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13)
2-36. 두 번째 평행선
#36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돌로 만들어진 지저분한 벽이었다.
“으, 씨발···.”
머리가 어지럽다.
꼭 술통 속에서 표류하다 태풍에 휩쓸린 느낌이다.
뗏목을 타고 여명해를 횡단할 때도 이딴 멀미는 겪지 않았었다.
“여기가 어디야···?”
생소한 길이다.
그래도 다음 평행세계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직 대머리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은 시간대라는 것도.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건물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맞은편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벽돌 특유의 차가움이 불쾌하다.
‘뒷골목?’
고개를 들자 좁은 하늘이 보였다.
내가 등지고 마주보는 두 채의 건물이 시야를 제한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눅눅한 날씨였다.
무리 지어 움직이는 먹구름은 당장에라도 소나기를 토해낼 것 같았다.
미지근한 바람에서는 물 냄새가 풍겼다.
‘일단 제대로 도착하기는 한 것 같군.’
천만다행히도 불시착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제일 먼저 허리춤을 확인했다.
검은 무사히 매달려 있었다.
팔다리로 시선을 옮기기 무섭게 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챙길 줄이야···나 조금 감동받았을지도.”
“시끄러 인마.”
“후후, 부끄러워 하기는. 누나는 다 이해해.”
멀미만 아니었어도 사포로 한 번 갈아 줬을 터였다.
칼잡이가 칼을 먼저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팔다리에 별다른 지장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도 각각 열 개씩 잘 붙어 있었다.
중요 물품이라 할 수 있는, 아카샤의 혈액이 든 병과 세니엘의 파편도 무사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싸맨 채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생각난다.”
드문드문 떠오른다.
나는 나바르도제 누님과 눈물겨운 작별인사를 나눈 뒤 균열로 진입했다.
소멸하기 직전의 균열 내부는 아주 지랄이 따로 없었다.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도 다 무너져 내리고, 평행세계와 이어진 반대편 차원문은 체감상 수천 미터 가까이 멀어진 채였다.
그새 보안 마법까지 야무지게 깔아 놓은 덕에, 균열을 빠져나오는 데는 정말 뭐 빠지는 고생을 해야 했다.
“아카샤.”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섯 개의 눈이 나를 노려보던 광경이 아직도 선명했다.
저번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적을 보이기는 했지만,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 잡아 족쳐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내 날다람쥐를 멋대로 죽인 괘씸죄도 포함해야 하고.
다만, 놈의 목적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새끼는 도대체 바라는 게 뭐야?’
뭔가 사회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알겠다.
미래에 마음에 안 드는게 있으니 평행 세계의 대머리들을 끌고 가서 패악질을 부리는 거겠지.
그런데 망할 놈의 세니엘은 도대체 왜 끄집어 내서 부순 걸까?
도대체 왜?
그게 뭔지는 또 어떻게 알았고?
게다가 나바르도제 누님의 말대로라면, 놈은 자신을 딱히 공격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에잇, 별 미친놈한테 잘못 걸려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은 채 담뱃대를 물었다.
원래 광인의 생각은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이번에는 좀 경우가 달랐다.
“후우우우···살 것 같군.”
연기를 마시니 멀미가 좀 잦아들었다.
생명력 넘치는 공간에 있었어서 그런지 맛이 죽여줬다.
‘나는 이걸 평생 못 끊을거야. 그렇고 말고.’
하얀 연기가 허공에 흩어진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함께해온 동반자였다.장담컨데 나는 결혼한 뒤에도 흡연자로 남을 터였다.
애아빠가 되고 나서 끊는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그건 전부 겁쟁이에 불과했다.
어림도 없지.
사랑과 이건 별개라고.
“엇차.”
연기를 서너 번 뱉고 마시자 상태가 괜찮아졌다.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차가웠다.
좁디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는 순간 황량한 주택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야 시발.”
그리고, 나는 석상이 된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거리의 형태가 눈에 익었다.
분위기나 건물의 상태는 완전히 다르지만 분명 같은 곳이었다.
“설마 여기···엉?”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주택의 2층,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음침한 노인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쪽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었다.
“아, 사람이 있었구나. 영감님. 여기가 혹시···”
내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던 차였다.
쾅!
부숴버릴 기세로 창문이 닫혔다.
“젠장, 노친네가 뭘 잘못 잡쉈나.”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둔탁한 소리가 거리에 메아리쳤다.
거의 동시에 커튼이 쳐졌다.
햇살 한 점도 통과시키지 않을 것처럼 두터운 암막은 사회와 집을 단절하는 차단벽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동물원을 탈출한 맹수도 저딴 식으로는 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나는 거의 모든 건물의 창문이 저런 커튼으로 가려진 것을 눈치챘다.
도대체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 의문이었다.
역병이라도 창궐한 걸까.
“엇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쿵!
나는 사뿐하게 지붕 위로 도약했다.
방금 전에 노친네가 있던 집이었다.
“흐어억!”
발아래에서 메마른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리로 미루어 보아 엉덩방아라도 찧으신 것 같았지만, 고의였으므로 딱히 미안하지는 않았다.
건물 위에서는 인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뭐야, 진짜 제도였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내가 헛웃음을 쳤다.
설마 싶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내가 있던 곳은 제도 동쪽의 거주 지구였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한 도시의 전경이 지평선 언저리까지 펼쳐진 채였다.
