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70)
외전55.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7)
#A55
【캬하아아악! 카학!】
대공이 괴성을 토했다.
격한 몸짓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금빛 화염에 닿은 어둠은 재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해 버렸다.
이윽고 섬광이 가라앉았다.
익숙한 윤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보라색 머리카락.
도도한 눈빛과 반듯하게 세운 등허리.
브라움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에르제베트? 맞나···?”
“······나도 잘 모르겠어.”
오필리아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에르제베트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훨씬 더 성숙해 보인달까.
어깨 위로 피어나는 마나의 결 자체가 변해 있었다.
배에 뚫렸던 구멍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탑주님! 괜찮으세요?!”
그때 아이레가 천장을 뚫으며 나타났다.
시온의 도움 요청이 무사히 전달된 모양이었다.
반투명한 몸은 그녀의 본모습인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맙소사···!”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레의 털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끈적한 어둠이 도서관을 뒤덮고 있었다.
수백 권의 금서와 더불어 바쥬라까지 흡수한 대공의 몸은 석유처럼 끓어오르며 팽창하는 중이었다.
“와줬군요. 아이레.”
“타, 탑주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은데···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 저 두 분을 바깥으로 내보내 주세요.”
“아아, 네!”
에르제베트의 시선은 친구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이레는 그렇게 했다.
바람처럼 날아든 그녀는 브라움과 오필리아를 입으로 물어서 자신의 등에 올려 놓았다.
두 사람의 부상을 본 에르제베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나는 아직 괜찮아 에르제베트. 도와줄게.”
“아니에요. 당신은 브라움 님을 치료해 주세요. 대공님은 제가 혼자 맡겠어요.”
“그런···.”
뭐라 말하려던 오필리아가 멈칫거렸다.
에르제베트의 눈동자는 강렬한 결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뜨겁게.
저런 각오를 한 사람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알았어. 너한테 맡길게.”
“고마워요.”
“죽지 마. 에르제베트.”
친구를 믿기로 결심한 오필리아가 등을 돌렸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껄떡이는 브라움의 치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르제베트가 말했다.
“아이레. 마탑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 그건 방금 확인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내보냈어요.”
“고마워요.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사서의 권한으로, 도서관의 책을 모조리 대피소로 치워 주세요.”
“저, 전부 다요?!”
아이레의 눈이 커졌다.
여명 마탑의 유일한 사서인 그녀는 모든 장서를 이동시킬 권한과 능력이 있었다.
실제로 몇 번이고 책을 옮겨본 적이 있었지만, 모든 장서를 한 번에 이동시키는 것은 마탑이 세워진 이래 전례가 없던 주문이었다.
물론 반박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즉시.”
“당신을 믿어요.”
탑주는 배의 선장과 같다.
선장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주억거린 아이레가 다시 천장 속으로 사라졌다.
대공의 촉수들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바닥에서 치솟은 화염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구옷!】
“소용없어요.”
그림자는 이번에도 불의 장벽을 뚫지 못한 채 소멸해 버렸다.
이제 도서관에 남겨진 것은 에르제베트와 그림자 대공 뿐이었다.
격분한 대공은 미친 듯이 날뛰며 그녀를 공격했다.
【구오오오오오!】
어둠이 휘몰아쳤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쏟아지는 그림자의 가시는 검은 해일을 연상케 했다.
사이사이 드러난 수천 개의 눈동자가 붉은 안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제베트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건 좋은 마법이네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 아홉 개가 그녀를 중심으로 고속 회전하고 있었다.
궤도는 전부 달랐다.
어떤 치명적인 공격도 화염의 고리를 돌파하지 못했다.
천체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은 마법은 에르제베트와 레란트가 조금 전 공동으로 창안해낸 것이었다.
[역시 우리 에리야. 배우는 게 빠르다니까.]머릿속에서 레란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에리라 부르냐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는 없었다.
대공을 똑바로 마주보고 선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대공님. 거기 계시죠?”
【키야아악!】
메아리치듯 포효가 돌아왔다.
