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82)
2-4. 적백의 세계(2)
#04
손의 정체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멀리 있을 때는 여지없는 생물의 일부분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참 기묘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거인 새끼들이 만든 건가?’
거대한 손 조각상에 불법 증축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다섯 손가락은 필레온의 첨탑만큼이나 드높았다.
평평하고 넓은 손바닥은 하늘과 평행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표면이 콧물마냥 희멀건 꼴을 봐서는 대머리 새끼들의 손을 모티브로 지어진 것 같았다.
“착륙부터 할까.”
자세히 살펴 볼 가치가 있을 듯했다.
어차피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수면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퍼어엉!
불처럼 뿜어져 나온 검기가 바닷물과 충돌했다.
“윽···!”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기뢰가 터진 듯한 폭발이 일어났다.
충격파에 얻어맞은 몸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던 나는 거대 손의 중지에 등을 처박고 나서야 비행을 멈췄다.
“아악! 씨발!”
이건 좀 아팠다.
진동은 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제비를 돌며 착지한 내가 등허리를 문질렀다.
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해. 언제나처럼.”
“어쨌든 왔으면 된 거 아니냐?”
“그렇기는 하지. 네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죽었을 텐데.”
확신에 찬 말투였다.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딴 짓을 해도 되는 몸뚱이를 타고나버린 것을.
“안 죽었잖아.”
손바닥은 산책을 해도 좋을 만큼 널찍했다.
아쉽게도 균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필적할 만큼 흥미로운 요소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나저나 제단이라니?”
“아 맞아. 저기 손가락이 좀 그런 느낌 아니냐? 뭐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나는 턱짓으로 손가락 꼭대기를 가리켰다.
너무 높이 있어서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했다.
다섯 손가락의 정상에는 뾰족하게 생긴 구조물이 하나씩 지어져 있었다.
얼핏 손톱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네.”
“저걸 내가 분명 어디서 봤는데···어디였더라?”
손톱에서 나온 다섯 갈래의 빛줄기가 바다와 하늘을 잇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거리는 마나가 빛 속에 함유되어 있었다.
강렬한 기시감과 씨름하던 차였다.
“아드렌.”
딱!
저절로 손가락이 튕겨졌다.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은 나올락말락한 재채기를 게워낼 때만큼이나 명쾌하다.
나는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과거 아셀, 슐리펜과 함께 용의 도시 아드렌에 갔을 때였다.
용왕 아지다하카가 기거하던 하늘탑 위에서.
“그 쌍대가리가 의식을 치르던 마법진에서 저런 광선이 나왔었어. 기억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것도 벌써 수 년이나 지난 일이다.
질투심에 눈이 먼 용왕은 나바르도제를 뛰어넘을 힘을 얻고자 네뷸라 클라지에를 끌어들였다.
그 사이비 사기꾼들은 용왕을 속여 수상쩍은 의식을 치르게 했다.
힘을 주는 척 하면서 대머리 거인을 강림시키는 의식을.
“확실해. 저건 대머리 세상으로 보내는 신호야.”
“목적이 뭘까. 네 말대로 이미 거인이 점령한 세상이라면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을 텐데.”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궁금증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눈앞의 검지를 향해 가벼운 참격을 날렸다.
표면을 파고든 칼날이 중간에서 멈췄다.
“오?”
제법 단단했다.
허나 내가 쥐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검이었다.
힘을 조금 주자 칼날은 부드럽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검지 한복판에 비스듬한 선이 그어졌다.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진 상단부가 바다 쪽으로 넘어졌다.
퍼어엉-!!
새빨간 물보라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광선은 네 개로 줄어들었다.
물이 투명해서 손가락이 가라앉는 모습이 잘 보였다.
“뭐냐, 별 거 없네.”
조금 실망이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 줄만 알았는데.
홧김에 나머지 손가락도 잘라버리려던 차였다.
콰아아아아아!
갑자기 뒤쪽에서 댐이 터진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시발, 뭐야?!”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드넓은 손바닥 가운데서 검붉은 바닷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고래가 물을 뿜는 듯한 광경이었다.
“피해야 할 것 같은데.”
린이 첨언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일전의 물보라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규모가 컸다.
나는 잘려나간 검지의 뒤편으로 피신했다.
하늘까지 치솟았던 해수가 쏟아지며 손바닥 위를 휩쓸었다.
“무시무시하구만.”
나는 매미처럼 손가락 밑둥에 매달린 채 그 장관을 지켜보았다.
어찌나 물살이 거센지 휩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난데없는 분수는 안 그래도 섬뜩한 바다를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뭐가 섞인 거지? 피는 아닌데?’
얼굴을 적시는 감촉이 불쾌했다.
기존의 빨간 바닷물보다 농도가 훨씬 진했다.
걸쭉한 것이 정말로 피를 연상케 했지만, 냄새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출은 십 분 정도가 더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손가락에서 내려온 나는 해수가 분출되던 쪽으로 다가갔다.
“구멍···.”
손바닥 한복판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해수는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직경이 상당한 것이 대머리 거인들까지 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꽤 깊은지 아래쪽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한창 구멍 안쪽을 들여다 보던 와중이었다.
“로난.”
“엉. 확인했다.”
린이 진동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멍 깊숙한 곳에서 틀림없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확실해. 생물이다.”
“그 거인들 중 하나일까?”
“그건 만나봐야 알겠지. 간다.”
“간다니. 잠깐···”
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나는 가벼운 도움닫기와 함께 구멍에 뛰어들었다.
뛰어든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둠이 사위를 뒤덮었다.
“썅. 뭐가 이렇게 높아?”
