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10)
2-32. 소망
#33
– 소망을 이루어 주는 능력이라고요?
– 그래. 아벨도 끝내 가져가지 못한 힘이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기억이다.
나는 대머리 선왕에게 향하는 얼음 통로를 걷고 있었다.
말을 하거나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막 회복 장치에서 나온 아버지가 내 등에 업혀 있었다.
– 그럼 그걸로 대머리들을 조지면 되는거 아니에요? 굳이 이렇게 뺑이를 칠 필요가 있나?
–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생명에 관여할 수 없어.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초화산의 분화를 막아냈지만···님버튼보다 작은 고향의 주민들은 구하지 못했단다.
아버지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부모님···그러니까 내 할아버지 할머님 되는 분들과 마을 사람들은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예외는 오직 아벨 뿐이었다.
– 게다가,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행위가 가능해진다 해도 나는 별 도움이 안 될거란다. 소망을 구현하는 힘은 이제 내게 없거든.
– 엥? 그럼 누구한테 있는데요?
– 이릴. 내 딸에게 옮겨 갔단다. 때문에 그 아이에게는 너보다 훨씬 지독한 저주를 걸어 둬야 했지···아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소망을 이뤄주는 힘을 가져간 것은 놀랍게도 누나였다.
어릴 때부터 품어왔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이 안 됐거든.
그렇게 예쁜데도 집적거리는 개새끼 한 마리 꼬이지 않았으니.
누나의 얼굴을 떠올린 내가 실소를 머금었다.
-다행이네요.
– 응?
– 그 힘을 물려받은게 누나라서 다행이에요. 나한테 왔으면 분명 악용하거나 쓸데없는 짓거리로 낭비됐을 테니까. 님버튼을 굽이도는 강은 당장 맥주로 바뀌었을 걸요?
안 봐도 뻔하다.
뭐가 됐든 간에 한심한 짓을 무한으로 즐겼겠지.
결국에는 그마저도 질려서 떠돌이가 됐을 테고.
자조 섞인 말을 들은 아버지가 설핏 미소지었다.
-후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 예?
– 네가 힘을 물려받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너는 착한 아이거든. 카샤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를 거다.
– ···뭐 잘못 잡쉈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웃음만 흘렸다.
괜히 멋쩍어진 내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음 동굴은 끝이 없다 느껴질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소망, 소망이라···
【로난!】
.
.
.
“······그거 참 편하기는 하겠네.”
【로난! 정신 차려라, 로난!!】
“엉?”
【제기랄, 갑자기 얼이 빠져서는 뭘 하는 거냐!】
격양된 목소리가 귓가를 흔들었다.
눈을 뜨자 화가 잔뜩 난 오르세의 얼굴이 보였다.
세로로 길게 좁혀진 동공은 당장에라도 광선을 내뿜을 것 같다.
【준비해라! 지상이 눈앞이다!】
“아아···맞다.”
오르세는 나를 옆구리에 끼운 채 비상하고 있었다.
대지의 절단면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래, 이거 내가 벤 거지.’
어지럽던 시야가 바로잡혔다.
불법 약물의 부작용 때문에 잠깐 의식이 비몽사몽해졌던 것 같다.
나는 선왕의 피를 마신 뒤 아카샤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좀 어지러워서.”
【이런 참격을 날린 놈이 휘청거리다니···!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거 미안하다니까. 그나저나 저건 왜 저래?”
고개를 들자 선명하게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균열 틈새로 오색찬란한 색채가 스며들고 있었다.
세니엘이 파괴되며 형성된 구체는 불과 어둠으로 들끓던 초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채였다.
“누님이 뭔가 해낸 건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확실해 보였다.
색이 조금 덜 위협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전해져 오는 힘의 크기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완전히 정신을 차린 내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뭐, 가보면 알겠지.”
【나간다!!】
출구는 어느새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불현듯 폭발음과 함께 내벽이 무너져 내렸다.
또 파편 하나가 지상에 떨어진 모양이다.
바위와 얼음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렸다.
압사하기에 충분한 양이지만 오르세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나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수십 획의 참격이 눈앞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앞을 가로막던 모든 것이 토막이 나며 무너져 내렸다.
폭발을 헤치며 빠져나온 오르세가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가관이군.”
시야가 탁 트였다.