이성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제베트는 저 어둠 깊숙이 대공의 자아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있죠 대공님. 저는 재미없는 농담이 싫어요. 부조리한 일을 겪는 것만큼이나요. 그런데 지금 대공님에게 벌어진 일은 부조리한데 재미까지 없는 농담이에요.”
그것도 매우 끔찍한 농담이었다.
세상을 구하는 데 헌신한 영웅이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리는 걸로 모자라 이성을 잃은 괴물로 변해 버리다니.
괴물로 변한 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려 들다니.
···결국에는 그들의 손에 죽어야 한다니.
“여기까지 해요. 발자크에 이어서 대공님까지 떠나면 오필리아 님이 정말 혼자가 되어 버리잖아요. 친구로서, 의뢰를 맡은 입장으로서 그런 일, 용납할 수 없어요.”
에르제베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을 회전하던 불덩이들이 폭발적으로 궤도를 넓혔다.
일대의 어둠이 위축, 소멸하며 널찍한 공간이 확보되었다.
진리의 편린을 엿본 마법사의 심장은 레란트와 공명하며 어마어마한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여명 마탑의 주인이 으르렁거렸다.
“저는, 당신을 구할 거에요.”
【쿠오오오오!】
위축되었던 어둠이 달려들었다.
에르제베트가 오른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대공을 휘감아 움켜쥐었다.
곳곳에 엉겨붙어 있던 그림자가 벽과 바닥에서 뽑혀 나왔다.
“흐으으읍…!”
에르제베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면과 분리된 대공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검게 맥동치는 덩어리는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쾅!!!
기어코 천장과 충돌한 덩어리가 반죽처럼 펼쳐졌다.
【크라아악?!】
거칠다 못해 흉폭한 염력이었다.
에르제베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왼손을 움직이자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금빛으로 이글거리는 문양은 도서관 바닥을 대부분 뒤덮고 있었다.
대공이 발악하듯 촉수를 뻗으려던 찰나.
“하아아아압!!”
에르제베트가 왼팔을 쳐들었다.
마법진의 빛이 더해졌다.
황금색 화염의 격류가 기하학적인 문양을 찢으며 솟구쳐 올랐다.
대공이 불길에 휩싸였다.
【캬오오옥···!】
대공이 비명을 내질렀다.
태양의 힘을 머금은 불 속에서 그의 몸은 속절없이 타들어갔다.
안간힘을 다해 벗어나려 해봤지만 에르제베트의 염력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작렬하는 화염이 어둠의 절반 가량을 불살랐을 무렵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균열이 늘어나던 천장이 푹 꺼지며 폭발이 일어났다.
“날아가라!!”
에르제베트가 외쳤다.
붉은 꼬리를 끌며 솟구치던 대공이 1층 로비 바닥과 충돌했다.
특수 광물로 제작된 타일이 무참하게 박살났다.
쾅!
쾅!
쾅!
쾅!
쾅!
다시 천장을 부숴버린 대공은 이어서 2층과 3층. 4층까지 꿰뚫어 버렸다.
다섯 개의 층을 합친 도서관을 관통하는 와중에도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장서는 아이레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은 뒤였다.
【그오…오오옷!】
대공은 계속해서 치솟았다.
층 하나를 부술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펄쳐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정상에 다다른 그는 기어코 탑주의 방까지 박살내며 여명 마탑의 정수리로 빠져 나왔다.
정체되어 있던 화염의 빛이 사방에 쏟아졌다.
“저, 저게 뭐야!?”
“탑주님의 불이다!”
아래 모여 있던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해가 저문 뒤라서 훨씬 더 잘 보였다.
여명 마탑을 수직으로 관통했음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나 착각할 정도로 찬란한 빛이 펼쳐졌다.
밤하늘을 향해 치솟는 대공의 모습은 꼭 행성이 쏘아올린 성화 같았다.
에르제베트는 바로 아래에서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언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이 입을 틀어막았다.
대공과 에르제베트는 어느새 성층권에 이르렀다.
발아래 저 멀리서 대지와 구름, 대양이 뒤섞이고 있었다.
