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57)
외전41. 짐승들(13)
#A41
“커억, 헉···빌어먹을 짐승 놈들···.”
레테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기다란 작대기 하나가 그의 지팡이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완전히 으스러진 왼쪽 다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감히 내게 자비를 베풀어?’
레테는 요새를 벗어나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목숨만 보전한다면 어떻게든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자이파는 마을을 파괴하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지도 않았다.
감히 나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다니.
으득.
레테의 입 속에서 어금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기필코 복수하겠다···나를 살려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대, 대장?!”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벙쪄 있던 레테가 미간을 찌푸렸다.
“······베스퍼?”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요새가 왜···그 상처는 또 뭐고요?”
북풍단의 지부장 중 한 명인 베스퍼였다.
바렌에게 목덜미를 맞아 기절한 그녀는 모든 사태가 끝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찌보면 이 사단의 원흉이 된 여자.
레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때문에···.”
“네?”
“너 때문이다 베스퍼! 네가 북풍단을 망하게 했어! 네년이 데려온 돼지가 모든 걸 망쳤다!”
레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바렌의 미남계에 당하지만 않았어도 북풍단은 무너지지 않았을 터였다.
토막 나서 죽은 다른 단원들과는 달리 베스퍼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악에 받힌 레테는 그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속사포처럼 쏟아 놓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베스퍼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럼 조직원은 다 죽은 거에요? 블란타도?”
“그래, 다 끝났다! 수십 년에 걸쳐 세운 계획이 물거품이 됐어!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읍?!”
“하아아···다행이다.”
레테가 울분을 쏟아 놓던 와중이었다.
베스퍼가 갑자기 그의 입을 틀어막더니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뭐라 저항할 새도 없었다.
푹.
단검이 레테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허억···!”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베스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칼자루에서 손을 떼자 레테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대동맥이라도 잘린 건지 출혈량이 심상치 않았다.
레테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나왔다.
“어···째서···?”
“어째서기는. 당신은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거야.”
베스퍼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바렌의 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눈이 좋았던 그녀는 바렌의 몸 속에서 맥동하는 힘을 엿볼 수 있었다.
“애초에 일부러 데려간 거야. 수상쩍은 행적에 강한 힘을 품고 있다면 목적은 뻔하지. 동료를 구하기 위한 잠입 말고는 뭐가 없잖아?”
“너, 너어···.”
“그 돼지가 조직원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눈치챘어. 애초에 신입 충원은 지난 두 달 동안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거물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베스퍼가 실소했다.
힘을 감추고 있던 건 알았는데, 설마 그 바렌 파나시르가 인간으로 변한 모습이었을 줄이야.
레테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레테. 내 양아버지는 웨어폭스였어.”
“뭣···.”
“삼 년 전에 북풍단에게 납치당했지. 애초에 입단한 것도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수소문을 해보니까 이미 투기장에서 돌아가셨더라고. 북풍단의 자랑거리인 챔피언. 블란타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베스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수인이 인간을 입양하는 것은 북부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추리지도 못한 그녀는 복수의 때만을 기다리며 북풍단에서 활동했다.
“그걸 알게 된 날부터 매일같이 투기장을 보러 갔지. 증오를 잊지 않기 위해서. 지부장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
“그, 그런···!”
“레테. 내가 이 조직에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다시 칼자루를 쥔 베스퍼가 단검을 비틀었다.
내장이 썰리는 감촉과 함께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댄 베스퍼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짐승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종족을 불문하고.”
“커···억.”
“잘 가. 두목.”
단검을 뽑아낸 베스퍼가 등을 돌렸다.
복수를 마친 여인이 달빛 너머로 사라졌다.
숨을 껄떡이던 레테는 쓰레기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몸이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배 밑에 고인 웅덩이가 넓어질수록 오감이 하나둘씩 끊어지고 있었다.
“······!”
나도 피해자였다며 항변하려 했지만,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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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피이이유···.”
네메아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마르페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함께 다이어트 수행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벌써 내일이 필레온 아카데미의 개학날인데, 바렌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설마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크라티르 님에게 문의해야 하나?’
큼지막한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바렌을 떠나보낸 이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탓이었다.
건강이 너무 걱정되서 일단 내쫓기는 했지만,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었나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쓸 걸 그랬나.
그녀가 불안 증세를 보이며 마르페즈를 쓰다듬던 와중이었다.
“후우, 정말 오랜만의 집이군요. 이 그리운 냄새.”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익숙한 웨어라이온 한 명이 불쑥 들어왔다.
네메아와 마르페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둘을 발견한 바렌이 해맑게 웃었다.
“오오, 부인! 마르페즈! 그간 잘 지냈나요?”
“······!”
“거진 두 달 만이군요. 그런데 어째 피곤해 보입니다. 혹시 제가 없던 동안 무슨 일이라도···”
“세상에, 자기!”
“허으억!”
네메아가 말을 끊으며 달려들었다.
강렬한 포옹에 숨이 막힌 바렌이 헛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현관에서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바렌이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다녀왔습니다. 좀 늦었죠.”
“연락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었잖아.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살은 제대로 빼서 왔겠지?”
“하하···어느 정도는요. 노력은 했습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바렌을 안고 있던 네메아가 갸웃거렸다.
재회의 기쁨이 너무 커서 변화를 눈치챌 새도 없었다.
푸딩처럼 말랑말랑하던 몸은 암석보다 단단해진 채였다.
아예 두세 발자국을 물러나서 바렌을 위아래로 훑어 보자, 완전히 달라진 몸이 눈에 들어왔다.
