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2)
43. 해주(2)
#43
누워서 보는 하늘의 색이 익숙했다. 로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덕 아래로 세워진 마을과, 마을을 따라 굽이치는 강줄기가 보였다.
나지막한 읊조림이 로난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님버튼.”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고향 님버튼이었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언덕 아래로 걸어갔다. 발아래 사부작거리는 풀잎의 감촉이 선명했다.
‘이게 내 심상 세계라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강물 소리도, 콧잔등을 간질이는 바람도 모두 진짜 같았다. 다만 라만차가 매달려 있지 않은 허리춤의 허전함만이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할 뿐이었다.
머지않아 마을 어귀에 들어선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게 있었던가?”
님버튼이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 옆에는 큼직한 버드나무가 솟아 있었다. 어찌나 높고 무성한지 마을의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게 있었다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는데. 로난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마을로 진입했다.
마을의 풍경은 로난이 아는 것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아셀의 부모님이 농사를 짓던 텃밭도 그대로였고, 밤마다 왁자지껄하던 럼버트네 여관도 그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마을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민이 모두 떠나버린 것처럼 적막한 거리에서는 로난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은데···.”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로난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차였다. 웬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꺄하하!”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찰랑이는 백은발이 막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가벼운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이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젠장, 기다려!”
로난이 모퉁이를 돌았다. 자신과 누이가 살던 집이 나타났다. 원래대로라면 몇 분은 더 걸었어야 할 터였지만 그런 모순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담쟁이가 무성하던 외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때 분명 앞서 갔던 아이가 로난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히히!”
“썅, 깜짝이야.”
기껏해야 네다섯 살 정도가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이의 얼굴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
“엄마아!”
아이는 로난을 무시하고 그대로 집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로난은 발에 뿌리라도 내린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저 얼굴을 몰라볼 리 없다. 노을 색을 띠는 큼직한 눈망울, 별빛처럼 창백한 백은발. 틀림없이 어린 시절의 누이였다.
‘그럼 여기는···.’
기억에 없는 버드나무, 조금 덜 낡은 건물들. 어린 누이. 로난은 비로소 자신이 과거의 님버튼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옹야! 옹야!
별안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의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난이 울타리에 기대져 있는 괭이를 집어들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기억해야 한다. 여기는 내게 깃든 저주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심상의 세계다. 저주를 베는 것이 목적인 만큼, 이 세계가 호의적일 것이라 착각하면 안 된다.
그리 속으로 되뇐 로난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빗장이 걸려 있지 않은 문짝이 부드럽게 열렸다.
식탁 주변에는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소리에 로난이 귀를 기울였다.
“얘가 내 동생이에요?”
“그렇단다. 이릴.”
대화는 침대가 있는 안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은 이릴이 쓰고 있는 방이었다. 쟁기를 움켜쥔 로난이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그는 문간에 몸을 감춘 채 고개만 빼꼼 내밀어서 방 안을 확인했다. 어린 이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침대에 턱을 괴고 있었다.
“내가 지켜줄 거예요. 내 동생이니까.”
“후후, 대견하네 우리 딸.”
그녀의 앞에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 누워서 이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여인의 얼굴은 이릴과 똑 닮아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로난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여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것을.
“엄마···?”
로난이 비척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모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로난의 모습은 그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손을 뻗어 어머니를 만지려 해 봤지만, 허공을 휘젓는 것처럼 통과해 버렸다.
“그럼, 너는···.”
한층 가라앉은 로난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이릴의 얼굴과 어머니의 사이에는 작은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감싸진 채 꼬물거리고 있었다.
“웅냐···.”
“히히, 귀엽다.”
이릴이 손을 내밀자 아기가 그녀의 손가락을 쥐었다. 이릴은 까르륵 웃으며 아기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머니는 두 자식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도···이런 시절이 있었군.’
로난은 목적도 잊은 채 화목한 가족을 지켜보았다. 그때,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
그 순간 생전 느낀 적 없는 오싹함이 로난의 등을 휩쓸었다. 쟁기를 부러뜨릴 듯이 움켜쥔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차마 형용하기 힘든, 안개처럼 꾸물럭거리는 무정형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로난은 저것이 자신이 베어야 할 저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어야 한다.’
막 쟁기를 휘두르려던 차였다. 문간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그림자가 뭐라 소리를 냈다.
“■···?”
소리를 들은 로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 이릴? ■■ ···■■ ■■ ■■ ?”
‘어?’
말이라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해괴한 음성이었다. 유일하게 누이의 이름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림자가 지껄인지 머지않아 모녀가 살가운 반응을 보냈다.
“이릴, ■■ 오셨나 보다. 마중 나가 드리렴.”
“와! ■■ ~”
어린 이릴이 양팔을 벌리며 뛰어갔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이릴을 끌어안았다.
그림자는 이릴을 안아 든 채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어머니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시간을 맞췄네요? 어제 막 태어났어요. 어때, 귀엽죠?”
“■ ■■■ ···.”
“아하하, 저보다는 당신을 닮은 것 같아요···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 .”
이릴을 내려놓은 그림자가 갓난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림자는 한참이나 아기를 바라보다가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 . ■■ ■■■ .”
“네? 위험하다니요? 그게 무슨···.”
“■■■···.”
“왜, 왜 그래요 ■■?”
그 순간 그림자가 끓어오르듯 요동쳤다. 어머니와 이릴이 잠든 것처럼 쓰러졌다.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안···돼···!”