지상의 풍경을 본 내가 이를 악물었다.
지랄이 따로 없었다.
본부를 통째로 삼킬 만한 구덩이 십수 개가 곳곳에 생성되어 있었다.
구체의 파편이 떨어진 흔적이었다.
저항군이 있는 장소는 덮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를 본 사내 한 명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저, 저기! 로난 님이랑 오르세 대장이다!”
“뭐? 그럼 방금 땅이 갈라진 게 설마···!”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대피하라 외치려 했지만 의미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가 실패하면 다 죽을 테니까.
올려본 밤하늘은 구체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껏 눈에 담아온 광경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격렬하다.
화염과 그림자.
출처를 알 수 없는 색채들이 뒤섞인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솔직히 저기에 몸을 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들어가서 겪게 될 상황이 짐작도 가지 않는다.
물론 달라지는 건 없다.
나와 오르세는 검은 유성이 되어 구체를 향해 솟구쳤다.
우리가 막 진입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아···!
멀지 않은 곳의 하늘이 찢어지며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먼저 구체를 빠져나온 것은 나바르도제였다.
다만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닌 듯했다.
머리부터 추락하는 그녀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바르도제···!】
오르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치명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샤 이 자식이 기어코···!’
상승하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오르세는 나바르도제와 구체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 씨발 진짜, 뭘 고민하는 거야?
앞머리를 쓸어넘긴 내가 오르세에게 외쳤다.
“오르세. 나는 괜찮으니까 가서 누님을 구해! 구하고 나서 다시 돌아와!”
【하지만 너는 날개가···!】
“닥치고 가, 이 새끼야! 나처럼 죽을 때까지 후회하고 싶냐?!”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오르세의 안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뻐억!
거칠게 젖혀졌던 고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숨을 고르던 오르세가 이를 악문 채 읊조렸다.
【···먼저 죽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닥치고 멀리 던져 주기만 해!”
오르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내 팔을 붙잡아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나바르도제에게 회전하며, 쭉 뻗은 내 발을 멀리 밀듯이 걷어찼다.
파아아아앙!
길항한 우리의 몸이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오르세의 몸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변한 그가 나바르도제에게 도달함과 동시에 구체가 나를 집어삼켰다.
“흐읍.”
눈살을 찌푸렸다.
구체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일체감 없는 빛과 색채가 와류하고 있었다.
세니엘이 머금고 있던 생명력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혼돈이라는 개념을 형태로 옮겨온 듯한 풍경이었다.
‘잘도 이런 곳에서 싸우셨군.’
누님이 존경스러웠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이 전신을 쿡쿡 쑤셔 대고 있었다.
곳곳에는 진홍색 불씨가 흩날리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격전을 벌였던 흔적이었다.
패배했음에도 그녀의 힘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저항하고 있었다.
“씹새끼, 어디 숨었어?”
열불이 치밀었다.
서둘러 아카샤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군데군데는 아카샤를 찾아 헤메던 와중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색채를 찢으며 날아든 힘의 격류가 내게 충돌했다.
“큭!”
간발의 차로 막아냈다.
속절없이 날아가던 내가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퍼어엉!
검기가 폭발을 일으키며 속도가 줄어들었다.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폭풍 한가운데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만신창이가 된 아카샤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 보고 있었다.
“아카샤!!”
격분하며 외쳤다.
아카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우두커니 선 채 추락하는 나를 관조하고 있었다.
“이 자식···!”
역시 마음에 안 드는 새끼였다.
저 자식은 알고 있다.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날개도, 탈것도 없는 내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나도 이판사판이었다.
선왕의 피까지 마셨으니 정말로 할 수 있는 짓은 다 했다.
칼자루를 움켜쥐자 오러가 터져 나왔다.
한층 강렬해진 노을이 아카샤를 휘감았다.
그리고···.
“······씨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지를 양단했음에도 내 오러는 닿지 않았다.
겨우겨우 쥔 지푸라기가 흩어졌다.
놈의 가면 한복판에 균열이 드리웠다.
입을 연상케 하는 균열 틈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나왔다.
『■.』
비웃는 듯한 음성이었다.
놈이 재차 손가락을 뻗었다.
무형의 파도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검격으로 응수한다.
피를 마신 뒤 예리해진 검격이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다.
콰직!
