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68)
외전53.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5)
#A53
구원자 카인은 살아생전 세 권의 마법서를 집필했다.
파괴의 바쥬라.
지혜의 레란트.
조화의 블뢰어.
당연하게도 세 권은 모두 전무후무한 명저로 여겨졌다.
흉악한 난이도와 자아를 갖춘 책이라는 진입장벽이 존재했지만, 글쓴이가 태고적부터 살아온 현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은 위대한 영웅이 되거나 전대미문의 괴물이 되는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아셀과 엘시아가 그러했듯이.
그 세 권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파괴의 바쥬라였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요. 저는 바쥬라에 대공님을 봉인할 거에요. 여러분께서도 도와 주셔야 가능한 일이에요.”
에르제베트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두껍고 시커먼 책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염력으로 슬쩍해온 파괴의 바쥬라였다.
발치에는 레란트까지 놓여 있었는데, 오필리아와 브라움이 도와준 덕에 대공보다 먼저 채오는 것이 가능했다.
“바쥬라에? 그게 가능해···?”
오필리아가 갸웃거렸다.
파괴의 바쥬라는 기본적으로 마법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서적이었다.
그걸 봉인할 때 쓰다니,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네. 바쥬라는 마법서로서도 훌륭하지만 봉인의 매개체로 삼기에도 더할 나위 없거든요. 겨울의 마녀······그러니까 최고위 냉기 정령 이진느가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 그랬었지.”
오필리아는 납득한 듯 눈썹을 으쓱였다.
겨울의 마녀는 바쥬라의 페이지 중 하나에 갇혀서 아셀의 스승 노릇을 했었다.
로난에게 썰려서 약화된 상태기는 했었지만, 최고위 정령을 수십 년간 봉인했던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때마침 지금 바쥬라는 텅 비어 있어요.
기존의 사악한 인격은 로난 님이 소멸시켰고, 겨울의 마녀는 떠났죠.
대공님을 수용하기에는 충분할 거에요.”
“좋은 것 같아. 봉인이라면 일단은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나도 찬성일세! 이런 곳에서 죽기에는 너무 못 해본게 많거든!”
브라움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그는 오러로 방어막을 펼치며 나머지 두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대공의 그림자가 맹공을 퍼붓고 있었지만 브라움은 꿋꿋하게 방어에 임했다.
에르제베트가 바쥬라의 표지 위에 손을 올렸다.
“좋아요. 봉인 주문은 제가 알아요. 주문을 읊을 동안 두 분은 시간을 끌어주세요. 이번에 남은 마력을 전부 쓸 거라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생각해 주세요.”
“응. 그럴게.”
“후하하! 그거야말로 내 전문이지! 건투를 비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부탁임에도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다.
에르제베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오필리아와 브라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두 분. 일이 무사히 끝나면 반드시 사례할게요.”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귀족의 예법대로 행해진 인사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했다.
미소를 지어 보인 오필리아와 브라움이 몸을 돌렸다.
“그러지 마 에르제베트. 애초에 내가 벌인 일인걸.”
“와하하! 이 정도는 친구끼리 당연한 거지! 그럼 가겠네!!”
에르제베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브라움이 도약했다.
천장까지 솟구친 거구는 가파른 직선을 그리며 대공을 향해 낙하했다.
“여기다! 이 괴물아!”
힘찬 함성이 도서관에 메아리쳤다.
오러를 머금은 대방패가 어둠 위로 내리찍혔다.
빙하가 부서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대공의 몸이 출렁거렸다.
【크아아오!】
“이제 그만해. 요제프.”
곧이어 오필리아의 혈마법이 발현되었다.
선홍색 가시 수백 개가 천장과 바닥을 찢으며 솟아올랐다.
하나의 크기가 건물의 기둥만 한 가시는 전부 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시들은 성난 말벌처럼 대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구오오!】
가시 하나가 박힐 때마다 어둠이 요동쳤다.
오필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서는 더이상 대공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없다.
“후우우우…갑니다.”
심호흡하던 에르제베트가 바쥬라를 펼쳤다.
검은 책이 아가리를 벌리며 검게 물든 속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제베트가 주문을 읊는 순간, 헤아릴 수 없이 막대한 마나가 종이 위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크윽…크으으으…!”
에르제베트가 신음했다.
금서의 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난폭한 마나였다.
뇌를 술통에 넣고 언덕에서 굴리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우습구나.감히 너 따위의 기량으로 나를 감당하려 하느냐?] [분수를 모르는 범재야. 메이지 아셀이라면 모를까, 네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너는 시온이라는 계집을 친동생처럼 아끼지. 과연 그 년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 년은 그랑시아의 지령을 받아 너를 이용하는 거다.]머릿속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쥬라에 각인된 괴심 마법이었다.
인격은 사라졌을지언정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악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닥…쳐.”
에르제베트가 이를 악물었다.
환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스러웠다.
건네져 오는 질문은 적어도 한 번씩은 자신이 품어 본 의심이었다.
