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64)
외전49.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1)
#A49
“우으으으···드디어 끝났다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에르제베트가 기지개를 켰다.
거진 사흘을 지새우게 만든 연구가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어깨 위로 땋아 넘긴 검보랏빛 머리카락은 빗질이 안 된 고양이처럼 부스스했다.
연구 요약본을 훑어본 그녀가 음습한 웃음을 흘렸다.
“으히히, 이번 성과만 인정받으면 최고의 마탑은 우리 차지라구요.”
피곤함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이 연구가 제대로 인정받기만 한다면 만월 마탑은 물론이요, 로르혼이 탑주로 있는 황혼 마탑까지 실적 랭킹에서 누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떠받드는 장면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어지게 했다.
눈을 부비던 그녀가 손바닥만 한 액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잘 지내죠 언니? 보고 싶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액자에 뺨을 문댔다.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둘러싸인 액자 속에는 아데샨의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추억.
에르제베트와 팔짱을 낀 아데샨.
그리고 눈치없게 머리를 들이민 로난.
문득 로난에게 시선이 닿은 에르제베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악당 같으니.”
몇 번을 생각해도 분통이 터졌다.
아무리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지만 아데샨 언니를 채간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둘 사이에 벌써 애가 두 명이나 있고, 그 중에서 둘째 에린의 이름을 본인이 지어주었고, 로난과 아데샨의 결혼식 당시 누구보다(심지어 슐리펜보다) 많은 축의금을 낸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누구나 하나쯤은 있지 않는가.
다 알고 이해하면서도 열받는 거.
‘듣자하니 여전히 깨가 쏟아진다죠?’
심지어 얼마 전에 만난 아데샨은 셋째를 가질까 고민하고 있었다.
에린이 워낙에 반대해서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민 중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셋째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칼 든 산적과 아데샨 언니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에잇.”
얼굴이 새빨개진 에르제베트가 손가락을 튕겨 로난의 얼굴을 때렸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 나왔다.
“꺄악!”
불행하게도 액자는 보기보다 훨씬 단단했다.
에르제베트가 검지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갓 잡아올린 활어처럼 몸을 뒤틀며 고통을 호소했다.
사진 속의 로난은 여전히 엄지를 치켜든 채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크헤헤, 이 여자는 내가 귀여워해 주마!)
“이, 이런 천하의 무뢰한이···!”
에르제베트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녀의 어깨 위로 보랏빛 마나가 솟구쳤다.
도깨비불을 연상케 하는 불공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충동적으로 주문을 읊으려던 차였다.
똑똑.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리 언니. 손님이 방문하신대요.”
“히야앗?!”
불공들이 사그라졌다.
정신을 차린 에르제베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윤기를 되찾고, 날백수 같던 옷매무새가 자동으로 가다듬어졌다.
마지막으로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 놓은 그녀가 황급히 의자에 앉았다.
“으흠흠.
들어오세요.
손님이요?”
“네. 세 분이에요.”
이윽고 문이 열렸다.
에르제베트는 원래부터 이러고 있던 사람처럼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암청색 머리카락의 여인 한 명이 집무실 문간에 서 있었다.
가녀린 어깨에 걸쳐진 로브에는 여명 마탑을 상징하는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언니 이름을 정확히 부른 걸로 봐서는 지인이 아닐까 싶어요. 십 분 내로 도착한다는데, 사람을 보낼까요?”
“아니에요.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제가 직접 갈게요.”
“넹. 그럼 그렇게 전달할게요.”
여인이 눈웃음쳤다.
눈꼬리 사이로 반짝이는 벽안(碧眼)은 제국의 전대 검성과 같은 색을 띠었다.
슐리펜의 여동생인 시온 데 시니반 그랑시아.
필레온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녀는 친언니처럼 따르던 에르제베트가 있는 여명 마탑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킨 에르제베트가 눈매를 좁혔다.
