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61)
외전46. 가정의 수호자(5)
#A46
“크헝!”
란세가 검을 내지르자 썩은 피가 튀었다.
배에 구멍이 뚫린 언데드 표범이 쓰러졌다.
이것으로 앞장서서 몰려왔던 언데드는 모조리 처치되었다.
“엄청 드글거리네···.”
그렇다고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던 놈들만 해치웠을 뿐이지, 언데드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아 있었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
란세와 등진 채 있던 에린이 걱정스레 질문했다.
“오빠. 힘들어?”
“아니···후우, 그럴 리가.”
란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거칠어진 숨을 들이내쉴 때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딱히 다친 건 아니었지만 너무 열심히 검을 휘두른 탓이었다.
에린이 눈웃음쳤다.
“걱정 마. 에린이 오빠를 지켜줄 테니까.”
“너 정말···! 계속 까불래?”
“하지만 에린도 오빠만큼 많이 잡았는걸.”
에린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녀의 발치에는 시체가 잔뜩 깔려 있었다.
숫자도 란세가 해치운 것보다 근소하게 적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란세와는 달리 에린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많기는 하네.”
“이히히, 그치?”
에린은 뒤통수로 란세의 등을 콩콩 두드렸다.
칭찬 받을 일을 했으니 냉큼 머리를 쓰다듬으라는 뜻이었다.
란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과 에린의 실력차는 점점 좁혀지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란세도 알고 있었다.
에린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구원자, 즉 카인의 피를 더 짙게 물려받았음을 의미했다.
‘점점 따라잡히고 있어. 이게 재능의 격차라는 걸까.’
혈통에서 기인한 순수한 재능의 차이.
그 역시 필레온 무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였지만, 하늘 위에도 하늘이 있는 법이었다.
물론 란세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에린은 에린이야. 나는 나고.’
결국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아벨이 아닌 로난이었다.
자신을 똑 닮은 새카만 머리카락의.
그래서 란세는 질투를 불태우는 대신,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나를 지켜줄 필요는 없어 에린. 지켜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야.”
란세가 뒤를 곁눈질했다.
촌장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분주히 도망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저력을 본 촌장은 결국 고집을 꺾고 피난민을 이끌기로 했다.
아까보다는 거리가 벌어져 있었지만 언데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아직 더 버텨 줘야 해.
그리 중얼거린 란세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흐읍!”
란세가 기합성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참격의 궤적을 따라 검기가 쏘아졌다.
다섯 갈래로 찢어진 은백색 초승달이 망자들의 썩은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크아아악!”
“케륵!”
다리가 잘린 망자들이 넘어졌다.
진군 속도가 근소하게나마 늦춰졌다.
란세의 검기는 무예과의 동급생 중 누구보다 올곧게, 멀리 뻗어나갔다.
그의 성품을 나타내듯이.
란세는 자신의 마나가 거의 바닥날 때까지 검기를 발사했다.
“역시 오빠는 대단해.”
에린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역시 그녀는 오빠가 좋았다.
엄마를 닮은 란세는 로난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원래는 관심 없던 검을 배운 계기도 오빠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였다.
“에린도 도와줄게.”
에린이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로난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흑철검은 그녀만을 위해 조율되어 있었다.
아직 검기는 발현할 줄 모르지만 직접 가서 싸우면 될 터였다.
그녀가 막 뛰쳐나가려는 찰나.
“에린. 더 나가면 위험해.”
“엑?”
멀지 않은 곳에서 세치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덜미가 당겨진 에린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남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건.”
란세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큼직한 바윗덩이 열댓 개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쾅!
쾅!
콰앙!
바위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언데드 군단의 선두에 직격했다.
“대, 대단해!”
란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 번에 죽이는 단위수부터 차이가 났다.
방금의 폭격으로 족히 백 마리는 으깨졌을 터였다.
“이익···! 세치카 언니, 왜 방해하는 거야!”
에린이 성을 내며 세치카를 올려보았다.
세치카는 염력으로 공중에 몸을 띄운 채 원거리 공격을 하고 있었다.
