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25)
2-95. 내 친구 아셀(1)
#95
“아으 씨발···머리야.”
콧잔등을 스치는 찬바람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뭇잎과 잔가지로 이루어진 천장이었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 때마다 촘촘하게 겹쳐진 이파리 틈새로 다홍빛 햇살이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웬 덩치 좋은 참나무 아래 드러누워 있었다.
“여기는···?”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눈을 부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참나무가 자라난 곳은 제법 높은 언덕 위였다. 경사를 따라 시선을 내리니 정겨운 시골의 풍경이 펼쳐졌다.
굴뚝 위로 솟아나는 연기와 마을을 감아도는 강줄기. 노을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소박하지만 정겨운 주택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을 감상하던 내가 눈썹을 치켜떴다.
“님버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님버튼이었다. 어쩐지 나무천장이 눈에 익다 싶었다. 양치기 노릇을 하던 어린 시절에 낮잠을 퍼질러 자던 장소였던 것이다.
‘젠장, 제대로 부서진 거 맞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번 평행세계와 이어진 균열은 보이지 않았다. 균열을 빠져나오자마자 거의 기절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는데, 다행히도 제대로 파괴한 모양이었다.
“윽.”
불현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흉통을 시발점으로 등이나 허벅지, 팔뚝 같은 전신에서 불쾌한 통증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성난 들소 떼가 밟고 지나가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젠장, 그 자식···.”
아카샤의 발악 때문이었다. 다른 평행세계와 이어진 균열을 통과하는 것은 언제나 지랄맞았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그 정도가 심했다. 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아카샤의 마나는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내 몸을 두들겨 팼다.
‘솔직히 위험했어. 역시 다친 호랑이가 제일 위험하다는 건가.’
기술의 부작용 탓도 있었다. 찰나 베기(초집중 상태에 돌입하면서 주변이 느려지는 그거. 적당히 이름을 붙였다.)는 다 좋지만 쓰고 나면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 상태에서 아카샤의 입자를 모두 베어내는 것은 팔이 네 개 달려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툴툴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누나가 잘 있나 봐야지.”
그리고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빵 굽는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썩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아카샤는 확실히 몰아 넣었고, 님버튼에 떨어졌다는 것은 누나의 안부를 살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침대 아래에서 혈계침도 얻을 수 있겠지만, 시타의 균열 확장 공사를 위해 아카샤의 피를 싹 납부한 상황이라 지금은 별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제대로 있구만.”
주요 물품 두 개도 무사했다. 세니엘의 파편과 아카샤의 피가 담긴 병.
병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무조건 챙겨야 했고, 어쩌다 얻게 된 세니엘의 파편도 갈수록 중요한 물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세니엘의 자아가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파편이 보여준 현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카샤의 다리를 자르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던 것은 이 조그만 돌조각이 협조해준 덕이었다. 적재적소에 맞춰 생명력의 안개를 빨아들여주지 않았다면, 놈을 그대로 놓쳐 버렸을 터였다.
“어쩐지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파편을 꺼내 살폈다.
저번 평행세계의 생명력을 양껏 흡수한 파편은 한층 더 짙은 색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기왕이면 치유력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이번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고, 나는 사람 죽이는 칼잡이라 살리는 데는 영 잼병이니까.
마을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그 자식 표정 봤냐? 덫에 걸린 사슴마냥 파닥거리면서 으게에~ 내려 주세요~ 병신이 그러게 돈을 제때 줬어야지.”
“크흐흐, 나중에는 오줌까지 질질 싸드만. 박쥐도 아니고 거꾸로 매달려서 지리냐.”
“박쥐도 오줌은 똑바로 서서 싸 등신아. 어쨌든 부단장 덕분에 일이 편하게 풀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저급한 대화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꼬질꼬질한 장정 열댓 명이 건들거리며 몰려 다니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면면에 눈썹을 치켜떴다.
“저 새끼들은···?”
