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1)
2-101. 아칼루시아(3)
#101
“세상에, 에리.”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줄곧 냉정을 유지하던 표정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요를 감추려는 듯 부채로 하관을 가린 그녀가 재차 질문을 건넸다.
“에리···아니, 에르제베트. 이제 괜찮아진 건가요? 몸은 좀 어때요?”
에르제베트는 침묵을 지켰다. 기다리다 못한 아드리안이 옆으로 미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응접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가려졌던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힉.”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옷장 속에서 시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안과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몰라볼 뻔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에르제베트는 더 이상 우아했던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빗질이 안 된 머리카락이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앙상한 팔다리는 교수대의 밧줄처럼 축 늘어진 채였다. 반투명한 슬립 너머로 엇비치는 속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서 꼭 주검 위에 쌓인 눈을 보는 것 같았다.
무례한 표현이지만, 꼭 약쟁이 같은 몰골이었다.
“영애님. 그 상태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때, 낯익은 메이드 한 명이 달려와 에르제베트의 어깨를 담요로 덮어 주었다. 아셀의 속옷과 긍지를 함께 해치워 버린 리즈였다.
“가주님은 그렇다 쳐도 외부에서 온 사내분들이 계십니다. 몸가짐을 조심하셔야죠.”
리즈는 속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담요를 가다듬어 주었다.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노련하면서도 정성어린 손놀림이 돋보였다.
“······.”
하지만 에르제베트는 리즈가 떠나갈 때까지 고맙다는말은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보라색 눈동자는 구슬처럼 움직이며 나와 아셀만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딸을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시험을 치른다고요?”
에르제베트의 입술이 마침내 벌어졌다.
“응?”
“저런 어디에서 굴러들어온지도 모르는 사기꾼들에게···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될 기회를 주신다고요?”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가녀린 어깨 위로 들불 같은 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쫄은 것은 아셀 뿐이었다.
아드리안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사기꾼이라니.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무례한 언사인가요?”
“다 들었어요. 가주님은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으시는 거에요? 평행세계니, 영혼을 삼키는 거인이니···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하아···가주의 대화를 엿듣다니, 제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아드리안이 부채를 접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 드러났다. 가주로서 지켜야 할 엄격함이 눈동자에 가득하던 근심을 덧씌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 로난 님이 해 주신 말은 모두 진실이었습니다. 극비 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와 경험, 아칼루시아를 이끄는 가주의 식견으로 판단한 결과죠. 아무리 허구 같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문의 금언을 잊은 건가요?”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에요. 만에 하나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이거 하나만큼은 납득할 수 없어요. 어떻게 아데샨 언니가 받았던 초대장을 위조해서 들어온 사람들을 용인할 수 있죠? 언니의 얼굴을 벌써 잊어버린 건가요?”
“그건···!”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나는 한 마디 더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여기서 끼어드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자고로 부부나 모녀지간의 말다툼에는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들었다. 게다가 딱 봐도 에르제베트는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와 에르제베트만 알 수 있는 아데샨의 비밀을 근거로 들면서 결백을 증명하려 해도 지금으로서는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왼쪽 허벅지 깊숙한 곳에 점이 있다거나, 목 아래로 체모가 일절 자라지 않는 타입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아 제기랄. 진짜 보고 싶네.
“이해할 수 없어요. 장례를 마친 지 얼마나 됐다고···더는 아칼루시아를 위해 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쳐 버린 건가요?”
“말 조심하세요 에르제베트.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요.”
“네, 그렇겠죠. 아니라 가주님이 결코 뜻을 굽히지 않으실 것도 알고 있어요. 제 아우성 따위는 철없는 투정으로 들리시겠지만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거기, 당신.”
“저, 저요?”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아셀을 째려보았다.
살벌한 눈동자와 마주친 아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 당신이요. 최고 난이도의 시험을 보신다 하셨죠? 그건 아칼루시아 내부인과의 대련이에요. 기사든, 마법사든, 이미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숙련자와 실력을 겨뤄서 승리를 거둬야 하죠.”
“그런···!”
“당신은 마법사 같으니 마법사가 상대로 나서야겠지요. 얼마나 재능이 뛰어난지는 몰라도, 저 정도면 기량을 가늠하기에 모자람이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이 분을 상대하고 싶은데, 그건 문제가 되지 않겠죠 가주님? 원래 선착순으로 지원하는 거잖아요.”
에르제베트가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턱에 잽이라도 맞은 사랍처럼 벙쪄 버린 채였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없지요.”
“그럼 됐네요. 당신의 상대는 저에요. 궁금하지 않으니까 이름은 안 밝히셔도 된답니다. 어차피 삼 초 내로 끝내 버릴 테니까요.”
에르제베트가 큭큭거렸다. 작위적인 웃음소리였지만 간이 개미 똥꼬만한 아셀을 위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제안은 허가할 수 없어요 에르제베트.”
“···어째서죠?”
“가주의 판단이에요. 신성한 아칼루시아의 입적 시험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선의로 임해야 하는데, 지금의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전례가 없는 일이라 당황스럽네요 가주님. 제가 저 사기꾼···아니, 도전자 분을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들기라도 할 것 같나요? 그럴 가치조차 없는 새끼양을 상대로 제가 그럴 거 같으세요?”
