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0)
2-100. 아칼루시아(2)
#100
‘쉽지 않군. 에리의 엄마라고 내가 너무 사람을 쉽게 봤어.’
아드리안의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주도권을 단단히 틀어쥐고 채근하는 모습에서는 실로 대가문의 주인에 걸맞는 위용이 느껴졌다. 냉철해 보이면서 나사가 빠진 에르제베트와는 정반대였다.
“로, 로난···케엑.”
갑자기 아셀이 나를 불렀다. 녀석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을 죄어드는 쇠사슬을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셀.”
“난 괜찮아···히익, 비밀이면 말하지 말고 도망, 쳐···.”
질식으로 창백해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지에 오줌이나 지리는 찌질이가 무슨 폼을 잡으려고 의리를 지키는 건지.
그것도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말 몇 번 안 섞어본 놈을 위해서.
“이 병신이 진짜.”
“후후, 아름다운 우정이네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로난 님은 그러지 못할 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아칼루시아에서 찾고 계신 것이 있을 테니까요. 힘이 있음에도 검을 멈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어지간히도 중요한 물건인가봐요?”
“···알고 있었어?”
“달 아래 우짖는 사자를 얕보지 마시길. 힘의 우열 따위는 두 분이 영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눈치챘답니다.”
아드리안이 홍차를 홀짝였다. 여유로운 태도에 소름이 끼쳤다.
이 매력적인 귀부인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초대장의 분실을 용인해준 것도 본인이 직접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물론 도전자 중에서는 완성된 강자도 종종 있어요. 이미 충분히 강하지만 아칼루시아의 이름을 등에 업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이권을 노리고 찾아오는 거지요···하아, 개인적으로 꺼리는 부류지만···아칼루시아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시험 정도는 치르게 해주고 있답니다. 헌데 로난 님은 궤가 달라요.”
“궤가 다르다니?”
“당신은 강해도 너무 강해요. 솔직히 제가 온 힘을 기울여도 이길 것 같지가 않군요.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은 딱 두 번, 불의 어머니와 대마법사 로르혼 님을 만났을 때 뿐이었어요.”
“······!”
“도대체 이런 괴물이 왜 여기 왔나 싶었죠. 대화나 태도에서 그 목적을 찾으려 해 봤지만 귀족으로서의 명예나 특권에도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더군요. 아데샨 그 아이가 받은 초대장을 도용해서까지 들어왔음에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다. 사무칠 정도로 그리운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드리안은 최후통첩을 날리듯 말을 맺었다.
“부디 진실을 말해 주시면 좋겠군요. 로난 님은 왜 아칼루시아에 온 건가요?
“나는···.”
“만약 거짓을 고하거나 무력 행사로 넘어가신다면 저 아드리안 데 아칼루시아는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당신을 상대하겠습니다. 제 시체를 밟을 수 있을지언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을 거라 장담하지요.”
부채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수정처럼 아름다운 눈이었다. 목숨을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을 지키겠다는 가주의 투지가 새카만 동공 너머에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멋진 어머니를 뒀구나 에리.
그리 입속말하며, 아드리안을 겨누었던 검을 내렸다.
“좋아요. 제가 졌어요.”
“흐응?”
“가주님을 기만할 생각은 없었어요. 원체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라 나름 머리를 굴린 거였는데, 오히려 돌아가는 꼴이 됐네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쇠사슬은 여전히 아셀의 목을 감고 있었다.
나는 검을 아예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아드리안이 뭐라 할 새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먼저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머리를 숙이는 건가요?”
아드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힘이 무슨 상관인가요. 잘못은 잘못이지.”
“대부분은 모르는 진리죠. 흠, 당황스럽네요.”
“처음부터 설명해드리죠. 일단 저 자식 좀 풀어 줄 수 있을까요?”
“뭐···좋아요. 먼저 신의를 보여드린다면야.”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하관을 가리던 부채를 접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남과 동시에 아셀을 죄이던 쇠사슬이 소멸했다.
“푸하아아! 켁! 케엑!”
자유가 된 아셀이 소파에 나동그라졌다. 몇 번이고 목을 어루만지던 녀석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무서웠던 주제에 잘도 허세를 부렸군.
“고생했다. 찌질이.”
“로난! 여, 역시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생각해 보면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맞아! 독약은?!”
“아 참.”
손가락을 튕겼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 역시 온몸이 녹아내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얼른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가져가세요.”
그녀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짓해 보였다. 해독제가 든 병은 여전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약간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병을 집어들었다.
아직은 이 해독제도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먼저 반 마시고 줄게 아셀. 괜찮지?”
“하, 하지만···.”
“가짜라도 쬐끄만 너보다는 내가 더 늦게 죽겠지. 그럼 마신다.”
병을 열자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오렌지 주스처럼 생겨먹은 외관에 어울리는 냄새였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쿡.”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작은 변화를 포착한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한 모금을 삼킨 내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전율이 등줄기를 휩쓸었다.
나는 정확히 절반을 마시고 병에서 입을 뗐다.