완벽하게 절단되지 않은 힘의 파동은 나를 멀리 밀어서 날려버린다.
“너는 도대체···.”
튕겨나는 느낌과 함께 놈이 멀어진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저 새끼는 도대체 뭐지?
뭔데 내 검이 닿지 않는 거지?
허나 절망에 침식되는 와중에도 내 손은 움직인다.
다시 발치에 폭발을 일으키며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승산이 있건 없건 간에.
숨을 고른 뒤 검기를 뿌리려던 차였다.
갑자기 저 아래에서 솟구친 무언가 내 멱살을 휘어잡으며 치솟았다.
“어?”
오르세는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한 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벨.”
“한심한 애송이 같으니라고. 도저히 못 봐주겠군.”
아벨이 으르렁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머리 월드에서 돌아온 이래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계속 보고 있었냐?”
아벨은 침묵했다.
그는 내 멱살을 잡은 채 하늘 높이 솟구쳤다.
화염과 그림자가 흩어지며 아카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벨이 나를 잡지 않은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형님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뭐라고?”
“젠장, 내 계획을 박살낸 주제에 저런 부지깽이 같은 놈한테 지지 말란 말이다!”
아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개소리냐고 반문할 틈도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내던지며 아카샤를 향해 도약했다.
역시 빠르다.
그의 참격이 하늘을 수놓음과 동시에 아카샤가 손가락을 뻗었다.
콰아아아앙!
공성추에 맞은 것처럼 날아간 아벨이 구체 바깥으로 떨어졌다.
“크아아악!”
“아벨!”
살짝 기대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허나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다.
아카샤의 신경은 모조리 아벨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채였다.
그러니까, 칼을 휘두르면 닿을 만큼 가까이.
아벨의 추락을 확인한 아카샤가 나를 돌아보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게 마지막 기회일 터였다.
아카샤가 손가락을 뻗었다.
무형의 급류가 정면으로 덮쳐왔다.
어차피 물러날 곳은 없다.
나는 몸 전체를 크게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나비로제 류 회전검.
은사에게 처음으로 배운 기술이었다.
카가가가각!
칼날과 마법이 격돌하며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다.
“크윽!”
아니나 다를까 손맛이 뻑뻑하다.
역시 이 자식의 마법에는 뭔가 비밀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칼자루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회전에 힘을 더했다.
화르륵!
불현듯 칼날 뒤편으로 불꽃이 피어오른다.
주변에 흩날리던 불씨가 검에 들러붙고 있었다.
“이건···!”
눈이 커졌다.
나바르도제가 나를 돕고 있었다.
불씨는 검에 들러붙으며 힘을 더하는 중이었다.
불이 크고 밝아질 때마다 검격이 가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재앙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적이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 네가 물려받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긁어 마신 피에 소망을 이루어주는 힘이 남아있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허무맹랑하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워낙에 답이 없는 상황이니.
나는 생각했다.
만약, 만약에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 소망을 빌 수 있다면.
딱 하나라도 빌 수 있다면.
“······이 자식한테 한 방만 먹일 수 있게 해 줘.”
속삭이듯 읊조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이 손등 위로 더해졌다.
굉장히 작고 미약했지만 팽팽하던 균형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다.
정체되어 있던 검격이 앞으로 나아간다.
마법이 갈라진다.
아카샤의 가면에 떠올랐던 균열이 사라졌다.
『■?』
놈은 황급히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무려 다섯 개다.
내 몸을 짓누르는 힘이 급격하게 증폭했다.
“큭!”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역류한 핏물이 이빨 사이로 터져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솔직히 존나 아프다.
“흐으으읍···!”
그래도 버틴다.
요술쟁이 따위에게 근성으로 질 수는 없다.
칼날이 놈의 망토를 횡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단단하지만 베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검신은 이제 완전히 화염에 휘감긴 채였다.
화르륵!!
점점 커지던 불이 한번 더 폭발했다.
망토 중간에 걸려 있던 칼날이 반대편으로 빠져 나온다.
아카샤의 몸 위로 이글거리는 선이 그어졌다.
『······!!!』
소리는 없었다.
분리된 아카샤의 상반신이 하늘로 솟구쳤다.
검신을 휘감았던 불길이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어어엉—!
요동치던 구체가 흩어지며 너른 밤하늘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