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06)
2-29. 미래에서 온 재앙(2)
#29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내가 보고 있는 존재가 아카샤라는 것을.
석양을 등진 놈의 그림자가 모래톱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후우···후우···.”
숨이 가빠온다.
손바닥에서 배어난 식은땀이 칼자루에 스며든다.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젠장, 뭐 이래?’
근원을 흡수한 아벨이나 대머리 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카샤는 미동도 없이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레 그의 외모를 훑게 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키였다.
나도 제법 큰 편이다만 저 자식은 머리 반 개가 더 있었다.
그렇다고 옆으로 넓은 건 아닌지라 사람보다는 앙상한 나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뭘 저렇게 붙여 놨어?’
다음은 가면이었다.
뜯어진 천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가면은 원래의 형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나의 크기가 손바닥만 한 천쪼가리에는 제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일말의 조화나 규칙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기괴함을 더하고 있었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불현듯 오싹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몇몇 그림이 눈에 익었다.
특히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얼굴 중앙에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색이 다른 원 두 개가 겹쳐진, 낮과 밤 사이의 시간을 상징하는 문장.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로르혼의…!”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
저건 틀림없이 황혼 마탑의 문장이었다.
대마법사 로르혼이 주인으로 있는.
하지만 소름이 끼치는 것은 단순히 그림만 일치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장이 새겨진 천의 재질은 로르혼이 입었던 대마법사의 로브와 일치했다.
즉, 저건 진짜 로르혼의 옷에서 뜯어온 것이라는 말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도.’
황혼 마탑뿐만이 아니었다.
천쪼가리에 새겨진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이름 드높은 조직의 상징이었다.
여명과 만월 마탑, 제국 기사단의 문장도 찾아볼 수 있었다.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 죽이고 뺏은 거냐?”
아카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은 여전히 침묵하며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가라앉는 해가 주홍빛 유언을 흩뿌리고 있었다.
문득, 알싸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르탄시에.”
냄새가 난 곳을 힐긋거리자 르탄시에의 다리가 보였다.
두 쪽이 다 누워 있는 것이 꼭 휴식을 청하는 것 같았다.
울걱이며 샘솟는 피분수가 이게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죽을 죄를 지은 여자기는 했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시발.
‘움직여.’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의 맛과 함께 몸의 경직이 풀어졌다.
천천히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던 차였다.
“엉? 로난 님. 이런 곳에 계셨어유?”
“뭐야…끄윽, 문이 왜 열려 있찌이…?”
뒤쪽에서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몸을 돌렸다.
만취한 사내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한 채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당신들.”
“혹시 메이지 르탄시에 못 보셨어유? 바람만 쐬고 온다 해놓고 어디까지 간 거람.”
“어서 들어가요···끅, 나바르도제 님이 찾고 있어요. 내 아이를 못 봤냐면서 사방팔방 돌아다니시던데···으엣! 로난 님도 드래곤이셨어요?!”
오르세에게 무용담을 들려 달라 졸라대던 부하들이었다.
멈춰 있던 아카샤가 갑자기 움직였다.
망토가 젖혀지며 기다란 팔이 드러났다.
삭정이처럼 삐쩍 마른 팔은 망토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섬뜩한 위기감이 뇌리를 스쳤다.
“젠장, 피해!”
“크헉!”
순식간이었다.
몸을 돌린 내가 두 주정뱅이를 걷어찼다.
사내들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콰지직!
동시에 그들이 있던 공간이 벌어지며 새하얀 균열이 나타났다.
“흐에에엑?!”
“뭐, 뭐야 씨발!”
넘어진 사내들이 비명이 질렀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왔다가는 균열과 함께 몸이 양단됐을 터였다.
더는 쫄아 있을 수는 없었다.
검을 뽑아든 내가 사내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서 가서 나바르도제 님을 불러요! 저건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상대야!”
“로, 로난 님은유?!”
“난 괜찮으니까 닥치고 뛰기나 해!”
“아, 아, 알겠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사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두 명의 개죽음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안도할 수는 없었다.
아카샤의 몸에서 강력한 마력이 분출되고 있었다.
재차 위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놈 주변의 공간이 자글자글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개새끼야, 니가 뭔데 내 날다람쥐를 죽여!”
그럼에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지면을 박차며 놈에게 도약했다.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붉게 물들었다.
아카샤는 응수하듯 검지로 나를 겨누었다.
콰아아아아!
무형의 힘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르탄시에의 염동력 급류와 비슷한, 허나 훨씬 고차원적인 힘의 덩어리였다.
‘그래봤자 마법이야.’
비주얼은 끔찍했지만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내게 있어 마법은 모습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색종이와 마찬가지였으니.
덩어리를 베어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각!
묵직한 저항감이 칼날을 밀어냈다.
“무슨···!”
이런 건 처음이었다.
손맛이 뻑뻑했다.
