 자식들이구나.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이럴 때나 쓰는 거겠지. 나는 필멸자들의 선함이 계승되는 걸 지켜볼 때가 참 좋더구나.】
그녀가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답게 뒤척거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때, 가만히 란세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비로제의 머릿속에 섬전이 튀었다.
“···나바르도제 님. 그럼 저는 계속 이 상태로 있게 되는 겁니까?”
【그래. 다시 한 번 한계를 뛰어넘거나 별다른 일이 없는 한은. 물론 한계를 뛰어넘어서 나이를 먹어도 금방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란다. 육체적 전성기는 맞는 것 같으니.】
“그렇군요······혹시, 염치없지만 몇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염치가 없기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주마.】
나바르도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애초에 빈손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단순한 폭탄 테러가 아닌, 필멸자와 드래곤 관계의 파국을 막아낸 영웅이었으니.
감사를 표한 나비로제가 검을 집어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싹둑!
회백색 장발이 하늘거리며 발치에 떨어졌다.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치켜떴다.
【갑자기 왜···? 예쁜 머리카락이었는데.】
“저도 장발이 좋기는 합니다. 하지만 나로의 머리는 불에 타버렸으니까요.”
【그게 무슨···아하.】
뒤늦게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나바르도제가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눈앞의 인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스승인 것 같았다.
이어서 나비로제는 란세의 교복 안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철없는 부탁이지만···.”
곧이어 그녀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사각형의 작은 기계장치는 제자 윌럼프에게서 압수한 물건이었다.
생소한 물건을 본 불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건 뭐지?】
.
.
“으아아악!!”
란세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 지난 뒤였다.
폭발에 휩쓸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뒤가 기억나지 않았다.
발작하듯 몸을 일으킨 그가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세, 세치카! 나로! 다들 어디 갔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엄습했다.
폭발이 꽤 큰 것 같았는데, 설마.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란세는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이었다.
“우린 여기 있다. 란세.”
“오래도 걸리네. 너 설마 울었냐?”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세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화염궁의 한복판에서, 두 소녀가 나란히 테이블에 둘러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너, 너희들···.”
“푸흐흐,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 세찌카! 나로옷!”
세치카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내심 란세가 자신의 이름을 먼저 불러줘서 기뻐하고 있었다.
묵묵히 차를 마시던 나비로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푹 잔 것 같아 다행이군. 일어나라.”
“나, 나로···다친 곳은 없어?”
“보다시피. 너희들이 나를 구해 준 덕이지.”
“그럼 다행인데, 머리카락이···.”
란세가 말을 더듬었다.
갈기처럼 풍성하던 롱헤어는 깔끔한 단발로 변해 있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취향이기는 했다.
“왜, 별로인가?”
“아,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어울려! 그냥 기르는데 오래 걸렸을 텐데, 아까워서···.”
“어울린다니 다행이군. 자, 정신을 차렸으면 이제 옷매무새를 다듬고 예를 갖출 준비를 해라.”
“으응? 갑자기 그게 무슨···”
그때 란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동시에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그의 양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란세가 헛숨을 들이켰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다, 다, 당신은···?!”
【반갑다. 귀여운 아이야. 정말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여인이 뺨을 쓰다듬자 란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기소개 따위는 필요 없는 외모였다.
진홍색 머리카락 위로는 한 쌍의 뿔이 나 있었다.
“나, 나바르도제 님···?”
심호흡하던 그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나바르도제는 과거 필레온의 입학식에 참석했을 때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앞섶이 깊게 파여 있어서 로난은 물론 황제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바로 그 옷을.
문득 란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웠던 그림자를 만든 것이 그녀의 흉부라는 것을 눈치챘다.
완전히 압도당한 그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벌벌 떨던 와중이었다.
미소로 답변을 대신한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나와 함께 사진이라는 것을 찍고 싶다면서?】
“······!!!”
란세의 눈이 커졌다.
이 별에서 가장 강한 자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란, 원래 그토록 가슴이 벅차오르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