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2)
2-102. 아칼루시아(4)
#102
“네. 도착했습니다.”
메이드 리즈의 말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널찍한 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명도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침대와 여타 가구들은 전부 당대의 장인이 제작한 것처럼 호화스러웠다.
아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감탄이 새나왔다.
“···와.”
“두 분은 이 방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달리 필요한 게 생기시면 조명 아래 설치된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가장 근처에 있는 메이드가 올 겁니다.”
안내를 마친 리즈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청소를 직접 했는지 방에서는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햇살 스며드는 창문 밖으로는 아칼루시아의 아름다운 정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고마워요. 근데 진짜 더럽게 넓은 저택이네.”
나는 주머니에 양 손을 꽂은 채 헛웃음 쳤다.
상상 이상으로 좋은 숙소를 배정받아서만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거의 15분에 이르렀다. 건물을 옮긴 것도 아니고, 뱅글뱅글 돌아 간 것도 아닌데 15분이 걸린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워낙에 개인 방이 많아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한 번 양자로 입적하신 분들에게 제공되는 방은 그 분이 돌아가시거나 아칼루시아의 이름을 버리기 전까지는 유지되니까요.”
“캬, 복지 한 번 죽여주네요. 괜히 대가문이 아니네.”
“저도 아칼루시아에 몸을 담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참, 아셀 님은 괜찮으십니까? 역시 새 옷을 가져다 드릴까요?”
“피, 필요 없어욧!”
훅 들어오는 폭력적인 배려에 아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배를 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을 것 같았다. 격정적인 반응을 본 리즈가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후후, 그러시군요. 쾌적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얼레. 웃을 줄도 아셨네.”
원체 표정이 없던 그녀였기에 웃는 모습이 썩 놀라웠다. 솔직히 아셀의 팬티를 해치워 버릴 때만 해도 마공학 인형인 줄 알았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오오, 끔찍해라.
“그럼 저는 비품만 채워 드리고 나가겠습니다. 금고도 사용하실 건가요?”
“아뇨. 딱히 가진 게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리즈는 미리 챙겨온 세면 도구나 음료수를 방에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아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이. 저 아가씨가 너한테 호감이 있나 본데.”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로난? 그럴 리가 없잖아.”
“넌 모르는 여자들의 심리가 있어 인마. 모성애라 해야 하나? 못생겼는데 쪼다같이 굴면 그냥 좆같은 진상이지만, 너처럼 반반한 쪼다는 오히려 돌봐 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법이라고. 오줌 한 번 갈기고 여심을 사로잡다니, 제법인데 아셀.”
“으, 으악! 하지 마!”
아셀의 얼굴색은 이제 머리카락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붉었다.
녀석과 리즈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찰나, 괜찮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네가 저 아가씨한테 좀 물어봐주라.”
“무, 물어보다니? 뭘?”
“뭐긴 뭐야 인마. 굳이 지하실을 콕 찝어서 들어가지 마라고 한 게 수상하지도 않냐? 척 보니까 여기서 일한 기간이 꽤 된 것 같은데 뭐라도 알고 있겠지. 겸사겸사 남편 이야기도 물어봐 주면 더할 나위 없···”
“비품은 다 채웠습니다. 그럼 푹 쉬시기를.”
속삭이며 말을 잇던 와중이었다. 그새 할 일을 마친 리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셀은 절대 못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주먹을 한 번 쥐어서 보여주자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심호흡한 녀석이 리즈를 불렀다.
“저, 저기···리즈!”
“무슨 일이십니까?”
“다, 다른 건 아니고요, 그냥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가주님께서는 도대체 지하실에 뭐가 있길래 들어가지 말라 하신 거죠?”
“네? 지하실 말입니까?”
리즈가 큼직한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출입 금지를 당부하는 아드리안의 심각한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셀의 설명을 들은 리즈가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확실히 궁금해하실 만 합니다.”
“네, 네에···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더라구요. 거기에 무슨 중요한 시설이라도 있는 건가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지하층은 기본적으로 제 청소 구역에서 제외되는 장소라 일 년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하거든요. 다만 영애께서 요즘 자주 들락거리셔서 노파심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애라면 에르제베트 님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메이드는 거의 다 아는 화젯거리죠. 사실 가끔 들락거리시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지하층에 기거하고 계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리즈는 대화하는 내내 아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에서 단내가 풍기는 걸 보아하니 저 난쟁이에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 그 지하실에 뭐가 있길래?”
“한낱 메이드인지라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배정받은 구역을 관리하는 것도 하루종일 시간을 투자해야 하거든요. 다만 소문만큼은 무성합니다. 아칼루시아에 거역한 자들을 투옥하는 장소라거나,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산다거나···많은 지지를 받는 소문으로는 보물고로 들어가는 입구가 지하층에 존재한다는 것 정도가 있죠.”
“보물고로 들어가는 입구···? 어차피 에르제베트 님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아뇨. 아칼루시아의 보물고는 오직 가주에게만 출입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좋아하는 메이드들은 보물고 소문을 영애님의 행태와 엮어서 가설을 내놓고는 하죠. 가령, 돌아가신 아데샨 아가씨를 되살릴 보물을 가주님 몰래 찾고 있다거나.”