두부처럼 부드러워야 할 마나가 썰기 버거울 만큼 단단했다.
베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완벽히 절삭하지 못한다면 방어하는 의미가 없었다.
미처 베어내지 못한 힘의 덩어리가 나를 강타했다.
“커억!”
풍경이 흐려졌다.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등이 어딘가에 닿는 감각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씨발···뭔데?”
한순간이지만 시야가 암전됐다 돌아왔다.
두개골에 금이 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흐릿해진 눈앞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여기는.”
팔다리가 바위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피가 새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머지않아 이곳이 아는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경치다.
정면 저 멀리 내가 날아온 해안가가 보였다.
내 몸은 겨울의 뿔의 측벽에 파묻힌 채였다.
“니미, 저기서 날아온 거야?”
어이가 없었다.
못해도 수천 미터 거리를 한 방에 날아온 것이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자 아카샤가 보였다.
그는 바다 한복판에 몸을 띄운 채 아까와 같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내가 목적이 아니었나?
숨을 고르며 바위에 파묻힌 몸을 빼내던 차였다.
콰아아아아!!!
화산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윽···!”
고막이 파열하는 줄 알았다.
아카샤가 있는 방향이었다.
고개를 들자 한쪽 팔을 뻗고 있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격동하는 지면 위로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바다가 난폭하게 몸을 뒤채며 육지를 휩쓸고 있었다.
“무슨 개짓거리를···흐으읍!”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기합을 내지르자 몸을 가두고 있던 석벽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막 뼈져나오려는 차였다.
가만히 팔을 뻗고 있던 아카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콰과과과광—!!!
균열로 뒤덮힌 지반이 일제히 폭발했다.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땅 속에서 뽑혀 나왔다.
“지랄.”
찰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대지를 부수며 솟구친 것은 저항군의 본부였다.
골조에 붙어 있던 흙과 바위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조명과 제반 시설에 사용되던 전선이 끊어지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곧이어 본부 안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연회가 한창이라 저항군 대부분은 저 안에 갇혀 있었다.
오르세와 판타시온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재미없었다.
위기를 감지한 몸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절벽을 부수며 빠져나온 내가 막 도약하려던 차였다.
하늘을 뒤흔드는 포효가 본부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이건···!”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콰쾅!
천천히 떠오르는 본부의 외벽이 부서지며 거대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홍색 머리카락이 겁화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르는가-!】
“나바르도제!”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녀는 일부만 드래곤으로 변한 채였다.
인간 형태를 유지한 채 뿔과 날개만 내놓은, 나를 품에 안은 채 지하를 날아다니던 그 모습이었다.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이 적색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이야!】
나바르도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마주친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세, 세상에···괜찮느냐?! 누가 그런···!】
“염병, 피해요!”
【조심하라니, 그게···윽!】
다행히도 그녀는 눈치를 채는 것이 빨랐다.
나바르도제가 어깨를 비틀었다.
원래 그녀의 가슴이 있던 자리 위로 하얀 균열이 그어졌다.
【이건···!】
조금만 늦었더라면 꼼짝없이 심장이 도려내졌을 터였다.
이를 악문 나바르도제의 시선이 아카샤를 향했다.
【그래, 네놈이구나.】
“······.”
아카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앙상한 손가락은 나바르도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느냐!】
붉은 날개는 한 쪽의 길이만 수십 미터에 이르렀다.
분노에 찬 동공은 세로로 가늘게 좁혀진 채였다.
노호를 터트린 그녀가 아카샤를 향해 돌진했다.
아카샤는 묵묵히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서걱!
날아오는 그녀의 주위로 일곱 개의 균열이 그어졌다.
스쳐도 치명상을 입는 공간 계열 마법이었다.
【이딴 걸로..!】
하지만 나바르도제에게는 어느 하나 맞지 않았다.
오르세보다 월등히 뛰어난 비행 실력이었다.
둘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아지던 차였다.
아카샤가 검지에 이어 중지를 뻗었다.
쿠아아아아아!
균열을 피하며 비행하던 나바르도제의 머리 위에서, 힘의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누님!!”
나를 날려버린 것과 같은 공격이었다.
심지어 훨씬 더 규모가 컸다.
하지만 나바르도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날아오던 그녀의 형체가 한순간 사라졌다.
“······!”
아카샤가 움찔거렸다.
등장 이래 처음으로 보이는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덩달아서 두리번거리던 차였다.
화륵!
아카샤의 머리 위로 불꽃이 피어났다.
시선을 옮긴 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사라졌던 나바르도제가 적염을 가르며 강하하고 있었다.
【감히 내 아이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길게 뻗은 다리는 화염에 휩싸인 채였다.
아카샤의 반응은 나보다 조금 더 느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한 바퀴를 회전하며 가속한 나바르도제가 그의 안면을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아카샤가 바다에 처박히며 하늘을 가리는 물보라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