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88)
2-10 별을 바라볼 권리(2)
#10
“뭐라고요?”
누군가 머리를 돌로 내리친 것 같았다.
방금 나온 것은 분명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진홍빛 시선이 내 얼굴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단번에 알아볼 거라 하더니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이름이 그러니까···로난. 맞니?”
“···네.”
“가까이 오렴. 더 자세히 보자꾸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바르도제는 가까이 오라 했지만 몸에 닿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반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그녀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이구나. 특히 눈이 많이 닮았어. 죽은 줄만 알았는데.”
진귀한 보물을 닦아내는 것처럼 섬세한 손길이었다.
나는 날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나바르도제는 원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으니, 날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뒤 입을 뗐다.
“···설마 아버지가 살아 있나요?”
“그걸···모르고 있었구나. 이런 말을 해서 참담하지만, 카인은 이미.”
“아아, 아니에요. 역시 그렇겠죠. 예상했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짐작했던 바라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모든 정황을 고려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었다.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카인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상처가 곪아 죽어가면서도 박애의 마음을 잊지 않았지. 나는 그토록 다정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엘시아는요?”
“네가 엘시아를 어떻게 알고 있니?”
“뭐, 어쩌다 보니···.”
“우후후, 그럴 수도 있지. 마찬가지로 참 그리운 이름이구나······엘시아는 오 년 전에 카인의 뒤를 따라갔단다. 이 장소를 완공하고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지.”
“빌어먹을.”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으로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립 멤버는 모조리 죽은 게 확인됐다.
나바르도제는 엘시아의 정령술이 저항군의 본부를 구축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설명했다.
카인을 잃은 날부터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완공을 알리는 위령비를 세우는 순간 쓰러졌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가장 위에 적혀 있단다. 마지막까지 침략자와 맞선 영웅들과 함께.”
“그럴 만 하죠. 혹시 이릴이라는 이름도 들어 봤나요?”
“이릴이라면···아아, 카인이 언급했던 네 누이 말인가.”
심호흡이 한번 더 필요했다.
아데샨의 생사 여부와 마찬가지로 괴롭지만 알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소식을 전해 들은 기억은 없구나.”
“그렇군요.”
“도움이 못 되서 미안하구나. 엘시아와 카인의 유골은 여기 안치되어 있는데, 보러 가겠니?”
“······나중에요.”
이 또한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좆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잠깐 부옇게 변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후, 그러려무나. 그나저나 정말 닮았어···어쩜 이리도 닮았을까···.”
“음?”
나바르도제는 여전히 내 볼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불현듯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피부와 닿는 손바닥이 도자기처럼 차가웠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게냐. 살아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으읍.”
“뭐야, 괜찮아요?!”
갑자기 나바르도제가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어깨를 감싸 안는 순간 다시금 위화감이 덮쳐왔다.
역시 차갑다.
“몸이···!”
“이런, 눈치챘느냐?”
나바르도제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입에서 떼어낸 손바닥에는 끈적한 핏물이 묻은 채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쩐지 레드 드래곤의 체온이라기에는 너무 낮았다.
원래대로라면 곁에만 있어도 땀이 날 만큼 뜨거워야 했다.
막 벌어지려던 내 입술 위로 그녀의 검지가 얹어졌다.
“쉿···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다오.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구나.”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허공에 손바닥을 털자 핏자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지가 떼어졌다.
“고맙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네가 보고 느낀 대로란다.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내 생명은 식은 모닥불에 가물거리는 잔불이나 다름없다.”
나바르도제가 눈웃음쳤다.
거인과 연달아서 전투를 벌인 후유증이었다.
유일하게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던 그녀였지만, 대머리들은 일대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중과부적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어. 나는 살아남은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도망쳤단다.”
별의 가호는 부조리했다.
중상을 입은 나바르도제는 세 번째 거인이 강림한 순간 후퇴를 결심했다.
빠른 판단을 내린 덕에 기적적으로 소수의 인원을 구조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 생존 환경을 구축하고 저항군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치료에 집중하면 되지 않나요?”
“운이 좋다면 몇 년 정도는 연명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느냐. 이토록 많은 아이들이 내게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거늘. 어중간하게 생을 늘리느니 저 아이들을 햇살 속에서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려 한다.”
“그게 무슨···아.”
뒤늦게 말뜻을 눈치챈 내가 감탄했다.
어쩐지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다 싶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인공 태양에서 나바르도제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굉장한 마법이네요.”
“후후, 역작이지. 비록 가짜에 불과하지만···내 심장이나 다름없단다.”
왜 그녀가 이 별의 최강자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의 빛과 온기로 삶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이미 신이나 다름없었다.
“생명이란 참 아름답지 않느냐? 죽음의 공포와 추위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눈 녹듯 사라지니···.”
나바르도제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옮겨졌다.
저항군을 훑어보는 눈동자는 연민과 애착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애틋한 표정에서, 세상을 불사르던 거룡의 위엄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발.’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나바르도제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나 다름없었다.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왼손 검지를 칼날에 대고 살짝 그었다.
