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29)
2-99. 아칼루시아(1)
#99
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 가주 아드리안이 말했다.
“두 분 모두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힘들게 오자마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서 죄송스러울 따름이에요.”
“아녜요. 우리는 멀쩡하긴 한데···가주님은 괜찮으신 거에요? 꽤 중요한 조각상 같았는데.”
“음, 확실히 의미가 있는 조각이었죠. 아칼루시아 저택이 세워졌을 때부터 존재한 두상이었으니. 이 사자가 우리 가문을 수호해 줄 거라며 그이가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히극.”
아셀이 딸꾹질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은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부디 신경쓰지 마시길.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허.”
예상외로 강직한 반응에 실소가 나왔다. 여리한 외모만 보면당장 현기증을 호소하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문 쪽으로 돌아선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설마 저것마저 망가뜨릴 줄은···.”
“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아드리안은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전혀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식사는 하셨나요?”
“어···대충은요.”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간단하게 차를 대접해 드리지요. 뗏목을 타고 오셨다 들었는데, 강바람에 차가워진 몸을 녹이기에 좋을 겁니다.”
두 촌놈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전부였다. 정문이 열렸다. 우리는 미모의 여주인을 따라 아칼루시아 저택에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근사한 내부의 풍경에 아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우와···동화 속에 나오는 성 같아.”
“확실히 이건 이거대로 좋은걸.”
정원과 마찬가지로 정숙하고 우아한 로비였다. 그랑시아의 저택이 웅장한 찬미가라면 이곳의 분위기는 잔잔하게 흐르는 야상곡을 떠올리게 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짙은 톤의 가구와 마감재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 서 있던 메이드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그래요 리즈. 손님들과 이야기를 할 생각이니 응접실에 차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아셀 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저, 전데요?”
지명당한 아셀이 움찔거렸다. 왜 자신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그때, 리즈라는 메이드의 입술 사이로 알아듣지 못할 말이 새나왔다.
“드라이 클리닝.”
“음?”
그것이 주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서늘한 바람 같은 것이 불어오나 싶더니 나와 아셀의 몸이 빛을 뿜었다. 십 분의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사그라진 섬광 아래로, 막 새로 산 것 같은 옷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거.”
“······에?”
“끝났습니다.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리즈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옷에 묻었던 얼룩이나 잡티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우리를 훑어본 아드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리즈. 그새 실력이 더 늘었나? 봄볕에 말린 누비이불처럼 보송보송해 보여요.”
“과찬입니다 가주님. 저는 이만 차를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리즈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물러났다.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깨끗해진 옷가지를 살펴 보았다.
물비린내와 거지 같은 남자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막 빨래한 것처럼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겨왔다. 따로 배워 두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마법이었다.
“리즈는 청소 마법의 귀재지요. 아칼루시아 저택이 연중 청결한 자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공이 크답니다.”
“대단한데. 방금 사 왔다 해도 믿겠어요.”
“우후후, 아직도 미개하게 손빨래를 시키는 어떤 가문과는 다르죠. 그럼 바로 가실까요?”
아드리안은 곧바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예쁘지만 까탈스럽고 못될 것 같다는 첫인상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그냥 좋은 사람이잖아.
그때, 아드리안을 따라 걷던 아셀의 입에서 형용하기 힘든 신음이 새나왔다.
“아···아아아···아아.”
“뭐야. 왜 그래?”
아셀의 얼굴은 햇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숨이 가빠진 것이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뭐가 불만이라 요상한 소리를 내냐며 옆구리를 찌르려던 차였다.
벼락처럼 그 이유를 깨달은 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오, 이런 시발.”
굳이 아셀의 이름만 부른 메이드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위병조장에게 갈아입을 바지를 달라고 요청했던 내 말도 함께. 아랫입술을 질겅이던 아셀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난 끝났어 로난.”
“······바지 안쪽도?”
“새것처럼···보송보송해.”
아셀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결국 눈물이 뽀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리즈라는 메이드는 기가 막힌 솜씨로 아셀의 하의를 마법으로 빨래해 버린 것이다. 나보다 약간 더 더럽혀진 빨랫감을.
“그, 그래도 여자가 해 줬잖아 이 자식아. 얼굴도 귀여운 편이던데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
“난 끝났어.”
“빌어먹을.”
뭐라고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셀이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지 못하게 감시하며 걷는 것 뿐이었다.
“역시 리즈. 손이 빠르다니까.”
화려한 응접실에는 이미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가 다과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나와 아셀은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아드리안과 마주 앉았다.
먼저 한 모금을 마신 그녀가 차를 권했다.
“드세요. 잘 우러났네요.”
“아, 잘 마시겠습니다.”
나와 아셀도 따라서 마셨다. 확실히 좋은 차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홍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전신에 온기가 확 퍼졌다.
“······맛있다.”
“그러게. 죽이는데.”
살면서 마셨던 차 중에 가장 근사한 것 같았다. 강바람에 맞으며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 놓은 아드리안이 다시 부채로 하관을 가렸다.
