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3)
2-103. 아칼루시아(5)
#103
복도는 영원히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스무 걸음 간격으로 벽면에 설치된 횃불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돌바닥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침착해···침착해 아셀. 침착해.”
아셀이 혼잣말했다.
살을 파고드는 한기에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여기가 지하층일 것이라 확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긴 복도임에도 창문이 단 한 개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이 그 저택에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다른 건물은 절대 아니었다. 대기 중에 함유된 밀도 높은 마나는 아칼루시아 저택에서 느낀 것과 동일했다. 쿱쿱한 공기와 지하 특유의 한기가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어쩌다가 여기에···!’
아셀은 필사적으로 뇌를 쥐어짜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인과를 떠올려야 했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봐도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은 머리맡에 뭉그러지는 베개의 푹신함과 방을 나서는 로난의 뒷모습 뿐이었다.
“하아···하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셀이 다시금 복도로 시선을 옮겼다.
“······힉.”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을씨년스럽다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복도에 내리깔린 어둠은 단순한 그늘이 아니라 먹잇감을 기다리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횃불이 하나라도 꺼지는 순간 앙상한 팔과 촉수가 튀어나와 자신을 잡아갈 것 같았다. 귀신이나 악마 등, 사악한 존재들이 지옥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통로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이곳도 지정된 장소 중 하나일 터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도대체 왜?’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여기에 떨어진 것이 로난이었다면 뭐 이리 춥냐면서 벽에 오줌부터 한 방 갈겨 주고 모험을 시작했겠지만, 불행히도 자신은 용기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기립을 시도하던 아셀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한심해. 난 천하의 머저리야.’
큼직한 눈망울에 물기가 고였다. 말 그대로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와서 아칼루시아에 당도했는데, 몸 하나 일으키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돌아가신 부모님, 자신을 믿고 여기까지 데려와준 로난을 볼 낯이 없었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찰나.
끼이이익···.
등 뒤에서, 삐걱이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응?”
녹슨 경첩에서 날 법한 소리였다. 아셀이 고개를 돌렸다.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 유령처럼 흔들리는 횃불 아래로 서서히 열리고 있는 석문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벽과 같은 색이라 눈치채지 못했다. 문 안쪽으로 파고든 형식의 손잡이도 착각에 한몫을 했다. 자세히 보니 모든 횃불 아래에 똑같이 생긴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석문의 아가리가 반쯤 벌어졌을 무렵이었다.
새하얀 손 하나가, 문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어.”
아셀의 시간이 멎었다. 손바닥에 비해 지나치게 긴 손가락은 사람의 신체 기관이라기보다는 곤충의 다리 같았다. 뼈와 가죽만 남은 팔이 손목과 이어져 있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손가락이 바닥을 찍었다.
까드득.
팔이 굽어지며 감자 푸대를 끄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펼쳐진 팔은 아까보다 더 많은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열린 채로 움직이지 않는 문 너머에서, 남자도, 여자의 것도 아닌 기괴한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캬···아아···.”
아셀은 더는 숨을 쉬지 못했다. 힘 풀린 다리만이 처량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들어올려진 손이 다시 한 번 바닥을 찍었다. 팔이 굽어지고, 푸대 끄는 소리가 났다.
까드득.
더 길어진 팔이 펼쳐짐과 동시에, 핏기 없이 창백한 소년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캬아아···캬하아아···.”
기괴한 음성은 소년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셀은 거의 혼절할 뻔했다.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에게는 눈이 없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두 개의 검은 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괴, 괴물.’
절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귓볼 밑까지 찢어진 입꼬리 안쪽으로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이고 있었다.
‘움직여.’
아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게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달아나야 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셀이 조금씩 뒷걸음질치던 와중이었다. 한번 더 앞으로 기어나온 소년이 갑자기 자신 쪽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으륵.”
“······.”
비어버린 구멍 두 개와 아셀의 눈이 마주쳤다. 물이 넘치듯 숨이 새나왔다. 이미 허공에 머물러 있던 아셀의 발이 바닥을 딛는 순간이었다.
“키헤아아아악-!”
소년의 입이 쫙 벌어지며 끔찍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아셀의 마비가 풀렸다. 새된 비명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굳어 있던 다리가 용수철처럼 펼쳐졌다. 소년을 등진 아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히윽. 힉! 히에에엑!”
자신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밑창이 돌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 분 정도 달리던 아셀은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자신의 것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 안 쫓아오나?’
안 그래도 심장이 슬슬 한계였다. 어쩌면 소년은 아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고, 자신만 바보같이 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다진 아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아.”
첫째,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는 것.
둘째, 죽을 때까지 지금의 장면을 악몽으로 꿀 것이라는 것.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소년이 고작 열 걸음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흐야아아아악!!”
재차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빠른 속도도 속도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충격적인 모양새였다. 짐승처럼 사족보행을 하는 소년은 바닥이 아닌 천장에 붙어서 기어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없던 이유였다. 지나치게 길쭉한 팔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비틀릴 때마다 둘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하아···! 하악.”
