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96)
2-18. 대반격(5)
#18
“······달빛 머금은 백금과 아델라이트.”
“엉?”
“마법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다.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
아벨이 중얼거렸다.
힘이 빠진 목소리는 더는 웅장하게 울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슴팍에 검이 꽂힌 채 누워 있는 아벨이 보였다.
팔다리는 그새 온전하게 재생된 채였다.
“뭐야, 포기한 거냐?”
나는 절벽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설득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덧 노을녘이 찾아왔다.
잘 익은 오렌지처럼 선명한 해가 수평선에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이 무의미한 짓을 그만두자는 뜻이다.”
악의로 이글거리던 눈동자는 불 꺼진 화로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아벨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는 나오지 않은 반응이라 조금 기대가 됐다.
푸확!
검을 뽑자 보라색 피가 튀었다.
“윽.”
아벨은 눈살만 조금 찌푸릴 뿐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설득을 유보해둔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한량처럼 하늘만 쳐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
“로난이라고 했나.”
“그래.”
“너는···정말로 강하군.”
아벨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본인의 검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줍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드디어 진심이 닿은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성장하는 동물이다.
내 협상가인 부분이 발전한 것에 대해 기뻐하던 와중이었다.
“카인은 어리석었다.”
“······뭐라고?”
“그 물렁한 사내의 방식은 틀렸다.
나는 여전히 이 별의 필멸자들을 혐오한다.
언젠가 죽을 운명의 버러지들은 결국 스스로를 멸망시킬 거다.”
“후우···씨발, 내 설득이 완벽하지 않았나 보네.”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뒷목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망할 놈이, 이럴 거면 왜 갱생한 것처럼 분위기를 잡은 거야?
다시 한 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검을 뽑아드는 차였다.
“하지만, 내 방식 또한 틀렸다는 걸 인정한다.”
“뭐?”
“우리 둘 다 정답이 아니었다.
한순간이나마 외계의 세력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섵부른 판단이었어.
시간은 더 오래 걸릴 지 몰라도 주체적인 방식을 선택했어야 했다.”
“···계속해봐.”
나는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벨은 카인의 항아리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네게 협조하겠다. 그릇된 선택에 책임을 지려면 그게 최선이겠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다시 시작하겠다.”
“미친 새끼. 다시 악당이 되겠다는 말을 아주 뻔뻔히 지껄이네 이거. 니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냐?”
“물론이지.”
아벨이 주억거렸다.
나는 뭐라 더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여기서 설득을 더 해봐도 의미 있는 진전은 없을 것 같았다.
원래 세상에서도 죽기 직전에야 바뀐 놈이었으니.
“하아···좋아. 대신 한번만 더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라. 오늘 벌어졌던 일은 어린애 장난이었다고 느껴지게 해줄 테니까.”
“내뱉은 말은 지킨다.”
“그래야 할 거야.”
나는 질려서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가 합의점이었다.
만약 아벨이 변질해서 뒤통수를 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는 수밖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악당 짓거리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다 뿌리고 내려가자고.”
나는 카인의 유골함을 집어들었다.
처음보다 많이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중간중간 쉴 때마다 뿌려서 이제는 바닥이 보이기 직전이었다.
“나눠서 뿌리니까 무슨 붕어 밥 주는거 같네. 미안해요.”
쓴웃음이 나왔다.
이걸로 평행세계의 아버지와는 작별이었다.
막 마지막 남은 뼛가루를 뿌리려던 차였다.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아벨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네가 뿌릴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벨은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참 여러모로 피곤한 놈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내가 놈의 손에 뼛가루를 쥐어 주었다.
“부드럽게 해. 고급 요리에 소금을 치듯이.”
어느덧 태양의 절반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
아벨은 말없이 뼛가루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절벽 끄트머리에 섰다.
석양을 등진 백발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평행세계의 아버지와 누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마침내 팔을 뻗은 아벨이 손을 펼쳤다.
“아···.”
뼈가 휘날린다.
그의 입 사이로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새나왔다.
후우웅···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뒤집는다.
해풍을 타고 날아오르는 하얀 가루의 모습은 하늘로 승천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아벨의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잘 가쇼.”
“······멍청한 인간.”
갑자기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힐긋거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메마른 뺨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은 노을과 같은 색으로 아롱이고 있었다.
“······.”
나는 못 본채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사악한 교주가 아닌, 형을 그리워하는 한 명의 동생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턱에 맺혀 있던 눈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벨은 아주 작은, 나를 제외한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크기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책임은 지겠소. 형님.”
****
다음날 아침.
종자 보관소를 개조해서 만든 저항군 본부 깊숙한 곳.
나는 두 대주교를 양 옆에 낀 채 복도를 걷고 있었다.
“로난 님. 그러지 말고 말 좀 해주세요. 저희가 꼭 만날 사람이라니, 그게 누군데요?”
르탄시에가 치근덕거렸다.
행동이 발랄해진 것이 슬슬 맞을 때가 된 것 같았다.
내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적였다.
“그런 사람이 있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치, 힌트라도 주시지.”
르탄시에가 볼을 부풀렸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확실히 최근 들어 살만해진 듯했다.
저항군의 괴롭힘이 사라진 것도 이해가 갔다.
네뷸라 클라지에 딱지를 떼고 보면 그녀는 굉장히 강력한 마법사였으니까.
심지어 적극적이기까지 하니, 거인을 몰아 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저항군은 르탄시에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왼쪽에 있는 덩치를 쳐다보았다.
“요즘 잘 나가던데. 판타시온.”
“복수를 행할 뿐이다.”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판타시온은 뿔이 천장을 긁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원래도 컸던 몸은 어째 더 부풀어오른 것 같다.
