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86)
2-8 적백의 세계(6)
#09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엉?”
오르세의 상태는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부러진 한쪽 뿔을 제외해도 마찬가지였다.
턱에서 왼쪽 눈까지 비스듬이 가로지르는 흉터는 얼굴뼈가 절단됐다 붙은 흔적이었다.
세상이 망하면서 고생을 어지간히 많이 한 게 아닌 듯했다.
“완전히 짐승이잖아.”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어깨 위로 스며나오는 흉악무도한 살기였다.
소름이 쭈뼛 돋는다.
붉은 안광에서 전해지는 것은 끝 모를 증오밖에 없다.
저 녀석은 내가 아는 힘만 센 바보가 아니었다.
뒤늦게 오르세를 알아본 르탄시에가 앵무새 같은 비명을 질렀다.
“마, 마룡!”
“역시 르탄시에로군.”
“로난 님! 저 자가 저항군의 행동대장이에요! 어서···으악!”
갑자기 지면에 있던 창이 거칠게 뽑혀 나왔다.
화들짝 놀란 르탄시에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검은 창은 날아왔던 궤적 그대로 오르세에게 되돌아갔다.
“흐으으으읍···.”
다시 던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불현듯 오르세의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일대의 공기가 그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부싯돌을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죽어라. 마녀.”
불현듯 오르세의 입술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톱니 같은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 깊숙이 불덩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다음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한때 제국을 불살랐던 화마가 터져 나왔다.
“하여튼 성질머리하고는.”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와류하는 화염이 눈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옆을 힐긋거리자 침착하게 주문을 외우고 있는 르탄시에가 보였다.
대머리들과 싸우던 요 며칠간 전투 감각을 다소 되찾은 모양이었다.
염동력 포탄 다섯 개가 그녀 주위로 형성되고 있었다.
‘왜 이럴 때만 열심히 하는 건지, 원.’
타이밍이 참 안 맞는 여자다.
오르세가 저걸 맞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나는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으겍!”
“잠이나 자라.”
르탄시에는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응축을 멈춘 마나가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용의 불은 이제 목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나는 묵묵히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사선으로 교차한 검격이 불길 위로 그어졌다.
스각!
사 등분이 난 브레스가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는 즉시 검을 눕히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카아앙!
대비하기가 무섭게 강렬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화염 뒤편에 숨어서 날아온 창이 칼배에 막혀 비적거리고 있었다.
창을 쥐고 있던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까지···!”
“난폭하군. 쓸만하긴 한데, 정교함이 너무 부족해.”
“넌 누구냐.”
“헤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좀 생겼냐?”
나는 뿌리치듯 검을 휘둘렀다.
튕겨 나간 오르세가 제비를 돌며 착지했다.
살기가 다소 가라앉은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검을 내린 내가 놈의 눈을 마주보았다.
“내 이름은 로난이다. 좆같은 대머리 군단과 맞서 싸우는 저항군을 찾아다니고 있었지. 만나서 반갑다.”
“난 저항군이 아니다.”
“뭣이라?”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르탄시에는 분명 오르세가 저항군의 행동대장이라 말했었다.
당장 뿌리를 폭격하는 걸 뻔히 봤는데, 얘가 왜 이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뿐이다. 나바르도제에게 머리를 숙인 벌레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행동대장이니 뭐니 하는 호칭은 전부 주변에서 멋대로 붙인 거다.”
“······아. 그러시군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드높은 자존심은 세상이 망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참 병신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굉장히 기뻤다.
내가 아는 오르세의 일면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오르세가 창으로 르탄시에를 가리켰다.
“네놈은 저 마녀와 한패인 건가.”
“전혀.”
“그럼 왜 살려둔 거지? 설마 누구인지 모르면서 동행하는 건 아닐 텐데.”
“아, 별 건 아니고 내가 타고 다녀야 하거든. 니들처럼 날개가 없어서 말이야. 대화 가능한 거대 날다람쥐랄까.”
“···성운 교단의 대주교를 탈것으로 삼았다고?”
오르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상식 밖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는 것은 드래곤이나 인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사고 못 치게 관리할 테니까 어떻게 좀 봐주면 안 될까?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은 백번 이해하겠는데, 생각보다 부려먹기 좋은 인재거든. 개 목줄이라도 채워서···
“그 여자를 죽이더라도 너를 데려갈 생각은 없다. 교단 소속이 아니라면 썩 꺼져라.”
“하···뭐가 문젠데?”
“위험하니까. 나와 겨룰 수 있는 자가 주변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웃기는 놈일세 이거. 저항군도 아니라 한 놈이 무슨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어. 역시 너 저항군 맞지?”
순수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르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십 초 정도 마비되어 있던 그가 얼굴을 붉혔다.
“······죽고 싶나?”
“아, 진짜 웃기네. 너 사실 잠도 거기서 자고 밥도 거기서 먹지? 저항군도 본부라는 게 있을 거 아냐. 똥도 저항군 화장실에서 때릴 놈이 무슨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크아아악!”
참다 못한 오르세가 괴성을 내질렀다.
흐릿해진 몸이 질풍처럼 쏘아졌다.
나는 입가에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자세를 잡았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힘 좀 쓰는 수컷들의 대화란 원래 말이 아닌 몸으로 행해지는 법이었다.
“어디 한 번 다시 우정을 쌓아 보자고. 그리고 같이 왕가슴 누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부디 건강하시면 좋겠는데.”