으득. 로난의 입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전신의 근육은 이미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는 몸이 굳어 버린 직후부터 움직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 ···. 이릴···.”
그림자가 꿀렁임을 멈췄다. 불현듯 로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로난은 그림자가 지금 매우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는 이릴과 아기를 어머니의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 일부를 뻗어 갓난아기와 이릴을 뒤덮었다.
‘무슨 개짓거리를 하는 거야?’
찰나의 순간, 로난은 그림자의 몸속에서 자신의 몸에서 나왔던 저주의 문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이 갓난아기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도.
“■■ ■ ■■■···.”
뭐라뭐라 중얼거리던 그림자가 문밖으로 나섰다. 그림자가 집을 떠는 순간 로난을 얽매던 속박이 풀렸다.
쾅! 튕겨 나간 로난이 벽에 충돌했다. 여태껏 정체되어 있던 힘이 한 번에 풀려난 탓이었다.
하지만 아파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로난은 곧장 가족에게 달려갔다. 모녀와 갓난아기는 모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안 돼. 안 돼···!”
허우적거리며 가족들을 부축하려 했지만 잡히지가 않았다. 절망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차에 누군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성을 되찾은 로난이 가족들을 살폈다. 이릴의 배가 천천히 부풀었다 가라앉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모두 잠들어 있는 것뿐이었다.
이릴은 잠결에도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쟁기를 움켜쥔 로난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짐승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씨발새끼가···.”
절망은 빠르게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무로 된 자루가 반으로 부서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난은 현관 앞에 기대져 있는 흑철검을 집어들었다.
왜 흑철검이 여기 놓여 있느냐. 그따위 사실은 이곳이 심상 세계라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단순히 허무맹랑한 환상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알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놈이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
쾅! 문을 박차고 집을 나선 로난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집을 나서는 순간 마을의 건물들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로난은 길만 남은 님버튼의 한복판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머지않아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버드나무와 그림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몸 일부를 칼처럼 뽑아든 채 그루터기 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이릴···■■. ■■ ■■■■ ■■···.”
갑자기 로난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를 잠식하고 있던 분노보다 몇 배는 크고 강렬한 슬픔과 분노가 가슴 속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로난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그림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허나 그는 달음박질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다. 그림자는 여전히 로난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목구멍 안쪽에서 응어리져 있는 출처 모를 감정을 폐부에 싣고서, 토해내듯이 외쳤다.
“거기 서라! 이 개새끼야!!”
“■?!”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로난의 몸이 섬광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여태껏 휘둘렀던 것 중 가장 빠른 검격이 그림자의 몸을 향해 쇄도했다.
챙! 검은 불씨가 허공에서 튀어 올랐다.
“뭐?!”
“■···■■?”
기습은 실패였다. 그림자와 맞닿은 흑철검이 허공에서 비적이고 있었다.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캉! 일반인은 볼 수조차 없는 참격이 연달아서 쏘아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로난의 공격을 전부 가볍게 받아쳤다.
“빌어먹을···!”
검술을 바꿔 가며 최대한 변칙적으로 공격해 봐도 모조리 피하거나 막힐 뿐이었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상대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놀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합이 스무 번쯤 오갈 무렵, 줄곧 방어만 하던 그림자가 폭발하듯 일렁였다.
“■■■■!”
“크윽!”
분위기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기이한 검로가 로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막아내지 못한 검격이 몸 곳곳을 찢어 놓았다. 푹! 찰나를 파고든 찌르기가 로난의 허벅지와 손목을 연속으로 꿰뚫었다.
“허억!”
챙그랑. 흑철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로난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림자가 로난의 목에 검 끝을 겨누었다.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
“헉, 뭐 하냐···? 허억, 안 죽이고···.”
그림자는 가만히 서서 로난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절절한 슬픔과 분노가 로난의 머릿속으로 전해져 왔다. 그림자가 검을 거두었다.
“■■.”
이윽고 검을 뿌리듯이 허공에 휘두른 그림자가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절뚝이며 일어선 로난이 왼손으로 흑철검을 집어들었다.
“제기랄···허억, 거기 서···!”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른 버드나무에게 묵례를 보낸 뒤 계속 걸어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놓칠 것 같았다.
로난이 심호흡했다. 그림자를 멈춰 세울만한 게 필요했다.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긴 했지만, 정말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식탁 앞에 놓인 세 개의 의자. 해맑게 웃으며 안기는 이릴. 나보다는 당신을 닮았다는 어머니의 말.
머리로는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것 같았다.
‘씨발.’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다리와 손목에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숨을 최대한 크게 들이쉰 로난이 그림자를 향해 외쳤다.
“니가 그러고도 아버지냐! 이 개자식아!”
“···■?”
그림자가 멈춰 섰다. 명백한 감정의 동요가 심상을 타고 전해졌다. 곧이어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로난의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기회는 한 번.’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후웅! 제자리에서 회오리친 그림자가 로난을 향해 쇄도했다.
로난의 시야가 좁아지며 시간이 느려졌다. 상대가 동요한 지금 일격으로 끝내야 했다. 목전까지 다가온 그림자가 칼을 빼 들었다.
‘어?’
그 순간 희긋거리는 무언가가 로난의 눈에 들어왔다. 물줄기 같기도 했고, 바람에 색을 입힌 것 같기도 했다.
닳고 닳은 흑철검은 어느새 매끈한 라만차로 변해 있었다. 로난은 눈앞까지 들이닥친 그림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다만 마구잡이가 아닌, 허공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서걱.
그림자가 반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