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14)
2-37. 도망자(1)
#37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내가 슐리펜 놈의 부하라니, 이딴 개소리를 듣는 날도 다 오는구나.
가장 계급 높아 보이는 사내···제길, 콧수염이 덮수룩하니 그냥 ‘콧수염’이라 칭하겠다.
내 말을 들은 콧수염이 미간을 찌푸렸다.
“뭣이, 개똥?”
“그럼 그걸 말로 받아들여야 하냐? 경우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대 빨아주지 않고서는 평정이 유지되지 않을 것 같았다.
콧수염과 뒤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뭘 오해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 자식의 부하도 아닐 뿐더러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라. 오히려 물어보고 싶네. 그랑시아 가문이랑 슐리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머리들이 점령했던 저번 세상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내가 뱉어낸 연기를 병사들에게 흩뿌렸다.
“콜록! 콜록!”
“이런 상황에서조차 모른 체라니···반역자 가문의 녹을 먹으며 살아온 버러지는 제 주인에 대한 의리도 없는 것이냐?”
“아니, 진짜 모른다고 돌대가리야. 너 어릴 때부터 머리 나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지?”
“시치미 떼지 마라! 온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모른 체 잡아떼는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제국의 샛별로 추앙받던 검사가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사건을!”
“······뭐?”
하마터면 담뱃대를 떨어뜨릴 뻔 했다.
커다란 돌덩어리가 날아와 관자놀이에 처박힌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그 슐리펜이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고?
그래서 섭정이 들어선 거고?
역사가 어떤 식으로 뒤바뀌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콧수염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놈이 그랑시아의 첩자라는 증거도 충분하다. 출입이 금지된 시설을, 그것도 그랑시아 쓰레기들의 밀회 장소로 의심되는 필레온 아카데미를 기웃거리는 걸로 모자라 차단막을 파괴하다니···신고를 받자마자 출동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니. 조금만 더 설명해 봐.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마지막까지 자수할 생각은 없나 보군. 전원, 놈을 포박하라!”
콧수염이 창을 뻗으며 외쳤다.
나는 아직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저 자식은 아닌 것 같았다.
대기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석궁을 발사했다.
쉬리릭!
여섯 발의 쇠뇌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마비독이 발라진 화살촉은 급소가 아닌 팔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검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가볍게 몸을 비틀자, 빗나간 쇠뇌들이 교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또, 또 피했다!”
“놈···.”
병사들이 경악했다.
콧수염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엇비쳤다.
칼자루를 톡톡 두드리던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귀찮게시리.”
그냥 빨리 아카샤나 찾아볼 거 그랬다.
간만에 학교 구경이나 하려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무시하고 할 일을 하는 게 효율적이긴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얼마 없는 친구 중 한 명이(물론 이쪽 세상에서는 일면식도 없지만)그것도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범죄자가 되어 뒤쫓기고 있다니.
궁금해서라도 못 참지.
콧수염이 눈썹을 으쓱였다.
“제법이구나. 번견이라도 그랑시아의 번견은 다르다 이거냐?”
“형씨. 지랄은 적당히 하고 물러나는게 어때.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댁 안 괴롭히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줄 테니까.”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거기까지다. 내가 직접 상대해 주지. 히요우읍···!”
갑자기 콧수염이 병신 같은 소리를 냈다.
창대를 타고 올라온 탁한 기운이 날 부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나의 결이 독특한 걸 보니 오러였다.
빽으로 들어온 놈팽인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듯했다.
“엉?”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잿물마냥 희멀건 오러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 자식을 지금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멀미를 참아 가며 기억을 더듬던 차였다.
땅을 박차며 도약한 콧수염이 창을 내질렀다.
몸을 슬쩍 비트는 순간 회색 선이 눈앞에 그어졌다.
“오.”
“눈썰미가 좋군. 이걸 피하다니.”
시선을 내리자 내 가슴 앞에 멈춰 있는 창대가 보였다.
과연 썩 훌륭한 일격이었다.
콧수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놈은 결국 아는 전부를 토해내게 될 거야. 비명의 요새에 상주하는 심문관들이 네놈의 살과 뼈를 해체할 거다.”