“감히 내 동생을…입에 담지 마.”
하지만 그녀는 이겨냈다.
자신의 재능은 몰라도 시온을 욕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으드득!
입 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환청이 사라졌다.
“흐으읍…!”
고개를 똑바로 든 에르제베트가 봉인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장송곡을 연상케 하는 가락이 울려 퍼졌다.
펼쳐진 바쥬라의 페이지 위로 검은 빛이 새나왔다.
【구오오오?!】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팽배한 어둠이 바쥬라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치 배수구를 통해 물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드는 듯한 광경이었다.
브라움이 쾌재를 불렀다.
“오오! 역시!”
“그림자 대공. 당신을 봉인하겠습니다.”
전세가 뒤집혔지만 에르제베트는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쥬라가 대공의 몸을 절반 정도 흡수했을 무렵이었다.
“에, 에리 언니! 도와줘!”
“뭐?”
갑자기 어디선가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 에르제베트의 집중이 깨졌다.
시선을 옮긴 그녀가 얼어붙었다.
분명히 도망쳤던 시온이 그림자 깊숙한 곳에 속박당해 있었다.
“시, 시온?!”
“안 돼, 에르제베트! 가짜야!”
오필리아가 소리쳤다.
헛숨을 들이킨 에르제베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시온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치명적인 불찰이었다.
에르제베트가 다시 주문에 집중하려던 차였다.
콰아아아아!!
잠깐이나마 자유를 되찾았던 어둠이 폭발하듯 팽창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도서관 전체가 어둠으로 뒤덮이기까지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두 여인을 돌아본 브라움이 절규했다.
“아가씨들!”
검은 눈사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브라움은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오필리아를 품에 끌어안은 그가 에르제베트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컥.”
어둠 속에서 솟구친 촉수 하나가 에르제베트에게 직격했다.
“안 돼!!”
브라움이 비명을 질렀다.
봉인 주문이 멈췄다.
에르제베트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이…런….”
그림자로 이루어진 촉수가 자신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별안간 촉수의 윗면이 벌어지며 사람의 입이 나타났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 하다.】
“······!”
에르제베트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었다.
쥐어짜내는 듯한 음성은 진작에 인격이 사멸한 줄 알았던 대공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구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엄청난 희소식이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 악···!”
에르제베트의 입꼬리를 타고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정체되어 있던 통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에르제베트!!”
“에르……!”
오필리아와 브라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촉수가 몸에서 뽑히자 주먹만한 구멍이 드러났다.
천천히 기울던 에르제베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책을 적시고 있었다.
****
“…핫!”
에르제베트가 눈을 떴다.
사방이 새하얀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머리를 쥐어싸맸다.
“여, 여기는…?”
촉수에 꿰뚫린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가 모호했다.
황급히 만져본 배에는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
뭐지?
내가 죽은 건가?
공포에 휩싸인 에르제베트가 어리둥절하던 와중이었다.
“예쁜 아가씨네. 일단 얼굴은 합격이야.”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에르제베트는 온몸에 소름이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는 목소리였다.
그것도 몹시 그리운.
돌아선 에르제베트가 돌처럼 굳었다.
“아, 아데샨 언니?!”
“후후.”
아데샨이 자신과 마주보고 있었다.
늘씬하게 큰 키와높은 콧대.
침이 절로 흘러나올 것 같은 골반까지 똑같았다.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회색을 띠어야 할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가 아니네요. 누구죠?”
“글쎄? 맞춰봐.”
아데샨이.
정확히는 아데샨의 모습을 취한 무언가가 눈웃음쳤다.
불현듯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이 에르제베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배로 깔고 넘어진 새하얀 책.
바쥬라의 옆에 놓여 있었던 또 하나의 금서.에르제베트가 입을 뗐다.
“레란트.”
“정답. 반가워 아가씨.”
레란트가 키득거렸다.
찰랑거리는 백발이 요사스러웠다.
살가운 인사에도 불구하고 에르제베트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세상에.”
카인의 금서 중 하나가 자신의 앞에 현현해 있었다.
무궁한 지혜를 전해준다 알려진 책.
바쥬라만큼은 아니었지만, 무구히 많은 마법사를 미치게 만든 금서였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은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된 거죠? 죽은 건가요?”
“아직은 아니야.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곧 죽겠지만. 여기는 내가 잠깐 만들어낸 세계야. 면접을 위해서.”
“면접?”
“그래. 사람이 책을 가려 읽는 것처럼 나도 독자를 가리거든. 아가씨가 이 레란트의 독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가늠해 봐야지.”
레란트가 다가왔다.
아데샨처럼 기다란 손가락이 에르제베트의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어요! 얼른 내보내 주세요!”
“시끄러워. 다 죽어가는 아가씨.”
갑자기 레란트가 손짓했다.
에르제베트가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레란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분고분하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지난 천 년 동안 엘시아 말고 통과한 사람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