“······아데샨.”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응접실에서 만난 에리의 상태를 떠올려 보면 아주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갑자기 리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새벽에 사자상이 추락한 사고는······아마 영애님이 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릅니다.”
“네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지금 영애께서는 정상이 아닙니다. 방금 막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상상하기 어려울 지 몰라도, 영애님은 원래 귀족의 세계에서도 몸가짐이나 예법이 완벽하기로 소문이 나셨던 분이었습니다.”
“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죠.”
동의하며 주억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에르제베트는 절대로 그런 꼬질이가 아니었다. 기품의 시작은 외모라면서 유난은 유난대로 떨던 녀석인데.
“예의범절도 발랐지. 기본적으로 참 좋은 애였어요.”
“맞습니다. 허나 아데샨 아가씨가 돌아간 이후 영애님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흥분하셨어도 가주님의 손님에게 그런 험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건 맞죠. 설마 바로 앞에 갈길 줄은. 설마 리즈나 다른 메이드한테도 그렇게 히스테리를 부리나요?”
“그건 아닙니다. 허나 자기도 모르게 물리력을 지닌 살기를 누출하고 계시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게 저택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사흘 전에는 중앙 로비의 샹들리에가 추락해서 교체해야 했는데, 아마 그 사자상도···.”
리즈가 말꼬리를 끌었다.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문득 아드리안이 했던 혼잣말이 뇌리를 스쳤다.
– 그래도 설마 저것마저 망가뜨릴 줄은···.
지나가듯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 사고는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무의식 중에 일을 저지른다는 리즈의 말은, 의도하고 저지른 짓거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림자.’
의심을 더하는 요소는 또 있었다. 사자상이 떨어진 직후 저택의 창문 안쪽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그림자. 워낙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에르제베트와 체격이 비슷했던 것 같았다. 불편한 의심이 짙어지던 차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군요. 어디까지 가설일 뿐이고, 제가 백방으로 노력할 테니 부디 영애님을 미워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분은 잠깐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신 것 뿐입니다.”
“이해해요. 리즈는 나름대로 저희한테 경고를 해 주고 싶었던 거겠죠. 에르제베트도 안 미워할 거고, 어련히 조심할 테니까 걱정 마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셀 님도 새 옷이 필요하시면 바로 호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괘, 괜찮다니까요!”
아셀이 다급하게 손사래쳤다. 입을 가리며 쿡쿡거리던 리즈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아···이제야 쉴 수 있겠네. 여자랑 이렇게 길게 말해본 거 처음이야.”
“욕봤다.”
나는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에는 로비의 샹들리에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처럼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젠장,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더니 괜히 께름칙하군.
겉옷을 옷장에 걸던 아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정말 영애가 한 짓일까?”
“뭐가.”
“사, 사자상 떨어뜨린 거···무섭기는 했지만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기는 하지. 내일 시험 어떡하냐 아셀.”
“···어떡하냐니? 로, 로난이 도와줄 생각이라 받아들인 거 아니었어?”
아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어쩐지 고분고분하게 시험을 받아들인다 싶었는데, 괘씸하게도 내 원조를 기대했던 거군.
중지를 쳐들며 낄낄거렸다.
“니 시험인데 내가 왜 도와주냐? 만약 에르제베트가 범인이면 이번에는 뭐가 떨어질지 궁금하긴 하네. 아예 지붕이 무너져 내려서 너를 갈기갈기 찢어발길지도.”
“히이이익···!”
“어떻게든 될 테니까 푹 쉬어 두기나 해. 아드리안 양이 바보도 아니고 무작정 서로를 죽이라 하지는 않겠지. 과제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무조건 네가 유리하니까 걱정 마.”
“그, 그렇겠지? 설마 바로 목숨을 건 대련으로 가지는 않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골려 줄려 한 것은 아니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아칼루시아 영지에는 이상한 점이 지나치게 많았다.
갑자기 떨어진 사자상과 그림자.
무언가를 숨기는 가주.
아데샨의 실족사.
폐인이 된 에르제베트.
지하실.
불을 붙이지 않고 담뱃대를 질겅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아셀. 잠깐 나갔다 올게.”
“어, 어디 가려고? 로난은 안 피곤해?”
“담배나 한 대 피고 올려고. 한참 퍼질러 잘 것 같으니까 그 전에 한 발 충전해 놔야지. 금방 돌아올 테니까 쫄지 말고 자고 있어.”
나는 입에 문 담뱃대를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아셀은 금방 온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 표정이 되어서는 침대에 누웠다.
“그, 그럼···알겠어. 컨디션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빨리 와야 해.”
“이럴 때는 그냥 무서우니까 빨리 오라 해 인마. 다녀오마.”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 축축한 아침공기가 확 몰려왔다. 역시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섯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문 뒤편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셀은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로난?”
친구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목욕탕에 온 것처럼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 이게 무슨!”
로난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푹신한 침대도, 영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창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이었다.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둠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아···하아···!”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들이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초여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한기였다.
“추, 추워.”
아셀이 옷깃을 여몄다. 상체를 일으키자 기나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진 복도에는 창문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하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