제멋대로 흘러나온 눈물이 등 뒤로 흩어졌다. 창자가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더 빠르게 뛰고 싶어도 더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소년은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당도해 있었다.
‘끝이다.’
아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소년은 속도를 일부러 늦추면서 자신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손가락이 천장에서 뽑혀 나왔다. 발가락으로 몸을 지탱한 소년이 아셀을 낚아채기 위해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아악! 인비저블 핸드!”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급정지한 아셀이 몸을 회전시키며 주먹을 휘둘렀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그의 뒷덜미에 닿으려던 찰나, 보이지 않는 주먹이 소년의 안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포탄에 맞은 것처럼 몸뚱어리가 굉음을 일으키며 천장에 처박혔다.
“흐익?!”
아셀이 기겁했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출력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교수형을 당한 죄수처럼 축 늘어진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완전히 천장 속으로 사라진 소년은 움찔거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 죽었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뒷걸음질쳤다. 소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 수십 개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염력 펀치에 맞는 순간 깨지고 뽑혀 나온 것이었다.
“하아아아아···살았다.”
아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물거리던 내장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수증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나, 생각보다 약하지는 않은 건가?’
아셀은 주먹을 날린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너는 최고의 마법사가 될 거라는 로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고양감에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승리와 목숨을 쟁취했다는 짜릿함, 전례가 없던 마법적 진취라는 겹경사를 맞이한 셈이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추, 출구를 찾아야 해.”
숨을 고르던 아셀이 머리카락을 뒤로 묶었다. 당장은 살았지만 저런 괴물이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옷매무새만 다듬은 뒤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복도를 따라 십 분 정도를 더 걸었을 무렵이었다.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마나가 아셀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건···?”
아셀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마나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문 하나가 나타났다. 복도에 줄지어 늘어선 문짝들과 생김새는 거의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칼루시아.”
면밀하게 문짝을 살피던 아셀이 멈칫거렸다. 문고리 부분에 익숙한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달을 향해 포효하는 수사자는 틀림없는 아칼루시아의 상징이었다. 뭔가 싶어 손을 대는 찰나, 닫혀 있던 문이 저절로 입을 벌렸다.
“뭐, 뭐야?”
경첩에서는 쇳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름을 바른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색적인 푸른 조명, 여지껏 경험한 적 없는 농후한 마나가 방 내부로부터 쏟아졌다.
“누, 누구 계세요?”
마치 들어오라 유도하는 것 같았다. 아셀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방 안에 들어섰다.
천장의 마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색광이 내부를 훤히 밝히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과 실험 기구로 미루어 보아 누군가의 연구실 같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던 아셀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너무 놀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방 한복판에 거대한 상자가 세워져 있었다. 한쪽 면이 완전히 뚫린 상자 안에는 웬 여인 한 명이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이, 인형인가?’
로난에 버금가는 장신의 여인이었다. 몸에는 아칼루시아의 제복이 맵시 좋게 입혀져 있었다. 두 손을 교차해서 가슴에 얹고 있는 자세는 꼭 동화에서 본 뱀파이어 같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는 없어. 뭐라도 알아내야 해.’
원래대로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을 터였다. 허나 방금 전의 소동으로 심장이 튼튼해진 것인지, 아셀은 두려움보다는 흥미를 존중하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면 즉시 염력 펀치를 날릴 준비를 마친 채로.
여인을 찬찬히 훑어보던 아셀이 탁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쁘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코는 높고 속눈썹은 짙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검은 폭포를 연상케 했다. 잠깐 작금의 상황을 잊게 만드는 미모에 아셀은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자신에게 과분한 키만 아니었다면 용기를 쥐어짜내서 말을 걸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인을 살피던 아셀은 머지않아 무시무시한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인형이 아니야.’
그녀는 시체였다. 영원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어쩌다 목숨을 잃었는지, 왜 무덤이 아닌 차디찬 지하실에 놓여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방부 처리를 했는지 시취는 풍기지 않았다. 아셀이 두려움 반 흥미 반으로 그녀를 살피던 와중이었다.
침묵하던 여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
아셀이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여인의 눈동자는 재를 닮은 회색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생기가 없는, 탁 풀린 동공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주저앉으려던 차였다.
“뭐야. 누가 왔나?”
복도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힉.”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셀의 심장이 발작을 일으켰다.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에 입을 벌린 궤짝 하나가 들어왔다. 안에 잡동사니가 조금 들어 있어도 자신의 몸 정도는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쿵.
궤짝에 몸을 던진 아셀이 뚜껑을 닫았다. 본능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이건 들켜서는 안 된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아셀은 궤짝 뚜껑을 살며시 열고 바깥을 살폈다. 검은 로브를 입은 괴한이 여인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허억.”
괴한의 얼굴을 본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검보랏빛 머리카락,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간 눈동자.
대가문 아칼루시아의 영애인 에르제베트였다.
‘소, 소문이 사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