수세미처럼 푸석푸석하던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 새끼는 볼수록 물건이네.’
르탄시에와 마찬가지로 그의 상태 역시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갑옷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보고 있자면 이게 철거용 중장비인지 생물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르탄시에가 키득거렸다.
“흐흥, 역시 살려 두기 잘했죠? 얼마나 잘 싸운다구요. 아마 조금만 더 있으면 오르세 대장의 기록도 깰 거에요.”
“이게 진짜, 네가 깨는 거냐? 요즘 살만한 것 같은데 며칠 굶어 볼래?”
“아악!”
딱!
머리를 쥐어박자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쯤 되면 정말로 맞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르탄시에의 호언장담은 틀리지 않았다.
대주교 판타시온은 저항군에 합류하기 무섭게 오르세를 위협하는 신성으로 떠올랐다.
수인 특유의 괴력을 발휘하며 대머리 세력을 격파하는 웨어디어는 전성기의 자이파를 연상케 했다.
별안간 판타시온이 나를 내려보았다.
“고맙다.”
“엥? 갑자기 뭐가?”
“네가 준 무기는 잘 쓰고 있다.”
“아, 그거 괜찮지? 좋을 수밖에 없을 거야.”
판타시온의 등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메어져 있었다.
지름이 2m에 달하는 쇳덩이에는 거인의 푸른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채였다.
족히 두 자릿수는 베었을 터인데 예리한 날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나는 도끼자루에 새겨진 각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주워 온 거거든. 괜찮은 거 몇 개가 묻혀 있더라고.”
“그란 카파도키아라면···우리가 파괴한 곳인가.”
“뭐야, 기억하네?”
“그래···에두온과 시릴라가 주관했지. 내게 직접 계획을 허락맡으러 왔었다.”
놀랍게도 이 사슴은 제도 지하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란 카파도키아가 처참하게 박살난 걸 보면 본인이 결재 도장을 찍은 거겠지.
침묵이 찾아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만 복도에 메아리쳤다.
판타시온이 중얼거렸다.
“······후회되는군.”
“당연히 그래야지.”
“용서는 침략자들의 피로 구하겠다. 속죄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판타시온이 무겁게 끄덕였다.
진중한 태도를 보니 절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들어온지 얼마 안 된 놈이라 채용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째 르탄시에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십 분 정도를 더 걸은 우리는 거대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열두 개의 보안 장치를 뚫고 와야 하는 이 회의실은 본부에서 손꼽히게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키패드를 누르자 삑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비밀번호만 남겨둔 내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자, 미리 말해둘 게 있어.”
“응? 뭔데요?”
“너무 흥분하지 마.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도 있지만, 죽이면 안 돼.”
“네? 그게 무슨···일단 알겠어요. 어차피 저는 어지간해서는 화를 안 내는 사람이라서요.”
르탄시에가 손사래쳤다.
판타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마지막 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연쇄적인 기계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의외로 안쪽은 평범하······뭐?”
“교주.”
내부를 둘러보던 두 사람이 굳었다.
회의실 책상 너머에는 사무칠 정도로 낯익은 사내 한 명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아벨이 미소지었다.
“오랜만이군. 소식은 대충 들었는데, 좋아 보이는걸”
“······살아 있었나.”
판타시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들보 같은 팔뚝 위로 힘줄이 솟구쳤다.
아벨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격분한 르탄시에가 야생 조류 같은 외침을 뱉어냈다.
“아벨! 이 더러운 배신자가!!”
뭐라 말릴 새도 없었다.
책상 위로 뛰어오른 그녀가 손가락을 뻗었다.
콰아아앙!
포탄처럼 쏘아진 염동력 덩어리가 아벨을 강타했다.
뒤로 날아간 몸이 벽면에 처박혔다
“당신···!”
르탄시에의 눈이 커졌다.
예상과 달리 아벨은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벽에서 몸을 빼낸 아벨이 부러진 코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크크···불 같은 성미는 여전하군. 분이 좀 풀렸나?”
“뭐, 뭐가 어째? 내가 이 한 방으로 당신을 용서해 줄 거라 생각한다면···!”
으득.
르탄시에의 입 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재차 주문을 영창하려던 차였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판타시온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르탄시에.”
“판타시온, 이거 놔요!”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지. 죽이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뭔가 분위기가 다르군.”
“···분위기?”
르탄시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부드러워 졌다 해야 하나?
신도들을 휘어잡던 살기가 누그러진 채였다.
두 사람의 면면을 둘러본 아벨이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군. 이렇게 네 명이 전부인가?”
“아마도. 오르세가 추가될 수도 있고.”
“오르세라면 그 마룡인가···확실히 날개 달린 놈이 있으면 편하지.”
아벨이 끄덕였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점멸 쓰는 드래곤이 멤버로 들어온다면 기동력이 훨씬 더 좋아질 테니까.
다만 그렇게 된다면 저항군의 인원 배분을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아벨이 전략을 토론하던 와중이었다.
“자, 잠깐만요. 로난 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아하. 내가 안 말했었구나.”
애초에 여기까지 온 목적을 잊어버리다니, 실수였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너네 둘. 우리랑 같이 대머리 월드로 가야 돼.”
“······네?”
“거인들의 본거지 말이야. 결행까지는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으니까, 먹고 싶었던 음식 있으면 배 터지게 먹어 둬. 행여나 잘못됐을 때 여한이 남지 않도록.”
“뎃.”
르탄시에가 얼어붙었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아서 정말 동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판타시온은 담담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드잡이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이번에 모든 걸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