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53)
외전37. 짐승들(9)
#A37
북풍단의 수장, 레테는 기억한다.
자이파의 주도 아래 일어난 송곳니의 밤을.
화마에 휩싸인 변경백령 바르사를.
성벽을 넘어온 수인들이 인간을 찢어 죽이던 광경을.
‘드디어 이 때가 왔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참상은 여전히 망막 뒤편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였다.
북부 최고의 공학자가 되겠다는 레테의 꿈은 송곳니의 밤이 도래함과 동시에 끝이 났다.
점령당한 바르사를 되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평화 협정이 맺어지고, 사위어버린 도시에서 추려낸 주검들은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다.
레테는 가족의 유해를 그러모으며 맹세했다.
반드시 저 짐승 놈들을 북부에서 박멸할 것이라고.
더불어, 이 사건의 주모자인 자이파의 목을 취할 것이라고.
복수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북부의 원주민들은 레테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수인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 변방으로 쫓겨난 자들의 후예.
그들이 기존에 품고 있던 증오는 레테라는 기름과 만나 더욱 거센 불길이 되었다.
“황제와 대장군은 너를 용서했지만, 나는 아니야.”
발리스타를 조율하던 레테가 혼잣말했다.
본인이 그러하듯 지금의 자이파는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검성으로 긴 시간을 활약하며 민중을 도왔다.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지금은 자진해서 북부의 치안을 바로잡고 있었다.
영웅이라 불러 마땅한 행보였다.
허나 그건 레테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다 무슨 소용인가.
속죄한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데.
“자···어서 나와라.”
레테가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댔다.
발리스타는 그의 소년기에 제작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움직였다.
북풍단의 본거지에서도 가장 시야 확보가 잘 되는 장소에 설치된 이 병기는 오직 자이파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요새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던 와중이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솟아올랐다.
‘드디어···!’
레테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는 자이파였다.
수직으로 도약한 그의 손에는 피로 흥건하게 젖은 언월도가 쥐어져 있었다.
공중에 체류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궤도를 조정한 레테가 발사 레버를 당겼다.
철컹!
부품 곳곳에 새겨져 있는 주문이 일제히 빛을 발함과 동시에, 발리스타가 격발됐다.
“가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레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대한 창은 자로 잰 듯한 직선을 그리며 자이파를 향해 나아갔다.
파공음은 없었다.
열 종류가 넘는 사격 보조 주문 중에는 소음을 억제하는 마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변수가 딱 하나 있다면, 상대가 자이파 터르겅이었다는 점이었다.
“음?”
초월적인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던 자이파가 고개를 돌렸다.
웬 거대한 창 하나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자이파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까지 보아온 무기와는 뭔가 달랐다.
원래 투사체란 체공 거리가 길어질수록 느려져야 하는데, 저건 오히려 가속하고 있었다.
“머리를 좀 썼군.”
공중에 떠오른 틈을 노려 발사한 모양이었다.
물론 미리 눈치챘기에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자이파가 언월도를 가볍게 휘둘렀다.
허공에 검은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창이 세로로 갈라졌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었더라도 공간 자체를 베어가르는 자이파의 오러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가 다시금 요새로 시선을 내리는 찰나.
파아아아앗-!!!
반으로 갈라진 창이 폭발을 일으켰다.
찬연한 빛무리가 주위를 뒤덮었다.
폭심지에 있던 자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윽···!”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섬광이었다.
이윽고 자이파의 형체가 빛무리에 삼켜졌다.
그 광경을 본 레테가 입꼬리를 올렸다.
“요격할 거라 생각했지. 네놈이라면 말이야.”
“서, 성공이가!? 진짜로?”
아래에서 지켜보던 블란타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마음을 졸이면서 빛의 구체를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하늘을 뒤덮었던 빛이 한순간에 사그라지더니, 다시 자이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하자는 건지.”
요새 한복판에 착지한 자이파가 헛웃음을 쳤다.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였는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섬광탄이라기에는 너무 정성이 과했고, 폭탄이라기에는 위력이 약했다.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했군.
그가 다시 파괴 행위에 돌입하려던 차였다.
“음?”
정체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새털처럼 가볍던 언월도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던 북풍단원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방금 그 빛은 뭐였지? 자이파는 어디 가고?”
“뭐야 저건. 처음 보는 늙은인데.”
“잠깐, 손에 들고 있는 언월도는 설마···.”
