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71)
외전56. 검과 별(1)
#A56
“허억···헉, 빌어먹을···!”
보름달이 밝았다.
검기를 뿌리고 물러선 백발 노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침해가 밝아올 무렵 시작된 결투는 만월 휘영청한 밤이 되었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새하얀 도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참으로 놀랍구나. 내가 이토록 밀릴 줄이야!’
장도(長刀)를 움켜쥔 왼손이 떨려오고 있었다.
내력을 거의 다 소진한 탓이었다.
싸움터 삼은 숲은 이미 공터로 변한 뒤였다.
주변에서는 다섯 개의 회오리바람이 승천하는 용처럼 몸을 뒤틀고 있었다.
칠십하고도 다섯 해.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무림을 헤매며 산전수전을 겪어왔으나 이런 강적수는 처음이었다.
불현듯, 노인이 검기를 발사했던 자리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하실 겁니까.”
“이럴 줄 알았다. 괴물 같은 놈.”
노인이 헛웃음쳤다.
회오리가 사라지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실날같은 희망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안광을 보는 순간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머지않아 안광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려한 얼굴과 검푸른 머리카락.
바람에 펄럭이는 이국적인 제복.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가 말을 이었다.
“패배를 인정하신다면 검을 거두겠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노련한 검사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시건방지기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다 이거냐?”
“그렇습니다.”
“···하하, 천하는 참으로 넓구나, 아직도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남아 있었다니!”
별안간 노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승리를 긍정하는 슐리펜의 얼굴에서는 어떤 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슐리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보다 강한 자도 많습니다. 확실히 더 강한 것만 두 명이니.”
“그게 사실이라면 참 절망적이군. 어쨌든 여기까지만 하자. 노부로서는 너를 이길 수 없다.”
“그러지요. 승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슐리펜이 고개를 숙였다.
전의를 상실한 상대와는 싸울 이유가 없었다.
검을 집어넣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승부가 끝났으면 서로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동서양 공통의 예절이었다.
슐리펜이 포권하기 위해 오른손을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놈! 방심했구나!”
노인이 기합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손에 이끌려 나온 장도가 붉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
“노부를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이지, 감히 생사결에서 자비를 논하느냐?!”
노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매의 급강하를 연상케 하는 찌르기가 슐리펜의 목젖을 꿰뚫었다.
남아 있던 내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일격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는 찰나.
“···허?”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공에 머무르는 도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슐리펜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곱게 피어난 달맞이꽃 몇 송이만이 발치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방심한 적이 없습니다. 노련한 검사여.”
“뭣이···!”
대답은 뒤에서 돌아왔다.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슐리펜의 모습은 노인의 도신에 엇비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절반 정도가 바람으로 변한 검신에는 붉은 피가 붇어 있었다.
슐리펜이 묵묵히 납도하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몸 속을 헤집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노인을 덮쳤다.
“하하···참으로 그렇군. 마음가짐마저 훌륭하구나.”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아니. 명예롭게 매듭을 지어 줘서 고맙다. 내 너를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노인이 클클거렸다.
밤바람이 불어왔다.
다시 한 번 달맞이꽃이 흔들렸다.
가만히 웃음을 흘리던 노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노인의 몸뚱어리는 몇 초를 더 서 있다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주변에 잡초가 무성해서 쓰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슐리펜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는 닿을 수 없다.”
장장 하루 동안 이어졌던 승부가 결착이 났음에도 그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백산파(白山派)의 장로였던 노인은 제법 강한 상대였지만 성장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불현듯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검성 결정전에서 나비로제에게 당한 자리였다.
기어코 최강의 자리를 되찾은 여인.
늦은 봄을 맞이한 스승은 압도적인 그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선사했다.
– 위에서 기다리겠다. 슐리펜.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슐리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는 결코 나비로제가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없었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새나왔다.
“···나는 올라갈 거다.”
슐리펜은 노인의 무덤을 만들어 준 뒤 자리를 떴다.
그가 애용하던 장도는 묘비가 되어 땅에 꽂혔다.
축축한 달빛이 돌아가는 남자의 앞길을 비추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오셨습니까. 가주님.”
정복을 입은 중년인이 예를 표했다.
그랑시아 저택의 관리를 총괄하는 집사장이었다.
그의 앞에는 거진 한 달에 걸친 수련을 마치고 온 슐리펜이 서 있었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주인을 맞이했다.
“머나먼 동방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원하는 바는 이루셨는지요.”
“별 소득은 없었소. 받으시오.”
“엇, 이건···?”
슐리펜은 비단으로 감싸진 보따리를 내밀었다.
집사장이 갸웃거렸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포장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슐리펜이 말했다.
“옥을 다루는 기술은 동방이 더 낫더군. 괜찮아 보이는 걸로 넣었으니 다른 이들과 나눠서 가지시오.”
“또 이런 은혜를···! 정말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니 괘념치 마시오. 부인과 아리아는?”
“두 분 다 저택에 계십니다. 사모님께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계시더군요.”
“잘됐군.”
슐리펜이 끄덕였다.
착잡하다가도 두 사람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차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헤헤, 압빠!”
“아리아.”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쪼르르 달려왔다.
문을 닫은 슐리펜이 미소지었다.
그와 이릴의 딸인 아리아였다.
병정놀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오른손에는 작은 목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슐리펜이 사랑스러운 딸을 안기 위해 두 팔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받아라! 폭뿡검!”
달려오던 아리아가 목검을 휘둘렀다.