“네놈 따위가 나바르도제에게 이를 수 있을 것 같으냐!”
오르세가 도약했다.
등이 찢어지며 두 쌍의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하늘이 원체 하얘서 그런지 검은 꽃을 그린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화염에 휘감긴 나선창이 내게 던져지려던 찰나.
콰아아아아아-!!!
저 멀리 뿌리 쪽에서 거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아씨, 뭐야?”
“······!”
창을 휘감았던 불길이 꺼졌다.
나와 오르세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뿌리 바로 위의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꾸무럭거리는 문양 아래로 세 명의 거인이 강림하고 있었다.
『두아루가 고한다. 어떤 참람한 자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곧이어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인 분노가 나를 지배한다.
근육이 부풀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지껄이는 내용으로 보아하니 나를 잡으러 온 게 아니라, 뿌리가 공격당한 것 때문에 납신 듯했다.
화아아악!
날갯짓이 일으키는 강풍에 불과 연기가 날아갔다.
뿌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오르세가 탄식했다.
뿌리는 건재했다.
전체적으로 그을렸지만 기능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가장 작은 새끼손가락의 송신탑만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이상을 호소할 뿐이었다.
푸화아악!
불현듯 손바닥에 난 구멍이 백색 기체를 토해냈다.
창백한 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육지에 설치된 뿌리는 바다와는 달리 분말을 토해낸다.
역겨운 똥가루가 뒤섞인, 지천을 하얗게 물들이는 성분을.
오르세가 이를 악물었다.
“···실패인가.”
맞물린 이빨에서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만이 넘치던 얼굴에는 절망의 그늘이 드리운 채였다.
거인들은 두리번거리며 뿌리에 손해를 입힌 범인을 찾고 있었다.
오르세가 나를 돌아보았다.
“승부는···다음으로 미루지.”
“뭐?”
“내가 찾아오겠다. 너도 목숨을 보전하고 있도록.”
목소리에 힘이 없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승부를 하다 말고 빼는 오르세라니, 상상조차 못 해본 광경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르세는 놈들을 이길 수 없으니.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다.
꽉 쥐어진 오르세의 주먹에서는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나왔다.
“좆같네.”
나는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괜히 나비로제 누님이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해결해주려고 몸을 비틀었던 게 아니다.
강자의 자긍심은 지켜져야 했다.
내 친구를 침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평생의 목표인 불의 어머니 뿐이지, 어디 하늘에서 툭 튀어나온 치질 같은 놈들이 아니었다.
“야. 기다려.”
“음?”
오르세가 고개를 돌렸다.
네 장의 날개가 우뚝 멈췄다.
나는 거인에게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치워줄 테니까, 갈 거면 같이 가자.”
“뭐라고?”
“내가 저 대머리 새끼들 죽여 준다고. 그러니깐 너네 집에 좀 데려다 주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소강됐던 살기가 다시금 끓어오른다.
그럴 만 하다.
아무리 잘 쳐줘도 개소리로 들릴 터였다.
뿌리만 부수겠다는 것도 아니고, 거인 자체를 죽여버린다 했으니.
하지만 나는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하늘이 내게 쏟아진다.
눈이 마주친 오르세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무슨···!”
“등 좀 빌린다.”
설명은 필요 없다.
나는 오르세의 어깨를 밟으며 한번 더 도약했다.
반발력을 이기지 못한 오르세가 추락할 듯 휘청거렸다.
“크윽···!”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나는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거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진다.
두 놈은 모르는데 한 명은 아는 얼굴이다.
양쪽 날개에서 떨어지는 수백 장의 깃털이 빛의 거인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용의 도시 아드렌을 멸망시킬 뻔한 씹새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 두아루.”
『음?』
두아루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내 몸이 그를 스쳐지나간다.
스각!
굵은 목 위로 푸른 선이 그어진다.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진 머리가 회전하며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원래 세상에서 놈을 죽일 때도 오르세와 함께였다.
추억이군.
『두아루?』
『그대는 설마·』
다른 두 놈은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나는 말없이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두 거인들의 몸 위로 푸른 선 수십 가닥이 드러났다.
그중 한 놈의 팔꿈치를 박차며 방향을 전환했다.
뿌리의 손바닥 위로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퍼버버벅!
몸 위로 그어졌던 선이 일제히 벌어졌다.
빈 도화지 같은 하늘에 잠시나마 청색이 더해진다.
적과 백만이 존재하던 세상이 한층 아름다워진다.
린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친 남자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손가락 쪽으로 돌아선 내가 넓게 검을 휘둘렀다.
붉고 넓은 초승달이 쏘아졌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검이 자아낸 예기는 아직 멀쩡한 네 개의 손가락을 단번에 베며 지나간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넘어간 손가락들이 들판 위로 무너져 내렸다.
공중에서 토막 났던 고깃덩이들이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철퍽거리는 파육음이 빗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대충 10초쯤 걸렸으려나.
“뭐야, 언제 왔냐?”
그때 머리 위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완전히 벙쪄 있는 오르세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으로 짐작해 봐서는 내가 멋대로 날아오자마자 뒤따라 온 것 같았다.
하여튼 괜찮은 놈이라니까.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오르세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너는···도대체···.”
“그건 차차 알아가자고. 우린 친해질 수 있을 거야.”
걸쭉하고 푸른 비가 나와 그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뜨겁고 비린내가 풍겼지만 닦기에는 귀찮았다.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긴 내가 그에게 말했다.
“데려가 주라. 너네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