아셀과 달리 호쾌한 성격의 그녀는 싸움에 염력을 활용하는 데 주저가 없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세치카가 에린을 끌어안았다.
“우웁!”
“미안해. 그런데 에린이 아무리 잘 싸워도 저 수를 감당하는 건 무리야.”
“푸하! 아, 알았으니까 이거 놧···!”
“그래, 그래. 착하지?”
숨이 막힌 에린이 바동거렸다.
그녀는 세치카의 지방 지옥(에린이 명명했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원체 힘 차이가 많이 나서 불가능했다.
한참 뒤에야 에린을 놓아 준 세치카가 란세를 돌아보았다.
“란세. 슬슬 도망가야 해. 본대에 휩쓸리면 돌이킬 수 없어.”
“그, 그래.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란세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창 에린을 부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언데드의 물결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밀려오고 있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란세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아버지나 오르세 님을 믿어야겠지. 가자, 에린.”
“응!”
에린이 동의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다.
의견을 취합한 그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려던 차였다.
“그워어어억!!”
“뭐야?!”
갑자기 언데드 쪽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세 사람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맙소사···!”
땅덩어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름드리 나무 여러 그루가 뒤엉켜, 지반과 함께 뽑혀 나온 덩어리였다.
하나가 어지간한 주택만한 것이 세치카가 던졌던 바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했다.
“저런 걸 어떻게!”
란세가 경악했다.
땅덩이의 출처를 모색하던 그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 멈췄다.
언데드 군대 중간중간에, 유별나게 큰 덩치들이 뒤섞여 있었다.
“구오오오!”
“그어어! 그어어억!”
재차 포효가 터져 나왔다.
지반을 뽑아 던지는 거인들의 정체는 시체를 엮어 만든 골렘이었다.
온 몸에 꿰맨 자국이 가득한 골렘들은 오우거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저런 병기까지 운용할 정도라니, 적의 정체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요격해!”
“으, 으응!”
하지만 놀라거나 추리에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끌어모은 란세가 검기를 쏘았다.
세치카가 발사한 보이지 않는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땅덩이가 폭발했다.
하지만 요격해야 할 덩어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안 돼.”
세치카가 탄식했다.
하나를 겨우 막았는데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착탄점은 달랐지만 원체 거대해서 무조건 휘말려 버릴 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나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막아야 해!’
그럼에도 해내야 했다.
가장 아끼는 두 사람을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꺾였다가는 고집을 부려 따라온 체면이 서지 않는다.
“크으윽···으아아···!”
정신을 집중하는 세치카의 코 아래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대마법사의 딸이다!
각오를 다진 그녀가 막 염력을 발동하려던 차였다.
“휘요오오옷!”
“아, 아벨?!”
줄곧 멀미를 호소하던 아벨이 날개를 펼치며 비상했다.
화들짝 놀란 세치카의 집중이 풀려 버렸다.
“으앗?!”
코피가 멎었다.
아벨은 순식간에 땅덩이가 날아드는 궤도까지 치솟았다.
파아아아···!
새하얀 깃털이 빛을 뿜나 싶더니,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접시처럼 넓고 둥근 역장이 펼쳐졌다.
“저건···!”
란세 남매의 눈이 커졌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반짝거리는 마나였다.
콰아아앙!
쾅!
방어막과 충돌한 땅덩이들이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꺄아아악!”
세치카가 머리를 쥐어싸맸다.
반짝이는 마나를 볼 수 없는 그녀로서는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무는커녕 흙 부스러기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뭐, 뭐지?”
“푸흐, 언니도 귀여운 면이 있네요.”
에린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세치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공격을 막아낸 것을 확인한 란세가 쾌재를 불렀다.
“잘했어, 파트너!”
“휘욧!”
아벨이 울었다.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치는 것이 나만 믿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의기양양해진 꿈새가 포즈를 잡던 와중이었다.
콰르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언데드 군단 쪽에서 울려 퍼졌다.
“휘로리릿?!”
아벨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골렘들의 포효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별안간 지평선 위로 흙먼지가 일제히 솟구쳤다.