“허?”
턱선이 칼처럼 예리했다.
두툼하던 배에서는 더는 군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옷 위로도 태가 나는 근육은 거장의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이건 십 년도 전에 자신과 연애하던 시절보다 훌륭해져 있었다.
네메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어떻게 고작 두 달만에 이런···!”
“참으로···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지요.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바렌이 복잡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지난 한 달동안 자이파에게 1:1 훈련을 받았다.
무인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전대 검성의 특별 지도였지만, 바렌은 무인이 아닌 살 빼러 온 아저씨일 뿐이었다.
– 벌써부터 빌빌거려서 어쩌려는 거냐 솜털. 여길 올라오지 못한다면 저녁밥은 없다!
– 커허헝, 사람 살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바렌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 즉시 붙잡히고 말았다.
무장 친위대나 할 법한 훈련을 소화할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살아서 가족을 봐야 한다는 일념 덕이었다.
“참, 자이파 님이 안부 전해주시라더군요.”
“뭐야, 대장님이? 둘이 만났어?”
“네. 북부에서···굉장히 정정해지셨는데, 조만간 검성 결정전이 다시 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렌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환골 탈태의 경지에 도달한 자이파는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괴물이 되어 버렸다.
특수 훈련장으로 쓰겠다며 어지간한 섬 크기의 빙하를 썰어내는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매사에 무심한 사람이 별일이네. 그럼 검성이 다시 바뀌려나? 나비로제 님도 벼르고 계시던 것 같은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누가 등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
“하긴. 볼거리 많아진 사람들만 신나겠네.”
네메아가 큭큭거렸다.
검성 결정전은 그녀도 좋아하는 구경거리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바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부인. 조만간 대규모 지출이 한 번 있을 예정인데, 괜찮겠습니까?”
“응? 원래 당신 돈이니 상관 없기는 한데. 어디에 쓰려고?”
“별 건 아니고···그냥 그늘에 볕을 들이고 싶어서요.”
“으음?”
네메아가 갸웃거렸다.
이 또한 설명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세상에는 아직 힘든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분들을 위해서 북부에 땅을 사고 일자리를 창출할까 합니다.”
“오호. 당신답고 좋은 일이네. 그런데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괜찮겠어?”
“세크리트 교수님이 도와 주실 겁니다. 그분보다 북부에 대해 잘 아는 제국민은 없으니까요.”
세크리트는 자이파와 함께 북부에 남았다.
아직도 연구 못한 저주가 많고, 풀어야 할 증오의 매듭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는 앞으로 바렌이 보낸 파견단을 이끌며 북부에 남아 있는 음지를 개척해 나갈 터였다.
‘기적적인 타협이었죠. 하여튼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북풍단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뒤 세크리트는 극적으로 요새 아랫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그들은 북풍단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대신 수인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하며 화합하는 법을 배우게 될 터였다.
해묵은 증오를 씻어내면서.
‘동포들도 잘 지낼 거고요.’
요새에 붙잡혀 있던 수인들은 자이파가 담당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이파는 인간에 대한 증오로 미쳐 날뛰던 수인들을 일 주일도 안 되는 기간만에 계도했다.
하긴 전대 검성의 말을 누가 거스르겠냐만은.
예외적으로, 동포를 팔아먹고 북풍단과 놀아난 부류만큼은 용서 없이 숙청했다.
네메아가 말했다.
“뭐가 됐든 좋아. 자기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그런 자기를 믿으니까.”
“그리 말해주니 기쁘군요, 부인.”
“당연한 건데 뭘. 맞아, 쿠키 먹을래? 당신이 슬슬 올 것 같아서 미리 구워 놨거든.”
“세상에, 부인이 쿠키를 구웠다고요?”
“응. 외롭기도 하고 해서 몇 번인가 도전해 봤는데 역시 당신처럼은 못 만들겠더라. 그래도 열심히는 했어.”
바렌은 벙찐 채 눈만 꿈벅거렸다.
단 음식이라고는 질색을 하던 네메아가 직접 쿠키를 구울 줄이야.
그러고 보니 온 집안에 달달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주방에 다녀온 그녀가 쿠키가 든 접시를 내밀었다.
“저, 정말 제가 이걸 먹어도 됩니까?”
“당연하지. 그 고생을 하고 왔는걸.”
바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집어들었다.
확실히 모양새는 별로였지만, 열심히 만들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럼.”
와삭.
바렌이 쿠키를 베어물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 안 전체에 달콤함이 퍼졌다.
거진 두 달만에 맛보는, 달다는 감각이었다.
우물거리던 바렌이 별안간 고개를 푹 숙였다.
“커흥···흐으윽···흐륵.”
“왜, 왜 그래? 이빨이라도 부러졌어?”
네메아가 당혹성을 흘렸다.
바렌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여, 역시 내가 너무 심했나? 미안해 자기. 앞으로는 살쪘다고 구박 안 할게.”
“아닙니다···아니에요. 그냥, 그냥요···.”
바렌이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지난 두 달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입에 든 마저 삼킨 그가 갈기를 움켜쥐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어서···그렇습니다.”
바렌이 눈물을 훔쳤다.
그는 연신 훌쩍거리며 아내가 만든 쿠키를 먹어치웠다.
자이파는 단련을 위해서 앞으로 반 년 동안은 고기만 먹으라 했었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뭐야 그게.”
네메아가 픽 웃었다.
그는 덩칫값을 못하는 남편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다사다난한 다이어트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직은 따스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볕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