님버튼의 골칫거리인 고아 클럽이었다. 피부가 탄력이 있는 걸로 봐서는 지금의 나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다. 어릴 적부터 목동 삥을 뜯거나 울타리를 박살내는 등 한심한 짓거리만 하고 다녔는데, 커서도 달라진 건 없는 모양이었다.
선두에서 패거리를 이끌던 금발의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우리 자경단이 처리하지 못할 일은 어디에도 없지! 기분이다! 밤에는 이런 촌구석 말고 저기 물 좋은 마르바스에서 뒤지는 년들하고 놀아 보자고!”
“끼얏호! 역시 한스 단장입니다!”
패거리가 환호했다. 발정난 원숭이처럼 끽끽대는 꼬낙서니가 보기 힘들었다.
죽어야만 정신을 차리는 부류가 딱 저런 애들이었다. 딱 보니까 돈놀이 혹은 불법 용병 노릇이나 하면서 빵을 축낼 것 같았다. 엉터리 자경단을 이끄는 것은 놀랍게도 한스였다.
‘귀가 둘 다붙어 있군. 어색하게시리.’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누나를 희롱한 죄로 짝귀를 만들어준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내가 가출한 세상에서는 저렇게 떵떵거리면서 사는 듯했다.
‘위대한 용병이 될 거라 떠들어대더니 결국은 마을 양아치가 됐네. 그나저나···.’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한스 바로 옆에서 걷는 인물이었다.
키가 작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소년. 아니, 소년처럼 보이는 청년. 튤립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미소녀 뺨치는 미모는 칙칙한 패거리 속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다.
한스가 그의 등을 쾅쾅 두드렸다.
“요 녀석들아,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전부 우리 부단장 덕분이지! 다들 고생한 부단장을 위해 힘찬 박수를 보내 줘라!”
“그야 두말하면 입 아프죠. 다음번에도 대마법사 님만 믿습니다!”
“대마법사님! 이번에 마르바스에 가면 최고로 끝내주는 계집을 붙여 드립지요!”
자칭 자경단의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아하하···대마법사라니. 또 이상한 말을 하네.”
“사람 넷을 손도 안 대고 들어 올리는데 그게 대마법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흐흐, 다음번에도 솜씨 발휘 기대하겠습니다.”
“······응. 걱정하지 마.”
청년이 주억거렸다. 말투에서는 양심의 가책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떠받들어지는게 마냥 싫지만은 않은지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거리고 있었다.
한심한 꼬낙서니를 보던 내가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아셀.”
“그럼 출발하자. 모두 나와 아셀 부단장을 따르라!”
거의 동시에 한스가 손가락을 뻗었다. 얼굴처럼 못생긴 손가락은 마르바스가 있는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셀은 근심과 기대감(최고로 끝내주는 계집을 붙여 드리지요!)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병신은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카샤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마르바스의 밤거리를 향해 나아가는 쓰레기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자칭 자경단.”
“엉? 이건 또 뭐야?”
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얼굴이 갑자기 튀어나온 돌부리라도 되는 것처럼 꼬나보던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잠깐만···! 너 로난 아니냐?”
말투에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옥에서 자란 버섯처럼 생긴 녀석의 매부리코가 다름아닌 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스가 생쥐 코털만한 인내심이라도 얻은 것은 전적으로 내 물리치료 덕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한스는 그날의 참패 이후 두 번 다시 나를 건들지 않았다. 내가 미쳐가지고 님버튼을 떠나기 전까지는.
내 이름을 들은 쓰레기들이 웅성거렸다.
“뭐, 뭐라고? 로난이 돌아왔다고?”
“진짜 그 로난이야? 단장의 코를 부러뜨린···흡!”
한 명이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은 일일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중에서 7할은 나한테 두들겨 맞은 전적이 있을 터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비를 걸고 다니지 않았지만, 먼저 덤빈 놈은 걷지도 기지도 못하게 패 놓는 주의였으니까.