“뭐야, 로돌란은 아직 그대로 있나 보네?”
이건 꽤 반가운 소식이었다.
제국이 이딴 상황인데도 멀쩡하게 영업을 하는 걸 보면 역시 전문직이 좋기는 했다.
카라카 영감님이 생각나네, 잘 지내려나?
그리운 추억에 미소짓던 와중이었다.
“하압!”
다시 창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한층 더 격렬했다.
회색 오러를 머금은 창날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집요하게 나를 추격했다.
역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마나였다.
병사들은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대장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시다니까.”
‘금군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지. 암.”
“하하, 팔다리를 모조리 잘라서 데려가 주마!”
콧수염이 웃었다.
쉬릭!
쭈그려 앉는 순간 정수리 위로 창날이 스치며 지나갔다.
놈의 눈에는 내가 벌벌 떨면서 간신히 공격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신바람이 난 면상을 보니 슬슬 희망을 수확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팔다리라···그것도 좋지.”
마침 제국군이면 아는 것도 많을 터였다.
나는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빼냈다.
그리고 눈앞에서 클클거리는 콧수염의 얼굴에 연기를 뿜었다.
“푸우.”
“콜록! 컥! 감히···!”
콧수염이 기침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피우는 남부산 연초는 어지간히 독한 놈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병사들과 조우한 이래 처음으로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하얀 검신이 뽑여 나옴과 동시에 콧수염의 팔다리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가볍게 춤을 춘 칼날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네 줄기의 피보라와 함께 팔다리가 솟구쳤다.
“어?”
놈의 눈이 커졌다.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덩그러니 남은 몸통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울걱거리며 샘솟는 핏물이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관전하던 병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엎드려 있던 콧수염의 입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 크하아아아악!!”
“자. 너희는 어떻게 할까.”
검을 한 바퀴 돌려쥔 내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발가락 하나까지 굳어 버린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아아···.”
“괴, 괴물이다.”
벌벌 떨려오는 다리가 애처로웠다.
고민이 되었다.
이것들을 스튜에 들어가는 당근처럼 깍뚝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당장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간을 찢어 발기는 마법사와 싸우고 온 나였다.
‘까라면 까는 족속의 서러움이란.’
하지만 병사들의 흔들리는 눈빛이 내가 인간 요리사로 전직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솔직히 살생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이 세상은 쭉 존속될 테고, 저번 세상과는 달리 아직 완전히 망해 버린 게 아니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내가 파리를 내쫓듯 손짓했다.
“에이, 됐다. 당장 꺼져.”
“허어억! 넵!”
“다들 도망가!”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아났다.
냅다 던져버린 무기들이 쇳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그래, 이게 맞았다.
어차피 바로 앞이 주택가라 누군가는 나를 봤을 터였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거나, 중죄를 지은 씹새끼들이 아니면 내가 직접 심판하는 것은 지양하고 싶었다.
병사들을 떠나보낸 내가 콧수염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자, 너는 나랑 가자.”
“끄아아악! 놔, 놔라!”
놈은 피를 뚝뚝 흘려 가며 몸부림쳤지만 허사였다.
울어도 빌어도 한 번 잘린 팔다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이 교문 안쪽에 멈춰섰다.
확실히 여기보다는 필레온 내부가 더 대화를 나누기 좋을 것 같았다.
“흐으으읍···.”
숨을 들이쉬자 허벅지가 부풀었다.
나는 콧수염을 한 손에 든 채 교문 안으로 도약했다.
콰아앙!
포석이 갈라짐과 동시에 몸이 솟구쳤다.
그리웠던 교정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백 개가 넘는 첨탑.
입학식이 열리던 대광장, 부지를 휘감아 도는 강···.
거의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립군.”
“사, 살려 줘!”
아벨에게 파괴당한 원래 세상보다 훨씬 사정이 나았다.
다만 무성해진 나무와 잡초.
건물 외벽에 낀 때가 상당히 오랫동안 시설이 방치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잡티 하나 없어야 하거늘.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와중이었다.
