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21)
2-91. 두 번째 마침표(10)
나는 피와 마나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좀 천천히 가라! 이 사족보행 똥새야!”
“뺘뱌뱟!”
간절히 외쳤지만 시타2는 멈추지 않았다.
지면에 착 붙어서 달리는 담비는 마치 검은 유성 같았다. 녀석의 꼬리는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자로 쭉 펴져서 한 번도 땅에 닿은 적이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에 영향을 받아서 저런 게 튀어나온 거야?”
농담이 아니고 원래 세상의 시타나 유령마보다 훨씬 더 빨랐다. 비행 능력을 포기한 대신 속도를 얻기라도 한 걸까. 서두르는 건 좋았지만, 이건 따라가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어이, 같이 가자.”
“엉?”
그때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깨 보이는 로난2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뭐야. 벌써 깼어?”
“하아아암···오히려 너무 오래 잤지. 사정은 들었다. 아카샤인지 뭔지 하는 씨발놈을 잡는 걸 도우면 되지?”
로난2가 하품했다. 죽어라 달리고 있는 나와 달리 녀석은 이 속도로 뛰는 것이 꽤 여유로워 보였다. 문득 녀석의 왼쪽 뺨에 새겨진 시뻘건 손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아까는 없던 자국이었다.
“그 손자국은 뭐냐? 누가 그랬어?”
“나비로제 교관님. 아으, 더럽게 쓰라리네.”
“자업자득이군. 어깨에 침을 그렇게 묻혀 놨으면 나 같아도 두들겨 팼겠다.”
“그건 아닌데······잠이 덜 깨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탔냐고, 무슨 병에 걸린 거냐고 물어봤거든. 씨발···나는 우리 누나인 줄 알았지.”
“에라이 등신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누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어깨 위에 머리가 붙어 있는게 용할 지경이었다. 로난2가 질문했다.
“그래서. 아카샤라는 놈은 강하냐?”
“엄청.”
“허, 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장난 없나 보네. 비유하자면 어느 정도?”
“발가락만 쓰는 아카샤랑 니가 싸운다 하면 나는 아카샤한테 전 재산을 걸 거야.”
“니미. 손가락도 아니고 발가락에 거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돈 주는 놈이 튀는 게 아니면 나는 팬티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걸 수 있어.”
진심이었다. 로난2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몰라도 아카샤와 대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기가 생기네.”
그런데 녀석은 오히려 내 말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턱을 만지작거리던 로난2가 나를 앞지르며 뛰쳐 나갔다.
“미친놈인가 진짜.”
녀석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한창 성장할 시기에는 원래 주변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아카샤는 지금까지의 적과 달랐다.
‘늦지 않기를.’
자칫하다가는 시체가 나올 수도 있었다.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내가 속도를 더했다. 폐허가 된 창백한 성은 이제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
아카샤의 세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는 기괴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 아셀을 마주보고 있었다. 거울인 양 맨질거리는 가면이 창백하게 질린 아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갈고리 같은 손톱이 아셀의 볼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아. 아으···아아아···.”
아셀의 눈에서 저항 없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말은 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카샤의 손가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워서, 도저히 생물의 신체 기관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죽는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무너졌는데.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 왜 아무 일도 안 생긴 거야?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차라리 기절하면 편했겠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아셀은 눈동자를 굴려서 주변을 둘러봤다. 균열도, 쇠사슬에 감긴 바위도 그대로였다.
애당초 환각 마법에 걸려들었던 건가 생각하던 찰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상이 반쯤 박혀 있는 천장은 모자이크 타일처럼 수천 개의 균열로 뒤덮여 있었다.
“···말도 안 돼.”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그가 봤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셀과 디디칸의 계획대로 천장은 무너져 내렸다.
단지 아카샤가 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을 뿐.
추측컨데 염력으로 붕괴를 원상 복귀시키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정교한 공간 마법으로 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아버린 아셀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 ■■ ■■■.』
아카샤는 장난을 치는 것처럼 아셀의 볼을 반복해서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중간중간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상황을 고려했을 때 겨우 이런 걸로 나를 잡을 수 있었겠냐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랑거리는 볼이 살짝 들어갔다 원래대로 돌아올 때마다 아셀의 몸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움직여.’
디디칸은 박제처럼 굳어버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카샤의 손톱은 당장에라도 볼을 찢어 파고들어 반대쪽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꼬리는 다리 사이로 말려든지 오래였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이빨이 딱딱 부딫히고 있었다.
‘움직여. 내가 움직여야 해. 움직여···!’
이런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 역시 처음이었다. 대장간 그란 카파도키아를 동굴 거인들이 휩쓸었던 날. 도론 영감을 잃었던 날도 이 정도로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저 마법사의 앞에서 벌레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압도적인 무력감과 좌절이 디디칸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셀.’
이대로라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셀이 막으려 했던 흡수는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었고, 차원의 균열도 점점 넓어지고만 있었다. 갑자기 도론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제는 없는 스승.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을 이끌어 주던 드워프 노인의 유언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자체였다.
‘움직여. 나는 그란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불씨다.’
도론은 숨을 거두기 직전 그를 마지막 불씨라 불러 주었다. 불씨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꺼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벽에 똥을 펴바를 때까지 살아서 제국 제일 대장간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
언젠가 코트 입은 사내와 같은 검객이 쓸 명검을 만드는 것이 디디칸의 사명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던 디디칸이 아가리를 벌리며 포효했다.