“그보다 시온. 근무 시간에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내가 누누히 말했잖아요. 남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앗. 깜빡했어요. 에헤헤···.”
“정말이지···자, 제대로 다시 불러 보세요.”
“넵!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탑주님!”
시온은 군인이라도 된 것처럼 경례 자세를 취했다.
자칫하면 비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에르제베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과장된 격식이 마음에 들었다.
“우후후, 역시 좋은 울림이에요.”
에르제베트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여명 마탑의 최정상에 있는 탑주의 집무실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한 풍경.
통유리 창문 너머로는 가을빛을 받아 물결치는 여명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에르제베트를 바라보던 시온이 쿡쿡거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취임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그, 그럴 리가요···그냥 재밌는 일이 생각나서 웃은 것 뿐이에요. 어차피 차기 탑주는 저밖에 없었다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그건 맞죠. 원체 유능한 분이시니까요. 아운 필라 님도 고민 없이 자리를 넘기셨구요.”
“우후후후, 역시 뭘 좀 아는군요 시온. 제가 있는 동안에는 탑주는 무리겠지만, 탑 메이지의 자리에라도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해봐요.”
에르제베트가 다시 웃었다.
시온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참 알기 쉬운 사람이라 확신했다.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시온이 에르제베트에게 팔짱을 꼈다.
“헤헤, 그럼 같이 내려가요. 탑주님.”
“시온. 팔짱은···.”
“아이, 둘만 있을 때는 좀 봐줘요.”
시온은 그녀의 어깨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에르제베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실소했다.
원래도 자신을 잘 따르던 아이기는 했지만, 어째 시간이 갈수록 더 들러붙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승강기에 탑승했다.
“냄새가 너무 좋아요. 머릿결도 그렇고, 정말 사흘 동안 밤 새신 거 맞아요?”
“물론이죠. 탑주이기 전에 귀족이라면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
에르제베트가 새침하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임시방편으로 걸어 둔 클린 마법이 해제되면 그녀는 다시 꼬질꼬질한 고양이로 변해 버릴 터였다.
“역시 언니는 대단해요. 나랑 팀원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대단하기까지는···후후, 힘들겠지만 여명 마탑의 일원으로서 조금만 더 신경써 주세요. 맞아, 슐리펜 님은 어떻게 잘 지내나요? 듣자하니 검성이 바뀌었다는 것 같은데.”
“아후, 말도 마세요. 엊그제 본가에 다녀왔는데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니까요?”
시온이 몸을 떨었다.
간만에 본 오라버니는 훈련에 미친 괴물이 되어 있었다.
검성 결정전이 끝난 뒤로, 그랑시아 저택에 회오리바람이 멎은 날이 없었다.
“이릴 언니랑 아리아한테 투자하는 시간 말고는 모조리 훈련에 쏟아 붓고 있어요. 결투에서 진 게 어지간히도 분했던 거겠죠.”
“슐리펜 님도 참···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시간을 베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에르제베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슐리펜은 젊어져서 돌아온 나비로제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필레온에서부터 자존심과 호승심이 굉장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쯤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아···맞아요. 오빠가 그렇게 밀리는 건 처음 봤어요. 문제는 이번 시합에 자이파 님은 출전도 하지 않으셨다는 거죠. 그분도 환골 탈태를 하신 걸로 아는데.”
“맞아. 그랬었죠? 그럼 조만간 검성이 또 바뀔 수도 있겠네요.”
“네에. 어쩌면 다음 결정전에서는 준우승도 못 할지도 몰라요. 제발 자기 몸은 챙기고 살았으면···그래도 이릴 언니가 있어서 이상한 짓은 안 할것 같지만요.”
“공작부인께서도 무탈하시죠?”
“이릴 언니는 언제나 생글생글 햇님이죠. 오빠를 욕하는 건 아니지만, 그 목석이 이릴 언니 같은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꼬셨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시온이 큭큭거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릴은 그 완벽한 표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그 딸은 슐리펜을 보고 우울해졌던 시온을 상냥하게 보듬어 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와중, 승강기가 멈춰섰다.