에르제베트가 물었지만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셀은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 상태였다. 병신같이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는 꼬낙서니 하고는.
어색한 적막이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에이, 씨발거. 그러지 말고 한번 싸우게 해 줘요.”
머리를 긁적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난 님?”
“제 잘난 맛에 살아왔으니 한번 깨질 때도 됐죠. 사정 딱한 건 알겠지만 어리광도 적당히 부려야지. 입에서 나온다고 전부 말인 줄 아시나.”
“······뭐라고요?”
에르제베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셀은 입을 틀어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괜찮아’와 ‘가주가 앞에 있잖아 미친 새끼야’ 가 반반씩 섞인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한번 깨질 때가 됐다고. 칩거가 길어지다 보니 귀지가 고막을 막았냐?”
“당신···제가 누구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요?”
“잘 알고 있으니까 너나 말 조심해 싹퉁머리 없는 계집애야. 세수하는 법도 까먹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내 친구한테 욕을 해? 아데샨이 지금의 너를 보면 기뻐할 것 같냐?”
“어디서 감히 그 이름을···!”
에르제베트가 눈썹을 치켜떴다. 어깨 위로 피어나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지며 응접실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로, 로난···제발 그만해.”
아셀은 거의 울 지경이 되어서 내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에르제베트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를 갈던 그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한 마디만 더 해 봐.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어쩔 건데? 아데샨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에리! 제발 정신 차려!”
“누구 마음대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아!!”
에르제베트가 노성을 터트렸다.
동시에 나와 그녀의 사이에서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맹렬한 충격파가 응접실을 휩쓸었다.
모든 유리창이 단번에 박살났다. 책들이 쏟아지고 응접실을 밝혀 주던 샹들리에의 줄이 끊어졌다.
머지않아 섬광이 사그라지자, 귀신 같은 꼴로 숨을 몰아쉬는 에르제베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아···!”
“워.”
나는 입을 말아 감탄했다. 정확히 세 걸음 앞에 운석이 떨어진 듯한 구멍이 형성되어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의 측벽으로 토대 역할을 하는 석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으, 으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아셀이 주저앉았다. 가공할 위력이었다. 저기에 직격당했다가는 정문의 사자 조각상에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한 꼴을 당했을 터였다. 나도 꿀밤 한 대 정도는 쥐어박아도 되겠다 싶어서 움직이려던 차였다.
콰아앙! 등 뒤에서 발사된 무형의 충격파가 에르제베트를 강타했다.
“아윽!”
가녀린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충격파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이 눈을 부릅뜬 채 부채를 뻗고 있었다. 줄 끊어진 샹들리에와 벽에서 떨어진 초상화들이 허공에 박제된 듯 머물러 있었다. 어쩐지 소리가 안 나나 싶었는데 그녀가 염력으로 붙잡은 모양이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내쉰 아드리안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에르제베트. 네 방으로 돌아가.”
“······안 말해도 그럴 거에요.”
에르제베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등을 돌리기도 전에 부채를 휘적여 문을 닫았다. 거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던 그녀가 입을 뗐다.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니, 충분히 이해해요. 아데샨이 죽은 뒤로 저렇게 된 거죠?”
“······네.”
아드리안이 주억거렸다. 예상대로 다른 평행세계라고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아데샨은 에르제베트에게 있어서 친언니이자 영원한 짝사랑의 상대였다. 장담컨데 나 다음으로 아데샨을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에르제베트일 것이다.
“많이 좋아졌다지 않았어요?”
“가끔씩은 방에서 나오길래 그런 줄 알았어요. 간만에 얼굴을 봐서 기뻤는데 아직도 저 정도로 망가져 있을 줄은···이게 다 가주 일을 핑계로 신경쓰지 않은 탓이죠. 저는 부모의 자격이 없어요.”
“너무 비관하지 마세요.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후우···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감사해요. 그이가 살아 있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그이? 남편 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요절한 천재의 대명사였죠. 에리가 정말 잘 따랐는데······죄송해요. 이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아드리안은 말을 잇다 말고 눈을 감았다. 뭔가 어두운 사정이 있는 듯했다. 부채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딸아이가 민폐를 끼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아셀 님이 에르제베트와 대련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로난 님이 요청하신 도구는 보물고를 먼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있다고 확실히 장담하기가 어렵네요. 아시다시피 혈계침도 굉장히 귀한 편에 속하는 마도구라서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구해드릴 테니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드리안이 싱긋 웃었다. 어색한 웃음에서는 어떻게든 조금 전의 소동을 무마해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일단 오늘은 푹 쉬세요. 보물고 방문도, 시험도 내일 진행할 테니···이 저택에서 가장 안전한 숙소로 안내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그거면 됐죠 뭐.”
“이해해줘서 감사해요. 아,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주실 게 있어요.”
“네?”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미소를 거둔 아드리안이 진지하게 말을 맺었다.
“지하실에만 들어가지 마세요. 이거 하나만 지켜 주시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