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1)
42. 해주(1)
#42
“로난···님?”
로난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과 신입생 수석.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
재능 없는 이들을 양으로 취급하며 사자로 군림할 것을 종용하던 아칼루시아 가의 영애였다. 일그러진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아데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둘이 아는 사이였어?”
“네, 뭐···일단은.”
로난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제베트의 얼굴은 저러다 폭발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짝 끌어당긴 아데샨이 생글생글 웃었다.
“면식이 있다니 잘 됐네. 우리 에리가 잘 안내해 줄 거야. 무려 마법과 1학년 수석이니까.”
“어, 언니···에리라는 호칭은 좀···.”
“응?”
“아, 아니에요···그럼···가실까요?”
에르제베트는 아데샨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한 뒤 앞장서 걸어갔다. 로난이 헛웃음 쳤다. 담배를 핀 뒤 가래침을 뱉는 아셀만큼이나 어색한 모습이었다.
로난은 그녀가 입학 첫날의 연회에서 보여준 모습을 떠올렸다. 2학년 차석인 브라움을 대화를 방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지껄였던 대사는 아직도 로난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 양 떼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언제나 우습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나요?
그런 아가씨가 양 중의 양이라 할 수 있는 아데샨에게 찰싹 붙어서 애교를 떨고 있었다. 민망한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아데샨이 로난을 걱정스레 내려보며 말했다.
“별 일 없을 거야. 잘 다녀 와.”
“고마워요. 나중에 웬 흑염소 한 마리가 칼을 물고 찾아오면 저인 줄 아세요.”
로난은 에르제베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부지 서쪽에 있는 숲으로 로난을 안내했다. 벌써 이십 분가량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걷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길조차 끊어진 숲 속에서는 새소리만 들려왔다. 점점 으슥해지는 풍경을 둘러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나를 죽여서 여기 파묻을 생각이군 에리.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봐 버린 대가로 말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겠어요?”
드디어 말문이 트였다. 고개를 돌린 에르제베트가 도끼눈을 뜨며 로난을 째려보았다. 로난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다행이고. 아데샨 선배랑은 어쩌다 친해진 거냐? 지난번에는 양떼가 어쩌고 하면서 주접을 떨었으면서.”
“그, 그건 아실 필요 없잖아요···! 그리고 아데샨 언니는 다른 양들하고 달라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얼굴은 원래의 뽀얀 색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귀는 여전히 불에 달군 듯 빨갰다.
그나저나 다른 양들과는 다르다라. 알고 말한 건 아니겠지? 잠시 아데샨의 잠재성에 대해 생각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진짜 어디 가는 거야?”
“세크리트 교수님의 집무실이에요. 마법과에서 [저주와 해주] 과목을 맡고 계세요.”
“니미, 본업이 숲지기라도 돼? 뭔 놈의 집무실이 이딴 곳에 있어?”
“워낙에 특이한 분이라서요. 집무실의 위치를 알고 있는 학생 자체가 얼마 안 돼요.”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마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마법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격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에르제베트가 입을 뗐다.
“참,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
“그란 카파도키아의 장인들을 구하셨다면서요?”
에르제베트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더니 이윽고 로난의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후후, 아칼루시아의 정보력을 얕보시면 곤란하죠.”
에르제베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이 이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보통 큰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란 카파도키아 자체가 비밀스러운 곳이라 기삿거리가 되지만 않았을 뿐이에요.”
“그렇게 많이 알려졌어?”
“물론이죠. 아마 한동안은 바빠지실 거예요. 로난 님의 무용담을 들은 귀족가나 각 계층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거든요. 아마 로난 님을 미리 영입하려고 안간힘을 쓰겠지요.”
에르제베트는 심지어 황실 기사단에서도 로난을 주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로난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것이 많은 마당에 머리만 번잡해질 뿐이었다.
‘할 일을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겠어.’
십 분 정도를 더 걷자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아치형의 창문으로 노란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에르제베트가 별안간 로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아요.”
“응?”
“어쩔 수 없다구요···! 두 명 이상이 들어가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데 어떡해요?”
에르제베트는 별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성을 냈다. 로난은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어깨를 움츠린 그녀가 문을 열었다. 오두막 내부의 모습을 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집무실치고는 굉장히 가정적인데.”
지극히 평범한 농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낡아빠진 식탁, 주방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 벽난로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서는 웬 노파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로난이 노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이 세크리트 교수야?”
“아니에요. 가만히 계셔야 돼요. 아셨죠?”
에르제베트는 로난의 손을 잡은 채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삐걱였지만, 노파는 귀가 먹은 것처럼 졸고만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속삭이듯 읊조렸다.
“카쉬파. 루나지에. 델피림.”
그러자 졸고 있던 노파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노파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끝도 없이 벌어지는 위턱과 아래턱의 모습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노파의 입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커졌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 안쪽으로는 텅 빈 어둠만이 존재했다.
로난은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한순간 치솟은 예기에 검신을 감고 있던 붕대가 썰려 나갔다. 에르제베트가 로난의 손등을 눌렀다.