“아, 도착했다.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요. 후후. 저의 여명 마탑···.”
시온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에르제베트가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문이 열리고, 드넓은 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탑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탑주님!”
로비에는 태양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를 알아본 마법사들이 인사를 보냈다.
연달아 울려 퍼지는 탑주라는 단어에 그녀의 어깨가 하늘까지 솟구쳤다.
“으흠! 좋은 아침이에요. 다들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요?”
“네. 탑주님. 아운 필라 님의 프로미넌스 버드가 조만간 개량을 마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적은 마나를 소모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그거 잘 됐네요. 결과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할 테니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도서관에도 문제 없습니다. 아이레 양은 금서고로 순찰 나갔고요.”
“고마워요. 삼대 금서는 더 신경써서 확인해 주세요. 바쥬라도 복사본이라고 방심하지 말고요.”
에르제베트는 로비를 가로지르는 내내 사람들을 격려했다.
시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냉정하고 엄격한 척을 해봐도 사람이 타고난 선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낸시.”
“그르릉!”
에르제베트는 여명 마탑에서 기르는 샐러맨더 낸시에게까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불공을 하나 만들어 던지자, 낸시는 멋지게 머리를 들며 그것을 받아 먹었다.
어느덧 탑 입구에 도달한 여인들이 멈춰섰다.
못 보던 외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 명 전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행색으로 보아 시온이 말한 손님이 확실한 것 같았다.
에르제베트가 인사했다.
“여명 마탑주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에요. 저를 찾아오셨다면서요?”
“오오! 에르제베트 양!”
예상치 못하게 호탕한 답사가 돌아왔다.
제일 덩치가 큰 사람이 로브를 들췄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
근육 우락부락한 거한의 등에는 거대한 방패가 메어져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브라움 씨? 이게 얼마만이에요?”
“와하하! 에르제베트 양은 여전히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군. 그간 잘 지냈나?”
거한이 껄껄 웃었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동창생인 브라움이었다.
북부로 가서 무슨 기사가 되었다 들었는데 근황을 교환한 것은 한참 전이었다.
“저, 저야 잘 지냈는데 왜 여기까지···나머지 두 분은 누구시죠? 왜 로브로 얼굴을 꽁꽁 싸매시고···.”
“아아, 나는 덩달아 쓴 거지만 이 두 사람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거든. 다들 그쪽도 아는 사람일 거야. 슬슬 부끄럼 그만 타고 얼굴 좀 보여주게나.”
체형을 보아 한 명은 여자였다.
다른 한 명은 키가 너무 작은 것이 어린아이로 추측되었다.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후드를 젖혔다.
“그래 좋아. 안녕. 에르제베트.”
“여기는 영 불편하군. 밤을 태우는 자들이 모여 있어.”
“오, 오필리아 양? 옆의 분은···!”
에르제베트가 얼어붙었다.
여자 쪽은 브라움과 마찬가지로 동창인 오필리아.
다른 한 명은 곱상하고 창백한 남자애였다.
피부가 너무 하얗다 못해 핏줄이 비칠 지경이었는데, 예전에 한번 본 얼굴이었다.
“왜 당신이···!”
여명 마탑까지 행차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런 거물이 왜?
그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시온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와아아, 귀여워라. 꼬마 손님은 누구세요?”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인간 암컷.】
“히에에엑?!”
낮고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시온은 불에 데인 것처럼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달라진 아이의 목소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의 정체는 한때 밤의 세계를 지배하던 자였으니까.
에르제베트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림자 대공께서···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그래. 태양을 다루는 마법사야.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본론이라니, 그게 무슨···?”
“사실 별 건 아니다.”
에르제베트가 말을 더듬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림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저, 나를 죽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