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83)
2-5. 적백의 세계(3)
#05
르탄시에는 나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이 세계의 나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존재조차 모르는 병신이었으니까.
계속 징벌병이었을 텐데, 거인 구경은 하고 죽었을런지.
나는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서운한걸. 나는 댁을 아는데.”
“저, 저를 아신다고요?”
“그래. 무려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 님이잖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있는 걸 보니 아벨의 계획이 틀어졌나 보지?”
“······!”
르탄시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해는 됐다.
갑자기 불거진 애송이가 자신의 과거사와 조직의 최종 목적까지 줄줄 읊으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일 터였다.
“당신은 도대체···?”
“내 이름은 로난이다. 네게 주어지는 정보는 이게 다니까 지금부터는 묻는 말에만 대답해. 여기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었어?”
“갑자기 무슨···우, 우선 이거부터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르탄시에가 수갑을 들어 보였다.
바닥과 이어진 쇠사슬 위로 반짝거리는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구, 구속구가 힘을 빼앗고 있어서 너무 힘들어요. 성실히 대답할 테니까 제발요···네?”
르탄시에는 머리를 조아리며 호소했다.
내가 시키면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그렇게나 오만했던 여자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참.
“좋아. 약속한 거다?”
“네! 네에! 물론이죠! 뭐든지 알려드릴게요!”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르탄시에의 팔다리를 옭아매던 구속구가 부서졌다.
창백한 손발목 위로는 묶여 있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 정말로! 정말로 풀려났어!”
벙쪄 있던 르탄시에가 경악했다.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큼직한 눈망울 아래로 닭똥 같은 물방울이 펑펑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지?”
“응. 그러네요. 모든 게 끝난 줄만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르탄시에가 훌쩍거렸다.
별안간 나를 향해 검지를 뻗은 그녀가 뭐라 속삭였다.
콰아앙!
육중한 충격파가 복부를 강타했다.
“에라이.”
공사용 철구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직선으로 날아간 몸이 반대편 벽면에 처박혔다.
저 멀리서 르탄시에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로한 님···당신은 정말 제 은인이세요.”
몸을 일으킨 르탄시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예법이 정중한게 아주 그냥 미친년이 따로 없었다.
이것이 네뷸라 클라지에식 감사란 말인가?
“목욕부터 해야지. 옷도 갈아입고···아니다, 저항군 버러지들에게 동정표를 사려면 이 차림이 나으려···”
“로난이다.”
“에?”
나는 어깨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등이 얼얼하기는 했다.
충격파를 맞는 동시에 칼집으로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화가 났을 것 같았다.
“로한이 아니라 로난이라고. 뒤 돌아보면 쑤시는 말벌 같은 년아.”
“뭐야. 왜 살아 있는 거···힉!”
르탄시에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그녀의 오른쪽 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으응?”
시선을 내리자 어디서 많이 본 귀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얼굴에 손을 가져간 르탄시에가 헛숨을 들이켰다.
매끈한 절단면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푸확!
뜨거운 피가 그녀의 손가락 틈새로 솟구쳤다.
“귀, 귀가!”
르탄시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언제 베였는지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울부짖던 그녀가 내게 검지를 뻗었다.
다시금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마디 윗부분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니.
“흐아아악?!”
“아까 같이 잘랐는데. 몰랐나 보네.”
다시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잘려나간 손가락은 그녀의 발치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귀처럼 방어와 동시에 잘랐는데 조금 늦게 알아챈 감이 있었다.
“아···아아아···!”
르탄시에는 어쩔 줄 모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손가락과 귀가 동시에 잘리면 어디에 신경을 써야 할 지 헷갈릴 듯했다.
나는 양 손을 코트 주머니에 꽂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난 썰거나 부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말이지, 고치는 건 도통 소양이 없어.”
“오, 오지 마!”
“내가 댁을 고분고분하게 풀어준 건 그쪽이 예뻐서가 아니야. 이쪽 세상에서도 너희가 글러먹은 새끼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역시나더라고.”
르탄시에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도 대주교까지 올라간 사람인데, 이쯤 했으면 주제 파악을 했을 터였다.
나는 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눈 채 말을 이었다.
“아주 개좆같은 새끼들이었어.”
“히이익···!”
불현듯 지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나치게 겁먹은 나머지 오줌을 지린 듯했다.
잠시 사라졌던 칼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툭.
허리까지 내려오던 르탄시에의 머리카락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음은 머리다.”
여전히 르탄시에는 검격의 편린조차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내가 강해진 건지, 이 여자가 약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고.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여다 댄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같잖게 대가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불어.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마, 말할게요! 저는 뿌리를 관리하고 있었어요!”
르탄시에가 외쳤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더는 기만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꼭 험한 꼴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흐윽, 사실상 관리라기보다는 공양에 가깝지만요.”
“뿌리가 뭐냐?”
“네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구조물이에요···생존자가 이걸 모르다니, 다른 별에서 오기라도 하신···히익! 죄, 죄송해요! 다시는 질문하지 말라 하셨는데···! 용서해 주세요!”
르탄시에는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빌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건만, 나한테 단단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만 짜고 설명해 봐. 아이를 가르치듯 친절하게.”
“네, 네에! 그럴게요. 그러니까 뿌리는···거대한 채굴기 같은 거에요.”
“광산에서 쓰는 그거?”
“맞아요. 위대한 분들께서···아, 아니. 그 더러운 침략자들은 점령한 별 전체에 뿌리를 박아넣어요. 보다 효율적으로 생명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서. 별이 품고 있던 생명력을 흡수한 뿌리는 그것을 순수한 에너지와 찌꺼기로 나누어서 방출하죠.”