“갑자기 무슨···!”
란세가 헛숨을 들이켰다.
땅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언데드 무리의 선두가 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레레렉!”
“캬아악!?”
언데드 군대는 속절없이 균열 아래로 추락했다.
균열은 계속해서 넓어졌고, 시체들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언데드가 갑자기 나타난 계곡 아래로 추락하게 되었다.
골렘들이 던지던 흙덩이는 모조리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그 자리에 박제된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꿈에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인지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끼어드는 거냐. 한창 좋을 때였는데.】
“조, 좋기는요. 방금 애들이 다 죽을 뻔했잖아요!”
【믿음이 부족하군. 저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쳐도 좌시할 수 없었어요. 오르세 님도 부모가 되면 생각이 바뀔 걸요?”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옮긴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 멀리 상공에 오르세와 한 사내가 떠 있었다.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은 세치카와 똑 닮은 채였다.
“아빠?!”
“아셀 삼촌!”
세치카가 경악했다.
틀림없는 아셀이었다.
로르혼의 뒤를 잇는 전대미문의 대마법사이자 그녀의 아버지.
탁!
아셀이 손가락을 튕기자 공중에 머물러 있던 땅덩어리들이 추락했다.
“크에엑!”
“거걱.”
땅덩이들은 그대로 균열 내부에 처박히며 시체들을 으깨 버렸다.
세치카가 온 힘을 다해도 들지 못한 물건을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언데드가 모두 균열 내부에 추락한 것을 확인한 아셀이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 얘들아. 여기서부터는 우리한테 맡겨!”
“어디 계시다가 지금 온 거에요?!”
“그, 그게···너희가 생각보다 강하더라구. 오르세 님이 이럴 때는 지켜보는 거라 하셔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셀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남부에 도착한 것은 한참도 더 전이었다.
그는 자식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지 않냐는 오르세의 꼬임에 넘어가 버렸다.
괜히 성이 난 세치카가 빽 소리쳤다.
“뭐야 그게! 아빠 미워!”
“미, 미안해···어쨌든 잘 됐잖아. 응? 일단 세 명 모두 뒤 돌아 서줄래?”
“뒤를 돌아요?”
“응. 눈을 다칠수도 있거든.”
아셀이 주억거렸다.
염력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세 사람을 감쌌다.
지상을 내려보던 오르세가 아가리를 벌렸다.
【이제 한계다. 더는 못 기다려.】
“윽, 열기가···!”
희번득한 이빨 사이에서는 검붉은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아셀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깃털을 곤두세운 채 벌벌 떨던 아벨이 날개를 펼쳤다.
“휘요옥!”
반구형의 역장이 세 사람을 감쌌다.
아셀의 방어막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아이들이 안전해진 것을 확인한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이에요.”
그 순간 마룡이 날숨했다.
태양이 하나 더 생긴 듯한 섬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란세가 세치카와 에린을 동시에 끌어당겼다.
“다, 다들 붙어!”
“꺄아악!”
그의 손이 두 소녀의 눈을 가리는 찰나였다.
대기가 작열하는 폭음과 함께, 오르세의 노호가 울려 퍼졌다.
【사라져라! 벌레 같은 놈들!】
한때 제국을 불살랐던 화염이 균열 위로 쏟아졌다.
불길은 아셀이 만들어낸 인공 계곡을 휘감아 돌며 안에 있는 존재들을 남김없이 집어 삼켰다.
****
어느 음침한 동굴 안.
복잡한 장치들이 늘어선 연구실.
“······뭐야?”
강령술사 키어사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데드들과의 연결이 한순간 끊어졌다.
그가 통제하고 있는 군단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이상하군. 전 병력이 일시에 소멸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없을 텐데···.”
강령술사가 된 이후로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단 하나의 개체라도 남아 있다면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추측컨데 워낙에 대규모 마법을 행하다 보니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신경망을 다시 연결해야겠군.
키어사지가 막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차였다.
“너구나. 남부에 똥을 싸지른 개새끼가.”
바로 등 뒤에서, 화가 단단히 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