여명 마탑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자 별의 완만한 가장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하아…!”
에르제베트가 코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레란트에게 받아온 마나를 거의 다 쓰고 말았다.
[아주 화끈한데 아가씨…후우, 이 정도로 막 가져갈 줄이야.]레란트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마법사와 계약을 해버린 것 같았다.
호흡을 고른 에르제베트가 대공을 마주보았다.
드디어 상승을 멈춘 그는 신체의 대부분을 소실한 채였다.
【마…법사.】
덩어리 위로 드러난 소년의 상반신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비대해졌던 어둠은 거의 다 사라진 채였다.
대공의 죽어가는 육신과 바쥬라만이 중심부에 남아 피와 그림자를 토해내고 있었다.
“후우우…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대공님.”
【나를…죽여라…이미, 늦었…다.】
“아 진짜, 그러면 제가 고생한게 뭐가 돼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에르제베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안쓰러우면서도 열이 올랐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아무도 안 죽으니까.”
【그게, 무슨….】
에르제베트는 대답하는 대신 어떤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다물려 있던 바쥬라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대공의 눈이 커졌다.
【이건…】
노랫말같은 주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중간에 끊어지지 않았다.
바쥬라의 아가리가 닫히는 순간 소년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졌다.
“대신, 다음부터는 대공님 의뢰 절대 안 맡을 거에요.”
바쥬라가 옆으로 치워졌다.
에르제베트가 소년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아득히 높은 별의 가장자리에서 새벽의 빛이 터져 나왔다.
****
“…….아.”
“어, 언니! 정신이 들어요?!”
에르제베트가 눈을 떴다.
몽롱한 것이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시온이 눈에 들어왔다.
“…시온.”
“으아아아앙! 언니이!”
에르제베트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시온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검푸른 눈동자는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어떻게 된 거죠?”
“그림자 대공님을 처치한 직후에 정신을 잃고 추락했어요. 아이레랑 제가 날아가서 받았어요.”
“아…기억이 날 것 같기도….
새하얀 침대와 인테리어를 보하니 여명 마탑의 부속 병원인 것 같았다.
에르제베트가 이마를 짚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그녀는 바쥬라를 뽑아 내고 남아 있는 대공의 어둠을 불살랐다.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만….
“대, 대공님은요!? 무사히 꺼내졌나요?”
“꺅!”
에르제베트가 튕기듯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화들짝 놀란 시온이 비명을 질렀다.
가슴을 쓸어 내린 그녀가 뭐라 설명하려던 찰나, 병실의 문이 열렸다.
“무사하셔. 덕분에.”
“와하하! 역대 최고의 탑주께서 생환하셨군!”
“두 분……!”
에르제베트가 눈썹을 치켜떴다.
웃으면서 걸어들어온 것은 오필리아와 브라움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오필리아의 손에는 어디서 많이 본 시커먼 책이 쥐어져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앞에 멈추선 그녀가 바쥬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무사했군. 에르제베트.】
“대공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제베트가 헛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장에는 정말 더럽게 못 그린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입 사이로 삐져나온 송곳니로 보아 흡혈귀나 뭐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그림자 대공님을.
가만히 그림을 응시하던 에르제베트가 어깨를 들썩였다.
“푸흡.”
【그만.】
“푸흐..푸흐흐흐…오필리아 님이 그린 거에요?”
“응. 닮았지?”
【그만하라고 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본인이 보기에는 썩 괜찮은 작품인 듯했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대공이 으르렁거렸다.
【너희들이 기어코 재앙을 부르는구나. 지금은 내가 이 꼴이지만 십 년만 지나봐라. 반드시 원래의 몸을 되찾아서…】
“대공님.”
【음?】
“살아계서서 기뻐요.”
에르제베트가 웃었다.
대공의 으르렁거림이 멎었다.
종이 귀퉁이가 아주 약간 접혔다 펴졌다.
【……고맙다.】
“이제 건강하게 사세요. 후우, 성공해서 천만다행이네.”
에르제베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상처가 도져 죽을 일은 없으리라.
