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24)
4. Off The Record(2)
#94
“아으. 젠장, 끝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하도 오래 쥐고 있었더니 중지 끝 마디에 감각이 없었다. 책상 위에는 글자로 가득 채워진 원고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글 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만···보람차기는 하다만.”
더없이 뿌듯한 광경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직 써야 할 것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성과였다. 경험을 적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판타지 같은 건 죽어도 못 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버, 벌써 완결을 냈다고요?! 들어가도 돼요?”
“완결일 리가. 내가 나갈테니까 거기 있어.”
나는 원고 뭉치를 들고 방을 나섰다.
편집자 에르제베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는지 앉아서 쉬라고 가져다 준 의자가 나동그라진 채였다. 귀족이 기르는 고양이처럼 우아한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오는 거 힘들지 않냐? 역시 다음부터는 우편으로 부칠까.”
“전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난 님이 직접 부탁한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제가 적임자일 것 같다고 말했씀하셨잖아요?”
“엉. 아무리 생각해도 너처럼 똑 부러지는 애가 드물더라.”
“메이지 아셀이나 마르야 님은요?”
“아셀은 내 눈치를 보잖아. 그 자식은 마지막에 주인공이 바지에 똥을 싸고 자살해도 ‘괘, 괜찮은 것 같아 로난···!’ 이라 에둘러 말할 걸. 마르야는 지나치게 상업성을 강조할 것 같고···네가 최고야 에르제베트.”
아무리 생각해도 편집자로서는 에르제베트가 최적의 인재였다. 머리도 좋고, 소신껏 말할 줄도 알고, 고양이처럼 꼬리가 올라간 눈동자는 생김새에 걸맞게 오탈자도 잘 잡았다.
최고라는 말을 들은 그녀가 새침하게 웃었다.
“으흥, 제가 좀 유능하기는 하죠. 어쨌든 정말 부담 갖지 마세요. 원고 기다리는 겸사겸사 아데샨 언니랑 차도 마시고, 우리 에린이랑 놀 수도 있어서 괜찮아요.”
“겸사겸사가 본래 목적인 것 같다만.”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에르제베트의 뺨이 달아올랐다. 여러모로 참 쉬운 아가씨였다.
“에잇, 원고나 이리 주세요!”
“가져가. 아직 마지막 에피소드가 남았어. 아마도 최종장이 될 것 같아.”
“아하,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래도 거진 6할을 쓴 셈이니 굉장히 빠른 편이네요. 한 번 읽어 봐도 되나요?”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것 같다.
하긴, 한평생 베고 써는 짓거리밖에 안 했던 칼잡이가 갑자기 책을 쓴다고 설치면 나 같아도 흥미가 생길 터다. 초반에 때려치지 않고 꾸준히 집필하는 중이라면 더더욱.
“얼마든지. 대신 알다시피 외부 발설은 금지야. 특히 우리 여보한테는.”
“여명 마탑주를 뭐로 보시는 거에요? 물론 아데샨 언니에게 비밀이 생긴다는 건 슬프지만···누구한테도 안 말할 테니 걱정 마세요.”
“에린이나 시온도 안 돼. 당연하지만 레란트도.”
“아이 참. 당연하죠. 이제 집중 좀 할게요.”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눈 깜짝할 새 집중 상태에 돌입한 그녀는 빠르게 내 원고를 읽어 나갔다. 아셀이 워낙 규격 외라 그렇지 얘도 확실히 천재는 천재였다.
순식간에 마지막 장을 넘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다 읽었어요.”
“어때?”
“이번에도 좋아요. 고칠 부분도 딱히 안 보이고요. 로난 님의 글은 화려하거나 기교가 돋보이는 건 아닌데 묘하게 몰입감이 상당하단 말이죠.”
“거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충만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보니 이번 주는 선방한 듯했다.
최근 들어 느끼는 건데, 창작물을 칭찬받는 것은 칼잡이로서 누군가를 죽인 공로를 칭송받을 때보다 평균적으로 더 기분이 좋았다.
“조금 오버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꼭 실제로 겪은 일을 쓰시는 것 같아요. 설마 로난 님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역시 여명 마탑주라 그런지 눈썰미가 좋군. 그거 전부 실화 맞아.”
“에이, 놀리지 마세요. 평행세계 같은 게 어딨어요?”
에르제베트가 실소했다. 나도 덩달아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미래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학자들은 평행세계에 관해 밝혀낸 것이 없었다. 원고를 빠르게 재독한 그녀가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그, 그런데요, 로난 님···.”
“왜 그래?”
“그, 저번 주 원고에서 나온 알리시아라는 대주교 있잖아요···처음으로 나오는, 하렘이 나오는 그 부분에서요···.”
말을 잇던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알리시아와의 첫 대면이라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국에 한없이 가까운 살색의 향연이었지.
웅얼거리는 에르제베트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묘사를 조금 더 상세하게 해 달라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헐벗은 미녀들이 잔뜩 나오는 장면이라 네가 좋아할 것 같더라. 나는 아직도 그딴 천쪼가리를 옷이라 불러야 할지-”
“캬아악!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아기새라 불리던 첩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죄도 없는 일반인들인데, 그대로 버려진 거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나비로제 누님이 잘 돌려보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엥? 내가 그걸 안 썼던가?”
“안 썼어요. 그래서 저는 성이랑 같이 타 죽은 줄 알았고요. 후아아···살았다니 다행이네요.”