“겁나게 반갑네 그래.”
연기를 뱉으며 콧잔등을 문질렀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아직 거인들의 침략을 당하지 않은 발론은 내가 온 세상보다 훨씬 더 멀쩡했다.
길과 건물의 배치도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고, 특유의 웅장한 자태도 여전히 건재했다.
‘뭐가 이렇게 조용해?’
다만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도시 전체가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앙에 자리잡은 황궁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대륙 전체에서 오던 상인과 손님으로 북적거리던 시장에는 고작 짐마차 몇 개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황제가 죽기라도 했나?’
분위기만 보면 대륙 제일의 대도시는커녕 촌구석 광산 마을보다 못했다.
때마침 날씨도 꾸리꾸리한지라 보고 있자면 나까지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아카샤를 추적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간대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예 굴뚝을 타고 올라간 내가 도시를 보다 면밀하게 살피던 와중이었다.
“어.”
좌우로 움직이던 시선이 한 곳에 멎었다.
황궁 너머 서쪽 멀리, 익숙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 수십 개가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벌어진 내 입 사이로 그리운 이름이 새나왔다.
“······필레온.”
틀림없었다.
백탑의 소도시였다.
제도와 역사를 함께해온 천년의 교육 기관은 멸망을 앞둔 세상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창과 스승들의 면면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교장님이나 나비로제 교관님이 계실지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굉장한 도움이 될 터였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필레온을 향해 이동했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꺅! 도둑이야?!”
“저, 저희 집은 아무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섭정 만세!”
“네. 네. 죄송해요. 잠깐만 지나가겠슴다.”
잠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제도의 넓이가 넓이인지라 이동에만 집중해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탓!
그렇게 수백 개의 지붕을 밟으며 나아가던 내가, 마침내 뛰어내렸다.
“캬. 이게 얼마만이냐.”
필레온의 웅장한 교문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주말이나 동아리 활동을 갈 때마다 뺀질나게 들락거리던 문은, 원래 세상과는 달리 부서진 곳이 없었다.
이대로 들어가서 직진하면 갈레리온 관에 갈 수 있었다.
조금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내가 지냈던 기숙사인 나바르도제 관이, 그 옆의 숲으로 들어가면 아데샨과 밀회를 나누던 분위기 좋은 공터가 나타난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그렇고 말고.’
수 년도 더 지났는데 바로 어제 일 같았다.
나는 기분 좋은 추억을 되새기며 교문으로 향했다.
시계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이 시간대면 아직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어야 할 때였다.
머지않아 교문 앞에 당도한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엉? 뭐야?”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다.
반투명한 역장 하나가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다.
생쥐 한 마리의 침입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완고한 방어막 위에는 이런 글귀가 떠올라 있었다.
[섭정 폐하의 칙령에 의거한 바, 본교는 별도의 공지가 있을 때까지 무기한 휴교합니다.]“섭정이라고라?”
미간이 구겨졌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였다.
황제가 아닌 섭정이라니, 44대까지 해먹은 발론의 왕조에 지장이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할 짓 없는 작자군.”
자세한 전말은 몰라도 분명 한심한 이유로 닫은 것일 터였다.
원래 세상에서 필레온 아카데미가 휴교한 것은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밖에 없었다.
겨울의 마녀가 강림하고, 눈과 얼음의 짐승이 학생들에게 달려들 때도 수업을 진행하던 곳이었거늘.
당연히 협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칼자루를 잡아당기자,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아무도 없지?’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역시 기괴하다.
원래대로라면 필레온 근처는 여름철 해수욕장처럼 북적거리기 마련이데.
어쨌거나 보는 눈이 없다면 잘 된 일이었다.
빠르게 호를 그린 칼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딱히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스각!
두부를 자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교문을 감싼 방어막이 잘려 나갔다.
“이거지 씨발.’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내 능력이 망가진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아카샤의 마법 뿐이다.
좆같은 새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막 문턱을 넘으려던 차였다.
촤르륵!
웬 낡은 종이 한 장이 날아와 정강이에 휘감겼다.
‘쓰레기도 제대로 안 줍다니, 학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나 때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종이의 질감을 보아하니 길거리를 떠돈 지 한참이나 된 친구 같았다.
별 생각 없이 주워드니 뭔가 적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글씨를 따라 읽었다.
[검거 및 사형 집행 완료: 요제프 시니반 데 그랑시아]-그랑시아의 반역자들을 발견할 경우 즉시 신고할 것-
“······뭐?”
심장에 거대한 추가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뭘 보고 있는건지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요제프 시니반 데 그랑시아라면 분명 슐리펜의 아버지였다.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 그랑시아의 가주.
그런데 반역자라니?
“씨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기 너! 당장 멈춰라!”
한창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기를 감지해서 어깨를 비틀었다.
쉬릭!
화살 한 발이 내 가슴팍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날카로운 촉에는 마비독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발려 있었다.
색깔로 보아하니 곳간 두꺼비 체액이군.
제국군에서 쓰는 물건인데.
“피, 피했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갑옷과 장창, 화살로 무장한 병사들이 대여섯 명 포진해 있었다.
내가 종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에 접근한 것 같았다.
제일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준엄하게 말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그랑시아의 첩자야. 네 주인 슐리펜을 만나러 온 것이냐?”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