오필리아의 간호를 받으며 힘을 키운다면 금방 원래 입지를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대공의 영혼을 뽑아 바쥬라에 봉인했다.
폭주한 육신을 봉인하려던 작전을 뒤집은 역발상이었다.
시온이 손뼉을 쳤다.
“아, 금서들은 전부 무사해요.
바쥬라에 삼켜져 있어서 금방 꺼낼 수 있었어요.
도서관만 수리를 마치면 아이레가 제자리에 돌려 놓을 거에요.”
“그거 잘 됐네요. 다친 사람도 없죠?”
“네. 아무도요···그런데 저, 딱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음? 뭐죠?”
“저 여자. 도대체 누구에요?”
도끼눈을 치켜뜬 시온이 병실 구석을 가리켰다.
새하얀 머리카락의 여인이 다리를 꼰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아데샨을 닮았지만 아데샨은 아니었다.
본체인 하얀 책은 에르제베트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대장군님이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듣자하니까 언니랑 키,키스까지 한 사이라는데…거짓말이죠? 하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아…쓸데없는 소리를 하다니···.”
에르제베트가 탄식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더 문제였다.
이럴 때는 유야무야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인사하세요 시온. 지혜의 레란트랍니다.”
“레, 레란트?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고요?!”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귀여운 아가씨.”
레란트가 키득거렸다.
보아하니 기절했을 때 둘이서 이미 대화를 나눈 듯했다.
시온이 머리를 쥐어싸맸다.
“그, 그럼 키스한 것도 진짜?! 싫어…그런 건…!”
“고작 입맞춤 가지고 뭘 그래? 아가씨도 해줄까?”
“캬아아악! 가까이 오지 마세요!”
시온이 하악질했다.
이를 드러내며 에르제베트에게 들러붙는 것이 꼭 놀란 고양이 같았다.
“언니!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관계를 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바쥬라처럼 나중에는 속내를 드러내고 언니를 삼키려 할 게 뻔하다구요!”
“어머, 나를 그렇게 보다니 서운한데. 에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시, 시끄러워요!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에리라 부르는 거에요? 그 별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여명 마탑에 저밖에 없거든요!?”
“…….아. 머리 아파.”
에르제베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마르바스의 시장바닥도 이거보다는 정숙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친 와중에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밀린 업무가 산더미네. 마탑도 복구해야 하고···책도 다시 옮겨 놔야 하고···.’
앞으로 수습할 일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차였다.
오필리아가 품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맞아. 깜빡하고 못 말했는데, 아데샨이 너한테 편지 보냈어.”
“뭐, 뭐라구요?!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요?”
“워낙에 정신이 없었잖아. 지금은 피곤할 텐데, 나중에 줄까?”
“무슨 소리! 당장 이리 주세요!”
에르제베트가 편지를 잡아챘다.
귀부인을 터는 강도만큼이나 적극적인 몸짓이었다.
극도로 조심하며 봉투를 뜯자 아데샨이 손수 쓴 편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아…본인도 군대 일로 바쁠텐데 이렇게 친절하게 편지까지 써 주시다니…역시 저한테는 언니밖에 없다니까요···!”
“뭐라고 써 있는데?”
“우리 에린이 반장이 됐대요! 장하기도 하지. 역시 내가 이름을 지어 준 아이라니까!”
“…그냥 안부 편지였구나. 반응이 극적이라 오해했어.”
오필리아가 헛웃음쳤다.
반응만 보면 아데샨이 무슨 대륙 통일이라도 시킨 줄 알았다.
에르제베트는 곧바로 답장을 쓰기로 했다.
“으음…그러니까…”
아이레에게 편지지를 받은 그녀가 침음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간만에 만난 옛 친구들?
그림자 대공의 부탁과 폭주?
탑주가 되어서 직접 여명 마탑을 박살낸 일?
그것도 아니면 레란트와의 계약?
“아이, 참.”
너무 적을 거리가 많아도 문제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첫 문장을 끄적였다.
– 친애하는 아데샨 언니에게.
[언니. 저희는 다 잘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