“괜찮아요.”
로난이 마지못해 칼자루를 놓았다. 덥썩. 노파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한순간 눈앞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다시 밝아졌다.
“제기랄, 뭐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노파와 오두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귀족가의 서재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라. 에르제베트.”
로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려한 서재의 한복판에는 웬 애새끼 하나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자앤지 남자앤지 구별이 되지 않는 외모의 아이였는데, 자기 몸보다 훨씬 커다란 옷을 걸치듯이 입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세크리트 교수님. 어제 말씀드린 학생을 데리고 왔어요.”
‘교수?’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얼핏 봐도 아홉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애새끼가 교수라니?
세크리트 교수라 불린 아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굴이 기억에 있는 아이구나. 입학식 때 나비로제 양의 검술을 사용했지?”
“나비로제···양?”
로난은 팔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태껏 필레온에서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은 교장인 크라티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점점 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을 덮은 세크리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네가 궁금해 할 순서대로 말해 주마.”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세크리트는 어리둥절해하는 로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원래 나이는 여든이 넘었다. 여기는 내 집무실 세파라치오. 저주가 새나가지 못하는 방이지. 그리고 이런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매일 해가 질 무렵이면 다시 어른의 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허.”
로난이 헛웃음 쳤다. 정확히 자신이 궁금해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아장거리며 서가에 다가간 세크리트가 위쪽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흠. 이거 좀 꽂아 주겠나? 위에서 두 번째 칸.”
“아···네. 그러죠, 제기랄.”
로난은 그렇게 했다. 유령이 귀를 잡아 비트는 기분이었다. 책이 제자리에 꽂혀 들어간 모습을 본 세크리트가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런 이상한 방법으로 찾아오게 해서 미안하구나. 세파라치오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단다. 동선을 최대한 복잡하게 꼬아 놔야 저주가 밖으로 못 나가거든.”
그러고 보니 문이나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별안간 세크리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로난이 손을 맞잡자, 그는 기쁜 듯이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주와 해주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세크리트다. 소문으로만 듣던 무예과의 신성을 직접 보게 돼서 기쁘구나.”
“로난이에요.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그런 꼴로 계신 거에요? 부인 되시는 분 취향?”
뒤에서 듣던 에르제베트의 표정이 굳었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 세크리트가 입을 열었다.
“아아···스핑크스라는 저주란다. 밤낮을 기점으로 신체가 변화하는, 내게 걸려 있는 다섯 가지 저주 중 하나지. 그래도 이건 나머지 네 개의 저주에 비하면 나은 편이란다.”
“예?”
악수를 나누던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이 작자에게 자신의 해주를 맡겨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저주의 대가라는 양반이 저주에 걸려 있다니. 대머리를 치료한다는 의사가 대머리인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세크리트는 로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쿡쿡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안심해도 좋단다. 전부 일부러 해주 하지 않고 있는 거니까. 나름대로 재미있는 저주들이거든.”
“어느 부분에서 안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잡담은 이쯤 하고···슬슬 네 저주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꾸나. 거기 가만히 서 있거라.”
딱! 세크리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서재 한구석에서 날아온 분필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세크리트는 몇 분에 걸쳐 로난을 중심으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주를 깨달은 계기가 뭐지?”
“웬 종양처럼 생긴 몬스터···음, 커스 아이였나? 그게 제 몸에 닿자마자 녹아내렸어요.”
그 말을 들은 세크리트가 눈썹을 치켜떴다. 문헌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허, 그 정도로 강한 저주에 걸렸다면 들어오자마자 알아챘을 텐데···나도 흥미가 생기는구나. 앗, 움직이지 말거라.”
뭐라 뭐라 중얼대며 마법진을 그리던 세크리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늘어지는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뒤 로난의 등에 손을 올렸다.
“···모습을 보여라.”
세크리트가 그리 말을 맺는 순간, 반투명한 문자들이 로난의 몸에서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꺄아악!”
“니미, 이게 다 뭐야?”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뒷걸음질치던 에르제베트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는 문자는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며 원기둥의 형상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종국에는 문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기둥이 로난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세크리트가 헛웃음쳤다.
“내 살다살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아주 오래된 저주구나.”
“오래된 저주요?”
“그래. 불이나 매춘만큼이나 그 역사가 오래된···이거 재미있군.”
세크리트는 그것이 로난의 몸에 깃들어 있는 저주가 실체화된 것이라 설명했다. 로난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문자들을 바라보았다.
‘내 몸에 이딴 게 들어 있었다고?’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자였다. 일정한 규칙성이 있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문자라는 사실도 몰랐을 터였다. 허공에 손을 휘적이던 세크리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대고 있었다.
“커스 아이가 닿자마자 녹아내릴 만도 해. 도대체 이런 설계를 어떻게 생각해낸 거지···?”
“저 괜찮은 거 맞죠?”
“기다려 보거라. 분석이 필요해. 대부분이 처음 보는 저주야.”
종이와 펜을 가져온 세크리트가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는 수 시간동안 그 짓거리를 하고 나서야 로난에게 움직이는 것을 허락했다.