“아까는 경황이 없었으니 다시 한 번 소개를 하죠. 아드리안 데 아칼루시아입니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자, 현재 아칼루시아 가문의 가주이지요. 여러분의 활약은 인상 깊게 봤습니다.”
“환대해 줘서 고마워요 가주님. 별 것도 아니었는데요 뭘.”
“후후, 겸손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지요. 안개를 단번에 없애 버린 것도 대단했지만, 암초에 한 번도 부딫히지 않고 정원까지 들어온 모습도 그에 못지 않게 놀라웠습니다. 단서를 발견한 것도 로난 님인가요?”
“아뇨. 그건 싹 다 얘가 했어요. 그치 아셀?”
아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마시던 녀석이 부끄럽다는 듯 주억거렸다.
“네, 네에. 빛나는 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본 게 맞아요.”
“오호, 길이라? 어느 정도 마법적 재능이 있는 사람의 눈에도 빛나는 조약돌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텐데, 감지력이 대단하군요. 혹시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었나요?”
“음···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본 거라 불확실하긴 한데, 이 저택 앞까지 이어져 있던 것 같아요.”
“······뭐라고요?”
아드리안의 눈매가 좁혀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헛소문을 들은 사람이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역대급 재능을 가진 도전자군요. ‘저택까지 이어진 길’을 본 사람은 아칼루시아의 역사를 통틀어서 다섯 명이 되지 않아요. 그 중에 두 명은 제 딸과 남편이고요. 솔직히 믿기 어려워요.”
“그, 그럴 수가. 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진실을 말하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놀란 거고요. 굉장한 분들이 아칼루시아의 문을 두드리셨군요.”
부채 위로 드러난 눈이 휘어졌다.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번지자 뻣뻣하게 긴장해 있던 아셀의 얼굴도 약간 풀어졌다.
‘좋았어.’
나는 살짝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일단 들이받아 본 건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아셀을 양자로 입적시키는 것은 물론, 아카샤를 추적할 때 쓰일 물건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주님의 성에 찬 것 같아 기쁘네요. 이 자식은 확실히 재능의 결정체죠. 양자로 들이신다면 절대로 후회 안 하실 거에요.”
“우후후, 보석처럼 찬란한 재능의 원석이 두 분이나 찾아와 주셔서 저도 기쁘네요. 로난 님도 입적 시험을 보실 생각이시겠죠?”
“당연하죠. 애초에 그거 때문에 왔는데요.”
“너무 좋네요. 그럼 잠깐 이걸 봐주시겠어요?”
별안간 아드리안이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상급 포션을 담기에 적합한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병이었는데, 안에는 오렌지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죠?”
“방금 여러분이 마신 독의 유일한 해독제랍니다. 삼십 분 내로 복용하지 않으면 온몸의 장기가 녹아내리면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극독이죠. 맛도, 냄새도 없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을 거에요.”
“······예?”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에도 차를 홀짝거리던 아셀이 박제처럼 굳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손이 칼자루로 향하는 찰나였다. 반투명한 쇠사슬 다발이 소파에서 튀어나와 아셀과 내 몸을 휘감았다.
“흐, 흐아아아악!”
“이런 씨발, 아셀!”
아셀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단번에 사슬을 떨쳐내며 발도했다. 단단하기는 했지만 아카샤의 것에 비하면 새끼줄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뱀처럼 아셀을 삼키던 사슬이 부서지며 마나의 형태로 흩어졌다.
아드리안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대단하군요.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빌어먹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대가문의 주인이면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줄 알아?!”
“보통은 그렇더군요. 그리고 이게 무슨 짓인지 물어보고 싶은 건 제 쪽이에요.”
“뭐라?”
“일단 진정하세요. 못 드릴 것도 없으니까.”
갑자기 아드리안이 해독제가 든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라는 듯 자비로운 손짓이었다.
“로, 로난···!”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간절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재차 쇠사슬에 휘감긴 아셀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천장에서 내려온 사슬은 아셀의 가녀린 목을 친친 동여매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즉석 교수형이 집행될 것 같았다.
“거칠게 나와서 죄송스럽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답니다. 로난 님에게만 여쭤보고 싶은게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어요?”
“대답이라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왜 초대장을 받지 않았는데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신 거죠?”
“뭐···.”
잠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지금껏 에르제베트가 외부인에게 초대장을 건넨 것은 단 한 번입니다. 삼 년 전에 필레온 아카데미에서였고, 그 아이는 이미 아칼루시아에 양자로 들어왔었습니다. 당신이 초대장을 받은 것은 거짓말인게 확실한데, 어떻게 그 해의 도전자의 선언을 알고 있는지가 의문이군요.”
“···아데샨.”
“역시 그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군요. 대답하지 못하겠다면 좋습니다. 다음 질문을 하지요.”
아드리안의 눈빛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사람 좋은 귀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철한 아칼루시아의 주인만이 자리에 남아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딱 한 번만 여쭙겠습니다. 도대체 로난 님은 무슨 목적으로 아칼루시아 영지에 오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