더러운 침략자란 대머리 거인들을 의미했다.
원래는 위대한 분들이라 하려 했으면서 말을 바꾼 걸 보면 내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진작에 이렇게 나왔으면 손가락도 귀도 안 잘려도 됐을 텐데.
“그 시뻘건 물이 찌꺼기냐?”
“네.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바로 흡수와 분리가 이루어지는 구역이에요. 일정한 주기로 힘을 빨아들인 뒤, 바닷물과 함께 분출하는 거죠. 제 역할은···분리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거에요.”
“그런 정밀한 작업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는 부서진 구속구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좋게 봐줘도 죄수의 몰골이었다.
아니면 가학적 취향을 가진 파트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변태였거나.
르탄시에의 미간이 좁혀졌다.
“맞아요. 명목만 그런 거지, 실상은 흡수와 배출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거거든요. 제 몸에 함유되어 있는 마나가 분리를 촉진한다나.”
르탄시에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하루에 세 번씩 익사의 고통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평생토록 교단에 충성한 보답은 부귀영화나 영원한 생명처럼 고귀한 것이 아니었다.
“저를 비롯한 간부들은 모두 비슷한 꼴이 됐어요. 아벨 그 개자식에게 침략자의 힘을 나눠 받은 탓이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개자식이라니,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거인의 권능이라는 특권은 족쇄가 되어 광신도들을 구속했다.
르탄시에의 말투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아벨을 증오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벨의 계획은 어떻게 된 거냐? 그 새끼의 의도대로였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계획이요?”
“그래. 대머리들의 근원을 흡수해서 본인이 왕이 되겠다 지껄였잖아. 그거 말고도 뭐가 많았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아벨의 공약은 처음부터 우리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것 뿐이었어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서.”
르탄시에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좀 이상했다.
원래 세상에서 거인 종족의 근원을 흡수해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났던 것과는 대비되는 행보였다.
‘의아하군. 그게 핵심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거인 대왕의 자리를 빼앗는 건 저쪽 세계에서도 자기만 아는 비밀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미래가 달라진 걸까?
결론은 금새 나왔다.
“아, 실패했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가만 돌이켜 보니 아벨의 비밀 작전은 내가 없을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그 자식은 내가 대머리 킹과 싸우는 동안 얌체같이 근원을 빼앗은 것이었으니.
“등신새끼···그럼 지금 아벨은 어떻게 됐어?”
“아마 죽었을 거에요. 투항하지 않은 신도들은 모조리 살해당했으니까. 거인들은 약속과 다르게 우리를 다 죽이려 들었고, 아벨은 거기에 맹렬히 저항했어요. 그날 이후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요.”
“촌극이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모든 것을 배신한 남자의 말로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아벨에 관한 정보는 이걸로 충분할 성 싶었다.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다시 뿌리 이야기로 넘어가자고. 찌꺼기에 관해서는 들었고, 분리해낸 힘은 어디로 전달하는 거냐. 그 손가락 위에 있는 제단 같은 거?”
“맞아요.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예상대로군. 역시 나머지도 자를 걸 그랬어.”
“······네?”
갑자기 르탄시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꿀꺽.
굵직한 침을 삼킨 그녀가 되물었다.
“자, 잠깐만요···그걸 부쉈다고요? 송신탑을?”
“송신탑이라 부르는구나. 정확히는 손가락 째로 잘랐는데.”
“어, 어떻게···아니, 왜 그런 짓을! 틀림없이 알아챘을 텐데···!”
르탄시에가 머리를 쥐어싸맸다.
나한테 손가락을 잘렸을 때만큼이나 격렬한 반응이었다.
“와, 완전히 망했어. 여기 있다가는 희망이···.”
혼잣말이 빨랐다.
창백한 얼굴을 보니 완전히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야. 어디 가?”
“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당신도 옮겨줄 테니 어서 도망쳐요!”
그리 말한 르탄시에가 멀쩡한 왼손 검지를 뻗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들어올렸다.
내게서 도망치지 못할 것을 파악한 것 까지는 기특하다만,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
“뭐가 뭔지는 알고 가야지. 왜 그러는데?”
“놈들이 올 거에요. 다른 건 몰라도 생명력 전송만큼은 문제가 생기면 안돼요. 예전에도 이런 일이···아니,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순식간이었다.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 르탄시에가 양 팔을 위로 쳐들었다.
우리의 몸은 폭죽이라도 된 것처럼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머지않아 대문으로 이루어진 천장이 나타났다.
“아, 안돼! 지금 힘으로는···!”
르탄시에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발악하는 듯한 주문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쾅!
쾅!
쾅!
둥그렇고 큼직한 충격파 대여섯 개가 대문에 직격했다.
연기가 걷히자, 생채기 하나 없는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르탄시에가 다시금 절규를 내뱉으려던 차였다.
“엇차.”
나는 묵묵히 납도했다.
새하얀 선 두 개가 대문 위로 그어졌다.
절삭면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십자로 썰린 문짝이 무너져 내렸다.
콰르르릉!
뒤늦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악!”
르탄시에는 간신히 파편을 피했다.
다시 검을 뽑은 내가 몇 번 휘둘렀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쇳덩이는 다시 네 등분이 되어 흩어졌다.
시선을 내리자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파편들이 보였다.
르탄시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다, 다, 다, 당신?!”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갈 거면 얼른 나가.”
아무래도 이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서야 대화가 안될 것 같았다.
르탄시에가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나와 본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어요!”
거의 하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좁쌀보다 작던 구멍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다.
서늘한 일광이 얼굴을 적셨다.
십 미터 정도가 남았을 무렵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몹시도 익숙한.
심해처럼 중후하고 낮은.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대머리 종족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