문득 자이파는 시야가 낮아진 것을 인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의 정수리를 보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무슨···.”
자이파가 당혹성을 흘렸다.
이제 보니 달라진 것은 시야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천장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살을 에는 것처럼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맥동하던 오러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언월도를 움켜쥐고 있는 손은 새카만 털 대신 주름과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인간?”
상황을 인지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이파는 자신이 인간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으로.
물론 원본이 원본이었기에 특유의 위압감이 쇠하지는 않았다.
진홍색으로 이글거리는 눈빛,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카만 머리카락과 수염.
옷이 흘러내리며 드러난 나신은 온통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이가 없군.”
매사에 침착한 자이파였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요술을 쓴 건지는 몰라도 인간이 되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썰어 죽이던 바로 그 종족이.
당황한 것은 북풍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노인의 정체가 자이파라는 것도 모른 채 슬금슬금 다가오는 중이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 전 인원은 들어라. 잔악무도한 짐승의 수괴, 자이파 터르겅은 지금 인간으로 변했다.
요새 전역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레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머리가 검고 눈이 붉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인간으로 변하면서 수인의 힘을 대부분 잃었을 테니 조속히 찾아서 척살하라. 만약 생포한다면 확실하게 보상을 하겠다.
단원들이 경악했다.
그들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노인에게 집중되었다.
인상착의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노친네는 실험이라도 하듯이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빨간 눈···저, 저 영감이다!”
“지금이 기회다! 죽여!”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모든 방향에서 달려드는 북풍단은 성난 벌떼를 연상케 했다.
언월도를 내팽겨친 자이파가 혀를 찼다.
“역시 이건 무리인가···.”
못 드는 건 아니었지만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은 무리였다.
자이파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롱소드를 주워들었다.
칼자루가 손에 착 감기는 감각이 기묘했다.
수인이었을 적에는 이쑤시개로 쓰던 물건이거늘.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군.”
아마도 저주 같은 것에 걸린 듯했다.
처음 겪는 일이거니와 상황도 몹시 나빴지만 자이파는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뛰쳐나간 노장이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북풍단 두 명의 머리가 천장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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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 참말로 성공했구나. 레테!”
블란타가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막 레테의 안내 방송을 들은 참이었다.
“씨바꺼 꼴 좋다 노친네! 임마들만 아니었어도 내가 조지러 가는 건데, 아.”
블란타는 아쉽다는 듯이 꼬리로 바닥을 쿵쿵 때렸다.
지금쯤 자이파는 적응하지도 못한 인간의 몸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터였다.
“자이파 님이 인간이 되었다니···! 어떻게 그런!”
“이건 나도 예상 못했는데.”
바렌과 세크리트가 동시에 경악했다.
설마 저런 비장의 무기를 숨겨두고 있을 줄이야.
드러누워 휴식하던 세크리트가 흥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어디 유적 같은 곳에서 운 좋게 인간화 저주를 구한 것 같군. 저렇게 요란한 저주가 아닌데, 완성본이 남아 있었나.”
“이, 인간인 상태로 저 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에요. 자이파 님을 도와야 합니다!”
“나도 마음은 굴뚝같네만, 달리 방법이 있겠나?”
세크리트가 블란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을 속박하는 사슬은 아직도 그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저 웨어팬서에게서 벗어날지 고민하던 차였다.
요새 방향에서, 대지를 긁어내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저기 있다! 블란타다!!”
“뭐꼬?”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십수 마리의 수인이 성난 들소 떼처럼 몰려오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거적데기 차림의 수인들은 대부분 무기를 쥐고 있었다.
익숙한 면면을 본 바렌이 눈썹을 치켜떴다.
“투기장의···!”
분명히 투기장 숙소에 갇혀 있던 수인들이었다.
자이파가 난동을 부리는 와중에 탈출한 듯했는데, 하나같이 격렬한 분노에 차 있었다.
분노의 대상은 다름아닌 챔피언 블란타.
수인들을 천천히 훑어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짜, 귀찮게.”
이유는 자명했다.
여러모로 쌓인 것이 많을 터였다.
블란타가 호의호식 할 수 있던 이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동포들을 화려하게 죽이거나 불구로 만든 덕이니까.
실제로 그들을 한 번도 인격체로 여긴 적이 없기도 했고.
시건방지기는, 해방된 틈을 타 응징하러 온 건가.
“내도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구마.”
블란타가 실소했다.