화들짝 놀란 린이 웅웅 진동했다.
“···갑자기 뭐 하는 거니?”
놀란 것은 나바르도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처에서 샘솟는 핏방울을 보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빙긋 미소지었다.
“나바르도제. 잠깐 입 좀 벌려 볼래요?”
“입을···?”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서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으욱!?”
순식간이었다.
나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당황한 그녀가 경직되는 순간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는 왼손 검지를 밀어넣었다.
피부와는 달리 입 속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과 맞닿는 혀가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웠다.
“우우욱!”
“마셔요. 놀라지 말고요. 저를 믿어요.”
설득하거나 음식에 섞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번거로웠다.
다소 무례하더라도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여러모로 빠르고 편했다.
손가락이 목젖까지 다다른 게 느껴졌다.
나는 상처에서 피를 다 쥐어짜낸 뒤 검지를 빼냈다.
【커억! 컥!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
“후우···성공.”
콜록거리던 그녀가 나를 뿌리쳤다.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남아 있는 피를 핥아 먹은 내가 눈웃음쳤다.
“괜찮아질 거에요. 다들 그랬으니까.”
【뭐가 어째? 네 피를 마시게 해서 뭘 어쩔 셈···】
불현듯 말을 잇던 나바르도제가 얼어붙었다.
무언가 변화를 느낀 것 같았다.
성난 불처럼 나부끼던 머리카락이 가라앉고 있었다.
파아아아아-!
본부를 비추던 햇살이 갑자기 강해졌다.
“뭐, 뭐야?! 태양이···!”
“나, 나바르도제 님!”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가을날의 오후를 연상케 하던 햇살은 한여름 사막의 땡볕으로 변한 채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바르도제가 다급히 팔을 들었다.
“이, 이런!”
빛이 식으며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바르도제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골랐다.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얼어 있던 몸을 빠르게 녹이고 있었다.
“다행히다. 역시 효과가 있구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바르도제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거인들에게 입은 상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나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피를 약처럼 써서 조금 쫄았는데, 저주가 완전히 사라져서 그런지 약효가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요. 제대로 쉬어 줘야 완치되니까. 그때까지 삼 일에 한 번 정도는 마셔야 하고요.”
“너는···대체···?”
나바르도제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제일 급한 것은 해결했으니, 이제 본론을 꺼낼 때였다.
어설프게 이야기를 지어내 봤자 역효과겠지.
고민은 금새 끝났다.
“나바르도제. 사실 저는 다른 세상에서 왔어요.”
“다른 세상?”
“네. 여기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곳이에요. 평행세계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숨길 이유는 딱히 없었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망해버린 세상의 몇 없는 장점이다.
나는 사란테와 아셀에게 들은 평행세계의 개념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했다.
무대는 같지만, 역사는 달라진 세계라고.
한참이나 벙쪄 있던 나바르도제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구나.”
목소리가 진지했다.
다행히도 불벼락을 맞거나 근위병이 내 양쪽 어깨를 붙잡아 연행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피를 먼저 먹이기 잘했다니까.
“좋아요. 꽤 길 텐데, 괜찮겠어요?”
“오히려 좋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기를 구경시켜 주마.”
짝짝!
나바르도제가 손뼉을 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별안간 화단 바로 뒤편의 동굴에서 온몸이 황금색 수정으로 뒤덮인 거인이 걸어 나왔다.
동굴 거인이라는 몬스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압도적으로 덩치가 거대했다.
“이건···!”
“이 지하 세계의 원래 주인이지. 넋이 사라진 몸에 엘시아가 정령을 깃들게 했단다.”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에두온과 시릴라가 조종하던 동굴 거인의 왕.
원래 세상에서도 만났던 왕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전투 병기가 아닌, 고성능의 건설 장비로 재탄생해 있었다.
“고오오.”
거인이 올라타라는 듯 손바닥을 내렸다.
나바르도제는 내 부축을 받으며 탑승했다.
거인은 우리를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걷기 시작했다.
“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본부의 전경이 넓게 펼쳐졌다.
오르세의 등에 탔을 때는 보이지 않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요정들이 가꾸는 농장과 드워프가 돌을 깎아 만든 건물.
꾸벅꾸벅 조는 오르세.
저 구석에서 죽은 체를 하고 있는 르탄시에 같은 거.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도통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양 팔을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불의 어머니는 주변에 모든 것을 보나마나한 졸작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아, 이토록 개운함을 느낀게 얼마만인지.”
“······오.”
자석이 달린 것처럼 굴러가는 눈동자가 원망스러웠다.
올라가는 행복 지수와 비례해서 지능이 낮아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하려 했던 이야기도 다 잊어버리게 생겼다.
나는 그녀가 기지개를 마치기 무섭게 입을 뗐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게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처음부터 설명하기로 했다.
“저는 이게 두 번째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회귀한 순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