“제기랄, 다리 떨어질 뻔 했네.”
-후우우욱···!
로난이 마법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는 순간 서재를 수놓던 문자들은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불현듯 눈의 간지럼증이 심해졌다. 눈을 거칠게 비벼대는 로난을 본 에르제베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왜 그렇게 눈을 비벼요?”
“그러게···젠장.”
간지럼증은 몇 분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세크리트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이 끼적이던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저 이제 죽어요?”
“···내게 다섯 개의 저주가 걸려 있다는 말을 기억하느냐?”
“예? 그야 기억하죠.”
“나는 지금껏 그게 인간이 감당하며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저주의 한계치라 생각했다. 아무리 미약한 저주라도 중첩되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을 붕괴시키기 마련이거든.”
세크리트가 몸을 돌렸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로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의 네 몸에는 열 개의 저주가 걸려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강력한 저주로.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지랄 났구만···그래서 그게 다 뭐 하는 저주인데요?”
“세 개는 금제. 일곱 개는 당장은 파악할 수가 없구나. 금제는···”
잠시 말을 멈춘 세크리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반투명한 장벽이 에르제베트와 로난을 갈라놓았다. 눈을 크게 뜬 에르제베트가 뭐라뭐라 입술을 웅얼거렸지만, 목소리가 넘어오지 않았다.
“사일런트 마법이다. 민감할 것 같은 이야기라서 말이지.”
“생각보다 섬세하시네요.”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구나. 금제에 대한 내 해석이 틀린 게 아니라면···너는 자연 상태의 마나를 다루기는 커녕 볼 수도 없을 테니까.”
로난의 눈이 커졌다.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제기랄. 뭔가 이상하긴 했어.’
칼도 똑바로 못 쥐는 얼간이들도 할 줄 아는 게 마나 감응이었다. 절망적인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지는 또 의문이 들었다. 로난이 질문했다.
“풀 방법은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풀리지 않는 저주는 없다고 공언하겠지만···이번만큼은 확신을 못 하겠구나. 대부분이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저주들이니. 아마 가능하더라도 오랜 연구가 필요할 가능성이 크니··.”
세크리트가 살짝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풀이 죽은 아이였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도 안 되는 건가. 로난이 쓴웃음을 짓는 차였다. 종이를 빤히 바라보던 세크리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금제 하나 정도는 해주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예?”
로난의 몸이 굳었다. 세크리트는 대답하는 대신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에르제베트와 두 사람을 가로막던 사일런트 마법이 사라졌다. 그녀는 다소 날이 선 투로 말했다.
“흥, 저만 쏙 빼놓고 두 분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거죠?”
“에르제베트. 네 마나를 조금 빌려줄 수 있겠느냐.”
“네? 제 마나를요?”
에르제베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크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분필을 집어든 그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 세크리트 교수님?”
분필을 움직이는 세크리트의 손놀림에는 주저가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복잡한 마법진이 세 개나 그려졌다. 세트리트는 일렬로 늘어선 마법진 중 가장 위의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다. 여기에 머리를 두고 누워 보겠느냐 로난.”
“누우라고요?”
로난은 그렇게 했다. 이상한 문자가 빼곡하게 적힌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로 마법진을 베고 눕자 자연스럽게 중간의 마법진이 가슴 아래로, 맨 아래의 마법진이 발아래로 오는 형태가 되었다. 세크리트가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지금부터 시도할 해주법은 내가 개발한 해주법이란다. 실패할 경우 자아가 손상되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하지.”
“염병, 그거 괜찮은 거 맞아요?”
“원래 저주와 해주에는 위험이 뒤따르는 법이지. 너는 일신의 무력이 강력하니 아마도 괜찮을 게다. 나는 네게 걸린 금제 중 하나를 심상 세계로 만들어서 네 의식에 투영할 거란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세크리트가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세계에서 너를 얽매고 있는 저주를 베고 나오면 된단다. 아마 실감나는 꿈을 꾸는 기분일 거다. 커스 아이 덕분인지는 몰라도, 금제 하나가 상당히 약해져 있었어···.”
“그러니까 꿈에 들어가서 저주를 베고 나오라고요? 그게 어떻게 생긴 줄 알고?”
“그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게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슬슬 시작해야겠구나. 에르제베트, 내 머리에 손을 올려라.”
“네, 네에?”
세크리트가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에르제베트가 그의 머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자 세크리트는 로난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마나가 빨려나가는 것을 느낀 에르제베트가 짧게 신음했다.
“꺄앗…!”
“조금만 참아주거라. 워낙에 마나가 많이 소모되는 주문이라.”
로난은 이 괴상망측한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크리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다.”
그의 입술 사이로 노랫소리같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자장가 같기도 했고, 죽은 이를 기리는 만가처럼도 들렸다.
문득 로난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글자가 빼곡한 천장은 사라지고 익숙한 색의 하늘이 드리워 있었다. 로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덕 아래로 세워진 마을과, 마을을 따라 굽이치는 강줄기가 보였다. 나지막한 읊조림이 로난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님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