이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바렌과 세크리트를 근처의 나무에 묶어 놓았다.
사슬이 강하게 조여드는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허윽···숨이···!”
“니네 여기 단디 있어라. 도망치면 내한테 뒤진데이.”
블란타가 으르렁거렸다.
희번득한 눈빛은 사람을 저절로 위축시켰다.
바렌과 세크리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어요.”
“그래야지. 착한 도야지구마.”
블란타가 바렌의 머리를 툭툭 쳤다.
솔직히 도망쳐도 별 상관은 없었다.
다리 짧은 웨어폭스와 뚱뚱한 인간 따위는 케이크를 먹듯이 쉽게 잡아들일 수 있었다.
어느새 수인들과의 거리가 제법 좁혀져 있었다.
고개를 돌린 블란타가 섬뜩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일대 다수는 간만이었다.
흐느적거리던 블란타의 몸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수인들의 눈앞에 도달한 그가 살갑게 인사했다.
“안녕.”
“빠, 빠르다!”
수인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지옥 같은 투기장에서 생존해온 전사들이었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은 수인들이 공격에 나섰다.
창칼과 발톱, 송곳니가 블란타 한 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액체처럼 유연한 몸은 생채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몸이···!”
“이익, 좀 맞아라!”
혼자서만 중력의 저항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무리에도 다른 웨어 팬서가 있었지만 블란타와의 격차는 절망적이었다.
순식간에 무리 중앙으로 침투한 블란타가 발톱을 곤두세웠다.
“니네같은 좆밥들한테는 무기도 필요 없다.”
“젠장, 어느새···크악!”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블란타는 거센 돌개바람이 되어 무리를 휩쓸었다.
발톱이 번득일 때마다 수인들이 급소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선두에 있던 웨어팬서가 쩍 갈라진 안구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크, 흐아아아악!”
“아까부터 눈깔 뜬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제 쫌 낫네.”
블란타가 코웃음쳤다.
맹인이 된 웨어팬서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블란타는 그를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죽이는 것보다는 앞으로 평생 저렇게 사는 쪽이 더 재미있을 터였다.
이번에는 덩치 좋은 웨어베어 두 마리가 양쪽에서 덮쳐왔다.
“챔피언!”
“죽어라!”
얼굴이 똑 닮은 걸 보니 쌍둥이인 듯했다.
체격이 원체 커서 거대한 벽 두 개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블란타는 당황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쿵!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한 두 웨어베어가 서로 이마를 부딪혔다.
“컥!”
“억.”
찰나의 빈틈이었다.
챔피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비를 세 바퀴나 돌며 떨어진 블란타가 뒷꿈치로 한 명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콰직!!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왼쪽에 있던 웨어베어가 고꾸라졌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짜부러진 눈알이 밖으로 튀었다.
형제의 죽음을 본 웨어베어가 기겁했다.
“혀, 형님!”
“미련 곰탱이들보다 잡기 쉬운 건 없제.”
그 또한 기회였다.
블란타가 얼어 있는 웨어베어를 향해 팔을 내질렀다.
예리하게 벼려진 발톱은 기어코 가죽을 파고들어 심장을 찢어 놓았다.
다시 빠져나온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웨어베어가 형제의 주검 위로 겹치듯이 쓰러졌다.
“힉···!”
“이게 다가?! 쫄아 있지 말고 덤비라!!”
블란타가 포효했다.
수인들은 가까스로 공포를 떨쳐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무모한 광경을 감상하던 세크리트가 짤막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참 활기찬 친구군. 자이파의 친위대에 들어갈만 해.”
“또 저렇게 무고한 자들이···.”
나무에 묶여 있던 바렌이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미친 표범이 찢고, 베고, 잡아 뜯을 때마다 생명이 사라졌다.
블란타는 자신이 어떻게 챔피언을 그토록 오랫동안 해먹었는지 모두에게 공표하는 중이었다.
우선 여기서 탈출해야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잔여 오러를 가늠하던 바렌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 정도는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참아 주세요.”
“그래. 버겁겠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좀 써보시게. 원래는 살이 좀 더 빠진 뒤에 돌려 놓으려 했는데, 영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군.”
“네? 그게 무슨···.”
“무슨 소리기는.”
세크리트의 꼬리가 본인의 주머니를 툭툭 쳤다.
안에 뭔가 들어 있다는 제스처였다.
바렌을 돌아본 그가, 조금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슬슬 자네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