나와 마주친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로, 로난?! 정말로?”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이제야 아셀 같았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침내 트라우마를 극복해낸 한스가 입을 열었다.
“후우, 오랜만이네 로난. 어디를 싸돌아 다녔길래 이제야 얼굴을 비추는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줄···”
“꺼져. 못생긴 새끼야.”
“뭣.”
나는 한스를 밀쳐내고 아셀의 앞에 가서 섰다. 단장이 무시당하는 걸 본 쓰레기들이 경악했다.
아셀과 마주서선 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셀. 여기서 뭐 하냐?”
“으, 응···?”
“여기서 뭐 하냐고. 부모님은 너 이러고 있는 거 알아?”
아셀은 대답하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내 얼굴을 올려본 녀석이 다시 고개를 팍 숙였다. 가빠진 숨소리를 여기서도 들을 수 있었다.
“아까 다 들었어. 니가 이 머저리들의 부단장이라며. 차라리 찌질해도 건실하게 살 것이지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없던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데.”
“······그, 그건.”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게 니가 꿈꾸던 삶이냐? 응?”
나는 양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아셀을 몰아붙였다. 반가움보다는 분노가 들끓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매달아 놓고 패고 싶었지만 아직은 인내심이 남아 있었다.
그때, 창백하게 질려 있던 아셀이 입을 뗐다.
“로, 로난 네가···뭘···!”
“뭐?”
“네가 뭘 안다고···그래? 갑자기 나타나서는···.”
“허.”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올려보는 눈동자에는 놀랍게도 반항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게 맞았다. 수 년만에 튀어나와서는 갑자기 훈수를 두니 뭔가 싶겠지.
하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이렇게 남자답게 나온다면 나도 남자다운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아셀의 멱살을 휘어잡고 따귀를 갈기려던 찰나였다.
“자, 잠깐···! 한스!”
아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맞춰졌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나를 베려 하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개새끼야! 사람이 말하면 들어야 할 거 아냐!”
칼을 쳐든 꼬낙서니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히려 어릴 때 봤을 때보다 자세가 더 망가져 있었다. 훈련은 쥐뿔도 안 하고 으스대기만 했다는 증거였다. 가볍게 손을 뻗은 내가 녀석의 왼쪽 귀를 붙잡았다.
“사람이었냐?”
“뭐?”
한스가 당혹성을 흘렸다. 정당방위의 원칙을 지킬 타이밍이었다. 나는 굳어 있는 녀석의 귀를 그대로 움켜쥔 채 잡아당겼다. 무나 당근이 뽑혀 나오는 소리와 함께 귀가 뜯어져 나왔다.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노을 진 들판에 뿌려졌다.
“끄아아아아악!”
한스가 주저앉았다. 귀를 틀어막은 손가락 틈새로 핏물이 샘솟고 있었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듯 어깨 뒤편으로 귀를 던졌다.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진 한스의 귀는 정확히 아셀의 정수리 위에 안착했다.
“히극.”
아셀이 얼어붙었다. 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셀의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짝귀가 된 한스를 보며 끄덕거렸다.
“이거지.”
잘려나간 귀를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역시 한스는 짝귀가 어울린다. 원래부터 저렇게 태어나는 게 더 좋았을 정도로.
“다, 단장! 맙소사···!”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적막에 빠져 있던 쓰레기들이 하나둘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돈은 좀 모았는지 거의 모든 인원이 칼을 들고 있었다. 제멋대로 칼을 뽑아든 녀석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여버려! 아주 그냥 회를 떠 버리는 거야!”
“네가 뭐라도 된 거 같냐?! 엉?”
덤벼들지 않는 것은 아셀 뿐이었다. 쓰레기 인생이 됐어도 대마법사의 재목이라 그런지 상황 판단력이 남달랐다.
나는 세 번째 평행세계가 되어서야 만난, 내 인생 최고의 벗을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넌 끝나고 보자.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