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91)
2-13. 별을 바라볼 권리(5)
#13
거인의 추락과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저항군은 양동이에 담긴 내 피를 희석해서 각자의 무기에 바르거나 마셨다.
내 피를 남이 마시게 하는 행위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마법을 놈들에게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끄트머리가 붉어진 투사체들이 밤하늘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쏴라! 한 명도 살려서 보내지 마!”
“우리의 땅과 바다를 되찾자!”
유성우가 거꾸로 내리는 듯한 장관이었다.
거인들의 추가 공세로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나 저항군은 한 명도 물러나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은 전사들은 지금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검은 하늘인가!】
【오르세 대장을 따라라!】
가장 신이 난 것은 비행이 가능한 드래곤들이었다.
수인 형태의 오르세가 무리를 이끌며 밤하늘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거인들의 공격은 대부분 빗나갔다.
용의 편대가 변칙적인 곡선을 그릴 때마다 대머리들이 추락하고 있었다.
『무슨, 움직임이.』
구름 위로의 비행은 금지되었지만 날갯짓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치고 빠지는 데 특화된 비행술은 지금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죽어라!】
질풍처럼 쇄도한 오르세가 창을 내던졌다.
검은 직선이 거인의 목울대를 꿰뚫었다.
푸른 피가 쏟아졌다.
뒤따르던 드래곤들이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브레스를 퍼부었다.
콰아아아아!
불과 벼락, 냉기의 폭풍은 방어막 없는 맨몸으로 견딜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거인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크하하하! 꼴 좋군!】
오르세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하얀 섬광이 그의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자, 빛의 창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만한 자여.』
【젠장···!】
빛의 창이 던져졌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부하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찰나였다.
오르세와 거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폭발이 일어났다.
궤도가 뒤틀린 창이 그를 비껴 지나갔다.
동시에 지상에서 쏘아진 투사체들이 거인들에게 적중했다.
【너는.】
시선을 내린 오르세가 눈을 치켜떴다.
저 아래에서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 르탄시에가 두 팔을 쳐들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것과 같은 염동력 덩어리가 그녀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요격에 성공한 것을 확인한 르탄시에가 호들갑을 떨었다.
“마, 막았다! 제가 막았어요!”
“잘했어. 그렇게만 해.”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칭찬을 받은 르탄시에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다음 행동에 나섰다.
“이 쓰레기들, 감히 우리를 속여?!”
사실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준비되어 있던 염동력 포탄 수십 발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목표는 거인들.
원래대로라면 개미 더듬이로 애무하는 수준의 효과에서 그쳤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쾅!
콰과광!
연쇄적인 폭발이 별의 가호를 두들겼다.
못 해도 균열이 일어났고, 이미 약화되었던 방어막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타격을 입은 거인들이 피를 토하며 신음했다.
“아자!”
르탄시에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녀를 죽일 듯이 대하던 저항군의 눈빛도 사뭇 달라지고 있었다.
“과연 대주교였다 이건가···대단하긴 하군.”
“흥. 나는 아직 못 믿어.”
이 또한 좋은 변화였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지만.
나는 양동이에 피를 받으면서 밤하늘의 격전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저항군 소속의 흡혈귀가 내 피를 곳곳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 다들 하면 잘 하잖아.”
대머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가장 큰 밑천인 별의 가호가 파훼된 이상 놈들은 화력만 강한 유리 대포일 뿐이었다.
그래도 절대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상대는 십 년이 넘도록 자기네들을 찢어 죽일 생각만 하던 저항군이라는 집단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겠지.’
사실 저 정도의 머릿수는 혼자서 처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더 편했다.
시간도 덜 걸릴 테고, 괜한 사상자가 나올 일도 없으니.
하지만 나는 일부러 개입하지 않았다.
빼앗긴 것은 스스로 되찾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별을 강탈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만 잘난 영웅이 아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후으으으읍···.”
근처에서는 공기 빨려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나바르도제가 보였다.
“잘 돼가요?”
“흐으으으읍···!”
내가 물었지만 나바르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숨을 들이마시며 힘을 모으고 있었다.
터질 듯이(원래도 터질 것 같았지만) 부풀어 오른 가슴 안쪽으로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뱉는 순간이 아마도 전투가 끝나는 때일 터였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좀 이상한데.’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째 거인들의 수가 별로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구름이 흐트러지면서 마법진이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밤하늘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늘어나고 있어.”
의문은 금새 풀렸다.
실제로 거인의 수는 개전 초기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나가 추락하면 다른 하나가 두터운 구름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데만 급급한 저항군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허억···허억···왜 끝이 안 나지?”
“단순한 착각이다! 쏘아붙여!”
구름 뒤편에서 뭔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어떤 개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해결을 해야할 것 같았다.
날개 네 장 달린 놈들이 아무리 좆밥이라 해도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
밤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던 차였다.
[아, 아이야. 어딜 가느냐?]“아씨, 깜짝이야.”
갑자기 머릿속에서 나바르도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눈을 뜬 그녀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뭔가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 피도 잔뜩 흘렸는데,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꼭 가야 하는 거니?]전투에 집중하느라 무심해졌다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염려가 뚝뚝 묻어나 있었다.