갈레리온 관의 거대한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네.”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나비로제 누님의 수업을 듣기 위해 하루다 멀다 들락거렸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은 어떻게 됐으려나.
아직 살아 있으면 좋을텐데.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겠지.’
어차피 아카샤를 뒤쫓다 보면 알게 될 터였다.
갈레리온 관까지 가기에는 조금 추진력이 모자랐다.
나는 발치에 검을 휘둘렀다.
쾅!
작은 폭발과 함께 몸이 가속했다.
“커억!”
충격 탓에 콧수염이 피를 토했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굉음을 일으키며 발코니에 착지했다.
건물이 높아서 그런지 주변 경치가 아주 잘 보였다.
벽에 기대 앉은 내가 콧수염과 어깨동무를 했다.
“경치 좋네. 그치?”
“허억···허어억···살려 다오···제발···.”
놈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생각보다 마음이 일찍 꺾인 걸 보니 내 희망 징수 전략이 통한 모양이었다.
그냥 박살내는 것보다는, 밀리는 척 하다가 박살내 버리는 것이 조금 더 효율이 좋았다.
나는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는 거 봐서. 질문에 대답할 준비는 됐어?”
“뭐든지···뭐든지 말하겠다.”
“아주 좋아. 그럼 먼저···지금 제국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슐리펜은 어쩌다가 황제 시해를 공모한 거고, 섭정으로는 누가 눌러 앉은 거야?”
“커흐윽, 모든 것은···황제 폐하께서 슐리펜을 부른 날에 시작되었다···임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놈을 치하하기 위해서였지···폐하와 놈이 알현실로 들어갔고···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금군장이 황급히 뛰쳐들어갔을 때는···이미 폐하가 쓰러져 있었어.”
“슐리펜이 한 게 확실해? 본 사람 있어?”
“목격자는 없지만···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다. 폐하의 피가 묻은 검이 놈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쿨럭, 쿨럭···놈은 바로 도주했고, 폐하는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으셨지만 눈을 뜨지 못하는 몸이 되셨다···.”
뜬금없이 섭정이 들어선 이유였다.
슐리펜의 칼침을 맞고 쓰러진 황제는 식물과 비슷한 존재로 전락했다.
콧수염은 핏물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허억, 가장 신임받던 신하인 바르카 님께서 섭정으로 등극하셨다.”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이름이 튀어 나왔다.
내가 치매에 걸린 게 아니라면 분명히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바르카.
북부의 바르카.
자이파의 동생이었던 바르카 터르겅.
앞머리를 쓸어 넘긴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잠깐. 바르카가 혹시 내가 아는 그 바르카 터르겅이냐?”
“그렇다···북부 결합 정책의 중추셨던 그 분께서는 누구보다 제국을 잘 이끌어 나가셨···으르륵.”
“어이, 왜 그래?”
불현듯 콧수염이 이상 증세를 보였다.
굵은 목을 타고 혈관이 불룩불룩 올라오고 있었다.
시커멓게 물든 꼴이 상당히 징그러웠다.
께름칙해서 어깨동무를 푸는 순간이었다.
눈을 까뒤집은 콧수염의 입에서 쥐어짜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위대하신···끄륵. 바르카 폐하의 이름으로···!”
놈이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입을 벌린 놈의 목구멍 너머에서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
“뭔데 씨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동공이 세로로 좁혀진 안구는 사람보다는 짐승의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도 기괴망측한 상황에 검을 뽑으려던 차였다.
스각!
어디선가 날아온 검기가 콧수염의 가슴팍에 직격했다.
“엉?”
뭐라 할 새도 없었다.
반토막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쎄한 위협을 느낀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가각!
콧수염의 몸을 찢으며 거대한 회오리가 솟구쳐 올랐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은 사내의 육신을 콧수염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갈아 버렸다.
“이건···!”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어도 휘말렸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생명의 위기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검기가 날아온 방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모하군. 금군을 죽였을 때 벌어지는 일을 몰랐던 건가?”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내 귀는 분명히 감지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짙은 그림자 속에서 암청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리는 멀었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맞춘 내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읊조렸다.
“슐리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