나무로 만들어진 검신은 푸른 바람에 휘감긴 채였다.
슬슬 봉우리를 틔워가는 아리아의 오러였다.
슐리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폭풍검이겠지.”
그는 검을 뽑지 않고 칼집만 슬쩍 앞으로 들어올렸다.
딱!
드럼을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당연하게도 칼집에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히엑! 어떻게 막은 거야!?”
“바람이 너무 미약하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오러보다는 기본기를 더 신경쓰는 게 좋겠어.”
“히잉···열심히 연습했는데···.”
목검을 내린 아리아가 훌쩍거렸다.
큼직한 눈망울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아빠에게 보여주려고 하루종일 훈련했는데도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슐리펜이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래도 훌륭했다. 나이치고는 믿을 수 없는 성취야.”
“훌쩍, 킁!···정말?”
“그럼. 아빠보다 우리 아리아가 낫구나.”
슐리펜은 조용히 아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그녀가 슐리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 이제 집에 있으면 안 돼?”
“음?”
“요즘 맨날 나가 있잖아. 나 심심해.”
“엄마는 계속 집에 있잖니.”
“아빠도 있으면 좋겠어. 엄마는 칼싸움 못 하잖아.”
코맹맹이가 된 아리아가 웅얼거렸다.
슐리펜은 너희 엄마가 나보다 더 검을 잘 다룰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대화의 논점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돌이켜 보니 검성 결정전에서 패배한 이후 집에 들어온 날이 드물었다.
침묵하던 슐리펜이 뭐라 답해주려던 차였다.
“아리아 공주님~밥 먹다가 말고 어딜 가셨나요?”
갑자기 모퉁이 너머에서 이릴이 나타났다.
일순 슐리펜은 저택이 온통 밝아진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프릴 달린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 있었다.
뒤집개에 노른자가 묻어 있는 걸 보니 아리아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딸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이릴의 시선이 슐리펜에게 고정되었다.
“아, 당신 왔어요!”
이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뒤집개를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녀가 달려와서 슐리펜을 껴안았다.
찰랑거리는 은백색 머리카락에서는 들꽃 냄새가 났다.
긴 포옹을 마친 그녀가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아. 엄마한테 오자, 응? 아빠 피곤하실 테니까.”
“웅.”
아리아는 그렇게 했다.
떼어낸 자리에 콧물이 묻어 있었지만 슐리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를 안아든 이릴이 몇 차례 솜씨 좋게 흔들어 주자, 아리아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이릴이 웃었다.
“고생 많았어요. 여행이 길어서 피곤하죠? 바다 너머 동방까지 다녀왔는데 안 피곤할 리가 없지. 어서 들어가서 푹 쉬어요.”
“전 괜찮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아이 참, 요리는 제가 좋아서 하는거라고 몇 번을 말해요? 과한 걱정은 금지라고 했죠?”
이릴은 검지를 뻗어 슐리펜의 입술을 막았다.
보나마나 직접 요리를 하는 게 피곤하지 않냐고 말하려던 것일 테니까.
과연 그 예상은 적중했다.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금지.”
“에헤헤, 그래야죠! 주부가 딸이랑 남편에게 요리를 해주겠다는데 말리면 안 돼요. 많이 피곤한 거 아니면 지금 식사할래요?”
이릴이 생글거렸다.
간만에 보는 태양 같은 미소에 슐리펜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자식이 생겼음에도 그의 부모님이 간간히 핀잔을 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목석같은 놈아. 너는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저는···.”
하지만 슐리펜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가만히 이릴을 마주보던 슐리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그러고 싶지만 괜찮습니다. 곧바로 다시 나가봐야 하거든요. 이번에는 파르잔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에에?! 그 멀리까지요!?”
이릴이 경악했다.
검의 제전이 열리는 파르잔이라면 육로로 며칠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도리질하던 그녀가 현관문을 가로막았다.
“절대 안돼요!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당분간 외부 수련은 금지에요!”
“하지만···.”
“당신 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심정은 알겠지만 적당히 쉬면서 해주세요. 검성의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릴이 호소하듯 말했다.
아내 된 자로서 최근 슐리펜의 행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검성 결정전에서 나비로제에게 패배한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이번의 동방 여정처럼 수련을 명목으로 집을 떠나는 일도 허다하게 많았다.
조금 메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당신이 검성이든 아니든 상관 없어요.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데···혹시 당신은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진정하세요···!”
그러자 슐리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릴이 눈물을 보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허둥거리던 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저도 물론 행복합니다! 지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지요. 하지만 이대로는···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약속?”
“우리가 결혼하기 한참 전에 친구하고 한 약속이 있습니다. 이릴 양을 지키라는 약속이었죠. 저는 그 약속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며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릴이 끄덕거렸다.
“알아요. 로난이랑 한 약속이잖아요.”
“네. 그 말마따나 저는 평생 이릴 양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강한 검사가 아니고서야 확실하게 그럴 수 있다고 맹세할 수가 없어요···그래서 그렇게 집착했던 겁니다.”
말을 맺은 슐리펜이 고개를 떨구었다.
개인적인 호승심보다 삼만 배는 더 중요한 이유였다.
가장 강한 검사가 아니고서야 이릴 양을 반드시 지킨다는 명제는 성립하기 어려웠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눈가를 닦은 이릴이 입을 뗐다.
“······있죠.”
“넵?”
“이번 주말에 가족끼리 여행이나 가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