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87)
2-9 별을 바라볼 권리(1)
#09
바람이 거칠었다.
새하얀 구름의 바다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시선을 내리자 천천히 뒤로 밀려나는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단조로운 적백의 대지도 하늘 위에서는 제법 봐줄만 했다.
나는 드러누운 채 담배연기를 뿜었다.
“이 맛에 자가용을 사는 거지.”
르탄시에의 염력과는 승차감 자체가 달랐다.
옛날에 몇 번 타봐서 익숙하기도 하고.
유일한 문제는 이륙한지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뒤꿈치를 툭툭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언제쯤 도착하냐? 이러다가 욕창 생기겠다.”
【불평하지 마라.】
발치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나를 태운 채 날고 있는 오르세 기장이었다.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눈앞에서 거인 세 마리를 토막냈는데 그럴 만도 하지.
행선지는 저항군의 본부였다.
‘새끼. 고생을 해서 그런지 철이 좀 들었네.’
짐승 같던 첫인상이 흐려지고 있었다.
오히려 원래 세상의 오르세보다 진중하고 차분한 감이 있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포석을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처럼 살아왔겠지.
본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오르세의 몸에는 무수히 많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애써 쓴웃음을 삼킨 내가 입을 열었다.
“까칠하기는. 그런데 어째 너 치고는 낮게 나는 것 같다? 동네 마실 갈 때도 구름보다 높게 솟구치던 놈이.”
【내 등에 타본 적이 있는 것처럼 지껄이는군.】
“아, 헛소리니까 무시해. 그래서 낮게 나는 이유라도 있어?”
【성가시게 굴기는···구름 위로 올라가면 놈들에게 발각당한다. 일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엥? 그 대머리들한테?”
오르세가 언짢다는 듯 꼬리를 휘적였다.
긍정의 뜻이었다.
왜 저공 비행만 고집하나 했더니 이유가 다 있었다.
대머리들은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 권리조차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내 생각보다 더 좆같은 새끼들이었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별을 완전히 뒤덮은 구름층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오르세는 그것이 탐지망 외에도 거인들이 강림하기 위한 마법진을 보다 잘 그릴 수 있는 도화지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피곤하니까 별은 다음에 보자.”
【대단하군. 세 명보다 많아도 감당할 수 있는 건가.】
“당연하지. 세 명이 뭐냐. 스무 명도 거뜬···씨발,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잠시 고도를 높여 달라 부탁할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괜히 힘을 빼기보다는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는 게 맞았다.
어차피 나는 한 명의 대머리도 이 세상에서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자세를 고쳐 앉자 등가시에 묶여 있는 르탄시에가 보였다.
기절한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채였다.
살아는 있는 것 같은데, 반신불수라도 된 건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려던 차였다.
“아으···머, 머리가···.”
“오래도 잔다. 정신이 드냐?”
맥이 탁 풀렸다.
르탄시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몽롱한 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파닥거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캬아아악! 여, 여긴?!”
갓 잡아올린 숭어를 연상케 하는 꼬낙서니었다.
연갈색 단발머리가 미친 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묶어놓기를 잘 했네.”
“여, 여기가 어디죠?! 저희는 분명 숲에 있었는데···! 맞아, 오르세는 어떻게 됐죠!?”
“여기가 바로 오르세의 등 위야. 참고로 조용히 있는 게 좋을걸. 너를 갈가리 찢어서 잡아먹겠다는 걸 간신히 설득했거든.”
“그, 그런···흡!”
르탄시에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실제로 오르세는 여전히 르탄시에게게 강렬한 살의를 품은 채였다.
무슨 패악질을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단의 참모 역할을 하던 여자였으니 죗값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닐 터였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그녀가 입을 뗐다.
“후우···알았어요. 조용히 할 테니까 이것만 좀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숨이 막혀요.”
“미안하지만 그것도 힘들겠는데.”
“어, 어째서죠?”
“생각해 보니까 저항군 친구들이 너를 딱히 반가워할 것 같지는 않거든. 이 정도 험한 취급은 해줘야 그나마 납득하지 않을까 싶어서. 자신 있으면 그냥 풀어줄까?”
르탄시에의 얼굴이 굳었다.
내 주장이 합당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저항군이라 함은 마지막까지 남아 거인과 맞서 싸우는 이들인데, 약을 한 게 아니고서야 그 거인을 강림시킨 놈팽이들을 예뻐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주교라면 더더욱.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굵은 침을 삼켰다.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
“잘 생각했어.”
“조, 조금 헐거운 것 같은데 약간만 더 조여 주시겠어요? 거기 도착해서는 역시 네 발로 기어다니는게 좋겠죠? 아니면 아예 목줄을 만들어서 로난 님이 끌고 다니시는 게 안전할지도···.”
“그쯤 되면 그냥 개 취급을 받고 싶은 거 아니냐? 답도 없는 변태일세.”
“조,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왜 그런 말씀을···흐악!”
항변하던 르탄시에가 기겁했다.
갑자기 오르세가 궤도를 꺾은 탓이었다.
등판이 앞으로 확 기울며 지상의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대지 곳곳에는 크레이터가 가득했다.
문득 내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여긴.”
【호오, 알아본 건가.】
오르세가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은 자조가 섞인 웃음이었다.
내 시선은 여전히 지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참혹한 파괴를 당했지만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는, 내가 살던 곳이었다.
“발론.”