“크악! 움직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마비가 풀렸다. 디디칸은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아카샤에게 달려들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 안쪽으로 예리한 송곳니가 번쩍였다.
“크아아아아!”
“디, 디디칸 님! 안 돼요!’
덩달아 정신을 차린 아셀이 경악했다. 질풍처럼 디디칸이 쇄도해오고 있었지만 아카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귀찮다는 듯 검지를 살짝 말아서 튕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무형의 충격파가 디디칸의 복부를 강타했다.
“욱…!”
디디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수레에 치인 사람처럼 거칠게 튕겨 나갔다. 직선으로 날아가던 몸뚱어리는 홀 끝자락의 벽에 처박히고 나서야 비행을 멈췄다.
“으극. 쿠어억! 컥!”
“안 돼!!”
아셀이 절규했다. 아카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가만히 디디칸을 쳐다보던 그가 혀를 차듯 내뱉었다.
『■■.』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아셀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아카샤를 올려보며 소리쳤다.
“도,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에요?!”
『······.』
“제, 제발 그만둬요. 힘을 이런 곳에 쓰면 안 돼요···네?”
아카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셀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허리를 구부렸다. 매끄러운 가면 위로 다시금 아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세 개의 역안은 심장을 겨냥한 화살촉으로 느껴졌다.
“···히극.”
아셀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마침내 임계점을 넘은 공포가 의식을 차단해 버렸다.
가녀린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카샤는 발등을 슬쩍 내밀어서 아셀의 이마를 받쳐 주었다.
『■···■■■■?』
가면 아래로 괴음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한 명은 기절하고 한 명은 기절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반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던 아카샤가 세니엘을 마주보았다. 기묘한 주문이 재개되었다. 끓어넘치는 생명력이 다시금 쇠사슬을 통해 넘어오기 시작했다.
“안···돼.”
디디칸이 앉은 채 머리를 들었다. 그의 코와 주둥이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장 아셀이라도 구해야 했지만 충격을 받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 듯한 균열은 점점 넓어져 가고 있었다.
‘끝인가.’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체념이라는 악마의 유혹이 디디칸을 사로잡기 직전이었다. 문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와 아카샤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는 듣지 못한 이질적인 소음이었다.
하지만 부서진 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홀에 깔린 적막 역시 팽배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잘못 들었겠거니 여기며 아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찰나였다.
“별 거 없구만. 뭐.”
“어?”
아까는 없던 사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어둠처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앉은 채 웃고 있었다. 피로 물든 장검 한 자루가 그의 손에 쥐어진 채였다.
사내가 말했다.
“늑대 형씨. 괜찮아?”
“다, 당신은···!”
디디칸의 털이 곤두섰다. 사내의 얼굴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복장은 달라졌지만, 분명 코트를 걸친 채 거인들을 도륙하던 그 검사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이었다.
『■■.』
다급히 몸을 돌린 아카샤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몸 위로 수백 획의 절단선이 어지러이 그어졌다. 어느새 노을빛 마나로 이루어진 원이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뒈져라. 이 괴물아.”
『······!!』
사내가 마침표를 찍듯 읊조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아카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엥?”
절단선이 벌어지는 일도, 망토가 갈가리 찢어지며 피보라가 터져 나오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칼로 그은 자국이 아카샤의 망토를 뒤덮고 있기는 했지만 피는 한 방울도 새나오지 않았다.
“뭔 씨발.”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사내가 다음 동작을 취하려던 차였다.
침묵하던 아카샤가 조용히 오른손 검지를 뽑아 들었다.
콰직! 무형의 힘이 사내를 움켜쥐었다.
“크아아악!!”
사내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그는 뭐라 딴지를 걸 새도 없이 천장에 처박혔다가 다시 바닥에 메다 꽂혔다.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엉덩이를 높게 쳐든 채 기절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 맙소사.”
디디칸이 질끈 눈을 감았다.
추잡한 자세도 자세였지만 이것으로 일말의 희망조차 사그라지고 말았다. 거인을 썰어 넘기던 사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 ■■■■ ■■■■ ■■■■?』
사내를 단번에 제압한 아카샤가 그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확인 사살을 위해서라는 것은 부연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아카샤가 다시 손가락을 뻗으려던 차였다. 고꾸라져 있던 아셀이 그의 망토자락을 붙잡았다.
“···하지, 마세요.”
아카샤가 말없이 고개를 내렸다. 아셀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쥐어짜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러면···흐윽, 다 죽잖아요.”
“아, 아셀···.”
디디칸이 탄식했다. 저 행동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서 이를 악물던 와중이었다.
“잘했어. 이름 모를 형씨들.”
“뭐?”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홀에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본 디디칸이 경악했다.
“무, 무슨···! 왜 한 명이 더···?!”
거기에는 검을 쥔 사내가 서 있었다. 방금 들어오자마자 기절했던 사내와 똑 닮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봤던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먼저 온 사내가 벌써 정신을 차린 건가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기절한 채였다.
로난이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댁들의 용기가 방금 세상을 구했다.”
검은 코트가 날개처럼 펄럭였다. 순식간에 아카샤를 지나친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아카샤가 다급하게 손가락을 뻗었다.
『■■!!!』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진지한 태도였다. 하지만 로난의 행동은 이미 끝난 뒤였다.
칼날이 반월을 그림과 동시에 세니엘을 옭아매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아카샤에게 흡수되던, 나오지 못한 채 억눌려 있던 생명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