“······오렌지 주스네요.”
“맞아요. 애초에 독 따위는 넣지 않았거든요. 제 연기도 꽤나 쓸만하지 않나요?”
“빌어먹을. 내 어이가 없어서 진짜.”
그대로 남은 주스를 들이킨 내가 빈 병을 움켜쥐었다. 손을 다시 펼치자 모래알처럼 으깨진 유리 파편이 바스스 떨어졌다.
아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악! 해, 해독제가!”
“주스라니까 등신아.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것 중에 가장 신선했던 오렌지 주스였다고.”
“우후후, 후후후후···!”
아드리안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부채로 눈까지 가린 채 키득거리는 꼬낙서니가 여간 잔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담뱃대를 입에 물며 실소했다.
“아주 장난꾸러기네요 가주님. 내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간이 목젖까지 올라왔던 거 알아요? 솔직히 그쪽이 조금만 덜 예뻤어도 멍청한 병을 얼굴에 집어던졌을 거라구요.”
“후후, 우후후후, 미안해요. 제 딸아이와 비슷한 또래기도 하고, 거짓말은 하고 있지만 정말로 나쁜 분들은 아닌 것 같아서 속임수를 좀 썼어요.”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독약을 타셨겠죠?”
“아뇨. 그냥 마법으로 처리했을 거에요. 저를 만나기는커녕 저택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타이멘 강에 뿌려졌겠죠. 저도 시간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서요.”
“힉.”
무시무시한 발언에 아셀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놀라지 않았다. 사실 가주가 새벽부터 나와 독대를 했다는 것부터가 우리를 나쁘지만은 않게 봤다는 의미였다.
젠장, 아직도 입 안이 상큼하잖아.
다시 소파에 앉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궁금해 하시는 걸 말해드릴게요. 꽤 길어질 텐데, 괜찮겠어요?”
“수 일에 걸쳐서 들어도 상관 없습니다. 진실이기만 한다면요.”
“수 일까지는 걸리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나는 잠깐 고민하다 그냥 처음부터 다 말해주기로 했다.
지금껏 거쳐온 평행세계가 그랬듯이, 이번 세상도 멸망을 원활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세계의 유력자들이 공유받을 필요가 있었다.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 아칼루시아의 주인은 완벽하게 적합한 인물이었다.
“회귀? 평행세계···? 지금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으셔야 해요. 그렇게 만드는 게 제 일이기도 해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온 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증거로 제시했다. 아칼루시아와는 접점이 별로 없었지만, 마법사 세계나 정계의 특종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설득력은 충분히 챙길 수 있었다.
“여명 마탑의 지하에서는 파괴의 바쥬라가 준동하고 있지요. 전대 탑주는 삼켜진 지 오래고요. 그리고 아칼루시아의 수장 정도면 아시겠지만 지금 황제에게 실실 꼬리를 치고 있는 바르카라는 놈팡이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내신들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알아채셨을까요?”
“극비 중의 극비인데. 어떻게 그걸···!”
“더 비밀스러운 것도 많이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최근에 벌어진···.”
어느새 아드리안은 넋을 놓은 채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한 번 들었던 아셀도 마찬가지였다.
회귀와 평행세계, 거인의 침공과 광신도, 아데샨과의 로맨스.
모든 뒷사정을 설명하고, 내가 여기 온 것은 아카샤를 추적하기 위한 마도구를 찾아보기 위해서라며 이야기를 매듭지었을 무렵에는 이미 창밖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네, 끝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칼루시아에 찾아온 거에요.”
“······세상에.”
아드리안이 탄성했다.
밤을 꼴딱 새웠지만 잔뜩 고양된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했던 말을 되뇌이던 그녀가 입을 뗐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어쩐지 제국이 급속도로 병들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런 악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네뷸라 클라지에···.”
“싫은 건 알지만 그랑시아와도 손을 잡아야 해요. 원래 세상에서는 에르제베트가 교두보 역할을 해 줬는데···맞아, 걔는 지금 어디 있어요?”
“에리는 자기 방에 있을 거에요. 무슨 기적이 벌어져서 제 딸이 사교적인 성격으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친언니나 다름없는 그 아이가 떠난 뒤 완전히 망가졌거든요.”
아드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뗐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아이’가 누구를 칭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표정을 바로잡은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설마 당신이 아데샨 그 아이의 연인이었을 줄이야. 통찰력이 범상치 않았는데, 과연 대장군의 재목이었군요.”
“어땠어요? 양녀로서의 대장군님은.”
“굉장히 영특한 아이였어요. 능력도 좋았지만 아름답고 사려가 깊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죠···사실상 에리의 유일한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요. 그 아이가 죽었을 때는 저도 굉장히 가슴이 아팠답니다.”
아드리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가 친딸을 잃은 사람처럼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눈치챌 수 있었다.
진정해. 궁상이라면 저번 세상에서 충분히 떨었잖아.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되물었다.
“어쩌다 죽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고였어요. 영지 내의 절벽에서 발을 헛디뎠죠. 에리가 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어요.”