【그래. 한 때 제도였던 땅이다.】
오르세가 긍정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영해온 고도(古都)는 이제 도시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든 폐허로 변한 채였다.
그 장엄하던 황궁도, 친구들과 낄낄거리던 필레온 아카데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생명이 사라진 도시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잔해를 뚫고 자라난 하얀 수목만이 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씨발.”
욕을 제외하고 할 말은 없었다.
르탄시에는 얌전히 눈을 깔았다.
아데샨의 얼굴이 달처럼 아른거렸다.
이딴 게 미래의 풍경이라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힐긋거린 오르세가 말을 이었다.
【이상한 놈. 꼭 처음 본 것처럼 구는군.】
“시끄러워.”
【흥. 단단히 붙잡기나 해라. 도중에 떨어진다면 얼룩이 되어 버릴 테니까.】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뜻이죠?”
불길함을 느낀 르탄시에가 끼어들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등가시를 강하게 쥐었다.
원래도 가파르던 오르세의 각도가 완전히 수직으로 기울었다.
“흐아아아악! 안 돼!”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장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쐐애애애액!
네 장의 날개가 완전히 접힘과 동시에 급강하가 시작되었다.
“바, 박아요! 박는다고요! 로난 님!”
땅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슬슬 감속해야 할 시기임에도 오르세는 멈추지 않았다.
아래에 물이나 거대한 마쉬멜로우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행보다는 투신 자살에 가까웠지만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주, 죽는···허극.”
“가지가지 하네, 진짜.”
공포를 이기지 못한 르탄시에가 기절했다.
지면과의 거리는 10미터 정도가 남아 있었다.
슬슬 내 머릿속에서도 지금이라도 뛰어내려야 하나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오르세의 몸을 뒤덮은 비늘 하나하나가 검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야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퍼엉!
빛이 확 강해지더니 시야가 검게 뒤덮였다.
충돌은 없었다.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폐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수직 갱도가 나타났다.
오르세를 세 마리 정도 통과시킬 만큼 넓은 갱도의 외벽에는 발광하는 이끼가 붙어 있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이끼였다.
구경을 좀 하려는 차에 바닥이 나타났다.
오르세와 우리의 몸이 다시 한 번 검은 빛에 휩싸였다.
퍼엉!
바닥이 사라지고 다시 한 번 갱도가 펼쳐졌다.
오르세의 전매특허인 단거리 점멸이었다.
“새끼, 대단한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땅 속이라 힘조절이 어려울 법도 한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퍼엉!
퍼엉!
펑!
몇 차례의 점멸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거듭해서 터지는 것 같았다.
빠르게 뒤바뀌던 풍경이 어느 순간 고정되었다.
파아아아···!
환하고 따스한 빛무리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
오르세가 접고 있던 날개를 펼쳤다.
【도착했다.】
“허.”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굳어 버렸다.
내가 방금까지 있던 곳과 같은 세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공간이 지하에 펼쳐져 있었다.
필레온 아카데미를 통째로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태양과 벽면을 뒤덮은 발광이끼가 지상과 다름없는 광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초록색···.”
지면은 초목으로 감싸진 채였다.
다양한 수종은 시체를 연상케 하는 백색이 아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청량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색이 존재했다.
빨강, 노랑, 초록, 가끔씩 보라색.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훨씬 더 개조를 거쳤기는 했지만, 나는 과거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다.
디디칸을 따라서.
아셀, 마르야와 함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내가 작게 읊조렸다.
“그란 카파도키아.”
【과거에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제도에 왔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여기는 라만차가 태어난 대장간.
내가 시릴라와 에두온의 팔다리를 자른 곳이었다.
불현듯, 먼 아래쪽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저기 봐! 대장이 돌아왔다!”
“오르세 대장!”
시국에 어울리지 않게 유쾌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슬쩍 빼밀자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엘프, 난쟁이와 같은 장생종이었다.
아니면 폴리모프 한 드래곤이거나.
아래를 내려본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닥쳐라. 얼간이들.】
“오늘은 어땠어요?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왔나요?!”
그들은 오르세를 개선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기고 있었다.
이 자식이 스스로를 저항군이 아니라 말한 것 치고는 너무 사이가 좋아 보였다.
나는 낄낄거리며 그의 등을 발끝으로 건드렸다.
“어이, 대장.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지.”
【······시끄럽다.】
오르세가 툭 내뱉었다.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놈이었다.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는 바람이 따스했다.
천천히 활강하던 그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착륙했다.
비교적 외진 구석이었는데, 색채를 간직한 들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굳이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있나 의아해하던 차였다.
“어서 오너라. 아이야.”
“······!”
멀지 않은 곳에서 사근사근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물은 물뿌리개가 아닌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오르세가 누구를 데려온 적이 없는데 놀랍구나.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너를 불렀단다.”
【나는 네 명령에 따른 게 아니다.】
“그래.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인이 쿡쿡거렸다.
전설의 마룡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아이를 어르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물을 다 뿌린 그녀가 몸을 돌렸다.
풍만한 흉부가 한 박자 늦게 회전했다.
“아.”
나는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비현실적인 무브먼트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정체를 확신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심호흡을 한 뒤 입을 뗐다.
“불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세상에.”
헌데 돌아오는 대답이 좀 이상했다.
반가움도 경계도 아닌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한참이나 얼어 있던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우아한 손가락이 내 턱끝을 쥐어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각막에 맺혔다.
눈동자처럼 진홍색을 띠는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너, 카인의 아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