에르제베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제로 겪은 일이라는 말을 믿지도 않는 주제에 완전히 몰입한 꼴이 우스웠다.
나는 바람도 쐴 겸 그녀와 함께 테라스로 나섰다. 3층짜리 별장인지라 썩 뷰가 근사했다. 광장처럼 넓은 서부 대로와 황궁. 저 멀리서 화려한 네온사인을 내뿜는 혁신지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요란하기도 해라. 꼭 땅에 뜬 별 같군.”
“네온은 마음에 안 들지만 빌딩이라는 건물은 썩 괜찮더라구요. 아마 20년 내로 제도 서부는 마천루의 숲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명 마탑도 이미 고층 빌딩 하나를 수주해 놓은 상태고요.”
“디디칸 녀석도 출세했어 참. 지하에서 망치나 똥땅거리던 털북숭이가 대기업의 사장이라니···.”
난간에 몸을 걸친 채 중얼거렸다.
비록 평행세계의 존재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획기적인 발명품을 연달아 내놓으며 돈을 쓸어담던 디디칸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전 대간부였던 알리브리헤를 기술 고문으로 모시고 디디칸&알리브리헤 컴퍼니를 설립했다.
“격세지감이죠. 확실히 돈 버는 감각은 수인들이 탁월한 것 같기도 해요. 바렌 교수님은 이번에 또 납세액 순위를 갱신했던데요.”
“바렌이랑 마르야는 솔직히 논외로 쳐야지. 제각각 계열사만 열 개가 넘으니···하여튼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야.”
“저는 그런 좋은 사람들이 부자라 다행이라 생각해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제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는 없을 걸요? 학교나 병원도 잔뜩 짓고, 장학 재단도 마련하고···.”
“동의해. 지금 며느리가 입원한 종합병원도 바렌이 증축한 거지. 그러고 보니 별 소식은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어요. 분만이 시작되면 바로 연락 준다 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 란세 녀석, 머리털이 남아날지 모르겠군.”
장남이 태어날 때를 회상하며 낄낄거렸다.
난 모르지만 출산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철혈의 대장군인 아내조차도 아이처럼 울부짖게 만들었으니 말을 다 한 셈이지. 그녀는 미안하다 연신 외치면서도 내 머리카락을 악질 잡초 뽑듯이 잡아당겼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수리 쪽의 모근이 아려오고는 한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군.’
밤바람이 서늘했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릴 때 봤던 것보다 조금은 덜 화려한 별무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빛 공해 탓이었다.
조금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별이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괜찮았다. 고향 님버튼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쏟아질 듯한 별하늘을 올려보고 있을 테지.
“별의 바다···.”
언젠가는 우리도 고대 다인하르인처럼 다른 별에 갈 수 있을까.
옷깃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춥다. 들어가자.”
“저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이번 주 집필도 힘내세요.”
“오냐. 그래야지.”
나는 에르제베트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방에 돌아갔다. 허전해진 책상이 눈에 띄었다.
원고라는 노고의 결과물은 모조리 사라지고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무저갱처럼 새하얀 원고지만 소똥처럼 쌓여 있었다.
“왔네. 로난.”
침대에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린이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보나마나 야설일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책을 쫙 펼쳐서 들이밀었다.
“로난. 이런 것도 써 주면 안 돼?”
“공작부인은 왜 피터에게 케이크를 줬을까라, 안 읽은 변태가 없는 명작이지.”
“응. 엄청 재밌어.”
“쓰겠냐? 이게 요즘 미쳐가지고는···당장 안 들어가면 필레온 대광장 게시판에 그 불온서적이랑 같이 꽂아 버린다.”
“쳇.”
린의 몸이 빛을 뿜었다. 다시 검으로 변한 그녀가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나는 마른세수로 정신을 다잡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거의 다 왔어.”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감각이 곤두선다. 처음에는 손주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가볍게 쓰려 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진지해지고 말았다.
책임감이 생겼달까. 시작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고, 언젠가는 아카샤가 나타나서 세상에 깽판을 친다는 것, 그리고 아직까지 놈이나 평행세계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작가였으니 작가가 할 일을 해야 했다.
널브러져 있는 만년필을 움켜쥐며 되뇌었다.
“좋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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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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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따라온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제 이야기도 종장에 다다랐다.
아카샤는 죽어가고, 애송이 시절의 나는 슬슬 정신적 한계에 임박했다.
한편으로는 곧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을 주체 못하는 상태다.
당장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한없이 공상에 가까웠던 모험.
솔직히 아직도 가끔씩은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물론 꿈은 아니지만.’
허나 여기 적힌 일은 분명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아카샤도, 평행세계를 오가며 벌이던 모험도, 수준 낮은 잡지의 단편에나 채용될 법한 소재인 또 다른 나와의 만남도···모두 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은 물론, 앞으로 벌어질 일까지 한 치의 거짓말도 없는 사실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다고 해서 여러분까지 진지해질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그저 애송이 로난의 모험을 있는 그대로 즐겨주시기만 하면 된다.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재앙에 두려워하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네의 인생은 너무 짧지 않은가.
서론이 길었다.
마지막 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라.
노을이 저무는 님버튼의 언덕.
언제나 낮잠을 퍼질러 자던 거대한 참나무 아래.
“아으 씨발···머리야.”
아카샤를 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