이쪽 세상의 아데샨은 실족사로 죽었다. 아득한 절벽 아래에는 모든 것을 삼키는 늪이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 에르제베트가 마법으로 늪을 갈아엎어서 몸을 뽑아냈을 때, 그녀는 이미 질식사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렇군요. 사고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에요. 에리는 장례가 끝난 뒤에도 한 달 가까이 식사도 안 한 채 울기만 했어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마음의 상처가 나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아드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의문이 더욱 깊어져서였다. 아무리 아래에 늪이 깔려 있어도 그렇지, 회귀를 한 번 했던 대장군님이 고작 실족사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이상해.’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다. 의도된 죽음. 타살이라는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누가, 도대체 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아드리안이 설핏 미소지었다.
“부디 당신이 온 세상에서는 그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너무 분위기가 우울해지니 화제를 돌리는 게 어떨까요?”
“아, 좋아요.”
“일단 당신의 뜻은 잘 알았어요. 이렇게까지 증거가 많은데 안 믿는게 더 이상하겠죠. 저 아드리안 데 아칼루시아는 로난 님이 아카샤라는 악당을 잡는 행위에 협조하겠어요.”
“자비로우시기도 해라.”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정직하게 말하기를 잘했다며 한숨을 돌리는 찰나였다.
“하지만, 아셀 님이 아칼루시아에 들어오는 건 별개의 이야기에요.”
“예?”
‘원래대로라면 초대장을 받지 못한 자는 아칼루시아에 들어올 수 없어요. 로난 님이 해 주신 이야기의 가치도, 초대장을 받았다는 거짓말도 사정이 딱하게 된 친구분을 위해서 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일단 원칙은 지켜져야 해요.”
“···그럼 이 불쌍한 난쟁이는 다시 들개가 되는 건가요?”
“아뇨. 여기까지 오셔서 그런 수모를 겪었는데 아예 내치는 것은 좀 너무한 처사지요. 바로 입적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시험 자체는 받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드리안은 인자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자비로움이 묻어나는 미소였지만, 저 말 또한 그녀의 전략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아셀이 어지간히 탐나나 보군. 정말 쉽지 않은 부인이야.’
아셀을 더 단단히 아칼루시에 붙들어 놓겠다는 작전이었다. 만약 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아셀을 절차 없이 입적시킨다면 다른 양자들처럼 소속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테니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셀과 눈을 맞췄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해서 재능을 증명할 경우 당신은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되어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에요. 필레온 아카데미 입학은 물론, 앞으로의 거취, 독립 자금까지 아낌없이 투자할 겁니다.”
“해,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어떻게 되죠?”
“후후후···당연한 걸 물어보시는군요.”
아드리안이 눈웃음쳤다.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유배나 비밀 엄수를 위한 암살처럼 끔찍한 패널티를 상상하며 답변을 기다리던 차였다.
“마차를 제공해 드리니 그대로 댁에 귀가하시면 됩니다.”
“에···그게 끝인가요?”
“아, 격려 차원에서 지급되는 소정의 답례품도 있습니다.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아드리안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참고로 답례품은 아칼루시아 영지에서 만든 티 세트였다.
나와 아셀은 완전히 벙쪄 버렸다.
“어음. 그렇군요.”
“응? 왜 그러시죠?”
“아뇨···저는 솔직히 조금 더 냉정하게 처리할 줄 알았거든요. 식사에 독을 탄다거나 암살자를 보낸다거나 해서···둔재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본 대가를 치르게 할 줄 알았어요.”
“어머, 그럴 리가 없지 않나요. 그랑시아의 돼지들도 안 할 짓을 저희가 할 리가.”
아드리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재능은 아름다운 꽃이지요. 하지만 뿌리 내릴 흙이 없다면 꽃은 피어나지 못합니다. 단단한 껍질을 비집고 싹이 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해 보이는 존재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에요.”
“허.”
“그러니까 부담없이 시험을 치르시길. 어차피 로난 님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바로 치르는 걸로 하죠.”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칼루시아는 괜히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에르제베트도 말로만 양떼가 어쩌고 늑대가 어쩌고 떠들지 실제로는 아셀 못지않게 심성이 고운 녀석이었다.
부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내가 아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런 조건이라면 거저 먹기구만. 아셀.”
“후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최고 난이도의 시험을 준비할 테니까요. 근 십 년을 통틀어도 통과한 사람이 세 명이 되지 않는 시험이랍니다.”
“뭐든 상관 없어요. 이 난쟁이는 괴물이라구요. 그렇지?”
“나, 나는 사람이야···!”
아셀이 부질없는 저항을 했다. 하긴 사람이니까 오줌도 지리고 하는 거라면서 녀석을 골려 주려던 차였다. 우리를 보며 웃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언제부터.”
“엉?”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녀가 쳐다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접실로 들어오는 문틈새로 한 소녀의 모습이 엇비쳤다.
수양버들처럼 내려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하늘거리는 잠옷, 그리고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미세한 살기.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확실했다.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내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에르제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