“어···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와의 추억이 없었어서 그런가, 누나의 걱정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던 내가 입을 뗐다.
“너무 걱정 마요. 별 일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서둘러 돌아오너라. 곧 불을 뿜을 거거든. 이쯤 모았으면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나바르도제가 면목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서 불을 조절하는 데 애로가 있는 듯했다.
상관 없었다.
저 위에 뭐가 있건 간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웃어 보였다.
“다녀올게요.”
자세를 낮췄다.
정신을 집중하고 몸에 힘을 주었다.
르탄시에는 지원 사격에 여념이 없었으니 혼자서 구름 위까지 도달해야 했다.
마나를 머금은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서비스 좀 할까.”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거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지점을 향해 도약했다.
발을 내딛는 순간 지면이 깊게 파였다.
세상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덮쳐왔다.
콰아앙!
한 박자 늦은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크으···!”
상상 이상의 추진력이었다.
세니엘을 건드린 것 때문인지 몸에 힘이 넘쳤다.
나는 눈 깜짝할 새 하늘의 전장에 도달했다.
오르세의 드래곤 편대와 대머리 일곱 명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칼자루를 강하게 쥐자 검이 붉어졌다.
서걱.
발도와 동시에 일곱 거인의 목 위로 빨간 선이 그어졌다.
『뭐.』
놈들에게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선이 단번에 벌어지며 쪽빛 피보라가 터져 나왔다.
일곱 개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챈 오르세가 노성을 터트렸다.
【놈! 감히 내 몫을 건드리다니!】
“그러게 빨리빨리 치웠어야지.”
나는 낄낄거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오르세는 이미 저 발아래까지 멀어진 채였다.
창백한 구름은 내 몸을 아주 잠깐 삼켰다가 뱉어냈다.
시야를 가렸던 백색이 사라지며 구름 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캬.”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쪽 세계로 건너와서 본 경치 중에 제일 아름다웠다.
눈 내린 벌판을 연상케 하는 구름층 위로, 맑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진짜 못 보고 죽었으면 어쩔 뻔 했냐.”
여건만 된다면 별 구경이나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거인들이 계속 나타나는 원인을 파악해야 하니.
그때, 두리번거리던 내 시야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저게 뭐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상공 한복판에서 오색찬란한 빛무리 하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빛의 중심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구체 하나가 회전하는 중이었다.
그 주변에는 무려 세 개의 균열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무슨 규모가···.’
미간이 구겨졌다.
균열도 균열이었지만 구체에 더 눈길이 갔다.
기괴한 마력 덩어리에서는 나바르도제의 인공 태양에 버금가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허공에 검기를 폭발시키며 구체에 접근했다.
너무 마력의 농도가 짙어서 몸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카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겅였다.
근처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균열들이 내 추리를 방증하고 있었다.
세 개의 균열은 하나하나가 거인도 들락거릴 만큼 크고 넓었다.
추측컨데 이 구체는 신호탄일 터였다.
갑자기 불거진 대머리 패거리는 이 덩어리가 뿜는 빛을 보고 몰려든 것이었다.
그때, 가장 큰 균열 안쪽에서 희멀건 상반신이 튀어 나왔다.
『여기는 어디인가.』
“염병, 가지가지 하네.”
맨질한 두피를 보는 순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무한리필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캬샤인지 뭔지 하는 잡놈은 주변의 거인들을 불러모으는 것 뿐만이 아니라 별의 다른 곳에 있는 대머리까지 여기로 끌고 오는 중이었다.
진짜 뭐 하는 새끼지?
목적이 뭐야?
상념에 빠진 와중, 거인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대는?』
“니 장의사다.”
조금 더 고민하고 싶었지만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폭발을 일으키며 달려든 내가 넓은 참격을 뿌렸다.
검로를 따라 초승달이 떠올랐다.
세 개의 균열과 신호탄 역할을 하는 구체, 막 균열을 빠져나온 거인의 몸이 단번에 양단됐다.
콰아아아아!!!
반으로 갈라진 구체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발치를 뒤덮고 있던 구름이 흩어지며 지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환호가 터져 나올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엥?”
시선을 내린 내가 눈썹을 으쓱였다.
본부의 상공에는 거인들만 남아 있었다.
지원 포격은 멈춘 채였다.
신들린 듯 날뛰던 드래곤 부대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그새 대머리들이 역전했나?
갑작스러운 열세에 의아해하던 차였다.
퍼엉!
눈앞의 공간이 흩어졌다 모이며 익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싶나?】
“아하.”
나는 그제야 때가 당도했음을 깨달았다.
내 멱살을 움켜쥔 오르세가 지상으로 연달아 점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본부에 도착한 뒤였다.
나바르도제를 중심으로 전원이 모여 있었다.
[제때…돌아왔구나.]“나 때문에 참은 거에요? 세상에.”
전음인데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불을 한계치까지 끌어모은 그녀는 폭발하기 직전의 초신성 같았다.
나는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거인들이 후퇴하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잘 가라. 등신들아.”
머리가 복잡했지만 오늘은 이걸로 충분했다.
나는 달아나는 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온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나바르도제의 입이 벌어지며, 이 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염이 터져 나왔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한 달 뒤.
우리는 세상의 절반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