고개를 들자 벌써 달처럼 작아진 구멍이 보였다.
바다 밑바닥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 떨어졌으면 속도가 유지되기 마련인데 어째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내려갈수록 누르는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내가 무모하다 경고했지.”
“걱정 마. 이 정도로는 안 죽으니까.”
하지만 크게 다치거나 병신이 될 가능성은 있었다.
귓가에서 포효하는 바람이 매서웠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벽면에다 검을 박아넣었다.
카가가가각!
요란하게 불씨가 튀어오르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칼자루가 투정을 부리듯이 웅웅 울렸다.
“아파. 아프다고, 이 바보야.”
“조금만 참아. 어차피 피 마시면 낫잖아.”
“나빠. 아까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래서 연하남은 안 돼. 별이라도 따다줄 것처럼 굴다가도 질리면 씹던 껌처럼 내팽겨쳐.”
“젠장, 그딴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사람으로 변해서 뽈뽈거리던데, 아직도 이상한 야설 같은 거 읽고 그러냐?”
“윽.”
진동이 멈췄다.
정곡을 찔린 듯했다.
사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고상한 성검 아가씨의 취미는 놀랍게도 관능 소설 탐독이었다.
“······멍청이. 야설이 아니라 로맨스라는 거야.”
“그게 그거지. 그리고 로맨스는 개뿔이. 두 번째 장부터 마지막까지 그 짓거리만 하는게 정상적인 로맨스냐? 보자보자 하니까 이 변태 나이프가···”
“그, 그만. 알겠으니까 그만해.”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조금만 버텨. 나중에 원없이 썰게 해 줄 테니까.”
린은 궁시렁거리면서도 불평을 멈췄다.
이 약점은 앞으로도 써먹을 여지가 있겠군.
인기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점점 통로가 좁아지는 것 같았다.
일 분 정도가 지났을까.
“좋아 다 왔다.”
드디어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깊숙한 어둠 속에서 어스름한 빛무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헌데 바닥의 형태가 좀 이상했다.
평평한 표면 위에는 길고 좁은 선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머지않아 바닥 전체가 거대한 대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염병. 또 뭐야.”
저 너머에도 뭐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 번 참격을 날리기 위해 칼자루를 쥐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옆 벽면 위로 수백 개의 구멍이 나타났다.
“어?”
하나의 면적이 말의 궁둥짝만 했다.
원래는 닫혀 있던 것 같은데, 어두워서 저런 게 존재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아아아!
모든 구멍 안쪽으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순식간에 차오르는 물을 본 내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놀랍게도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깨끗한 물이었다.
짭쪼름한 바다 냄새가 확 풍겨오고 있었다.
‘생명을 죄다 빨아먹힌 게 아니었나?’
내가 아는 그 바닷물이었다.
수십 개의 의문이 번득였지만 아쉽게도 사색할 여유가 없었다.
정겨운 해수는 눈 깜짝할 새 나를 집어삼켰다.
“커억!”
익사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차였다.
경첩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발밑의 대문이 열렸다.
쿠르르르릉···!
문 너머에서, 걸쭉하고 붉은 액체가 바닷물을 뚫으며 올라왔다.
“······!”
손바닥 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농도가 진했다.
바닷물이 빠르게 물들고 있었다.
이어서 강한 압력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전에 본 분수와 함께 쫓겨날 판이었다.
‘힘 좀 빌릴게요. 바렌.’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코어를 교체했다.
황금빛 광채가 팔다리를 휘감았다.
괴력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바렌의 오러였다.
“그르륵.”
나는 아래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물살이 끔찍하게 거셌지만 은사의 능력은 나를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로 만들어 주었다.
아득바득 내려온 내가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쾅!!
문이 다시 닫히면서 액체가 확 가라앉았다.
“끄아아악!”
거의 추락에 가까운 속도였다.
나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맨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났을 때는 액체가 이미 다 사라진 뒤였다.
“니미, 이랬다 저랬다 뭐 하자는 거야?!”
배수 설비가 존나게 잘 갖춰진 모양이었다.
양말까지 시뻘건 물이 들어찬 와중에도 사란테가 준 코트만은 매끈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또 어디람.
어두침침한게 무슨 지하 감옥처럼 생겼네.
들어왔던 대문이 천장을 이루고 있었다.
막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거, 거기 누구 있나요?”
“뭐?”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간의 한복판.
그러니까 머리 위의 대문과 대칭점을 이루는 곳에 웬 곱상한 아가씨 한 명이 주저앉아 있었다.
팔다리를 족쇄로 구속당한 여인은 나와 다름없는 꼴로 쫄딱 젖은 채였다.
“댁은.”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마지막 전쟁까지 남아서 연합군을 괴롭혔던 대주교.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녀는 사실상 아벨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르탄시에?”
“제, 제 이름을 알다니···! 설마 판타시온 당신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설마 저항군?”
이름을 불린 여인이 발작했다.
두터운 안대가 씌워져 있어서 내 모습은 보지 못한 채였다.
틀림없었다.
저건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였던 르탄시에였다.
끝내 슐리펜의 손에 머리가 떨어진.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제발 여기서 꺼내 주세요···더는 버틸 수가 없어···하윽, 숨 쉬는 것도 괴로워···!”
르탄시에가 몸부림쳤다.
처절한 몸짓에서 과거의 위엄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기쁘기는 했다.
이 마녀라면 뭔가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판타시온이니, 저항군이니 하는 게 말이지.
“좋아. 일단 들어 보자고.”
칼날이 쏘아졌다.
반으로 갈라진 안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초췌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르탄시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신은···누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