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4)
2-104. 아칼루시아(6)
#104
로브를 입은 여인은 틀림없는 에르제베트였다. 아셀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입을 조금이라도 벌리는 순간 심장이 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리즈가 했던 말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영애께서는 거의 지하에 기거하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소문만큼은 무성하죠. 가령, 돌아가신 아데샨 아가씨를 되살릴 보물을 가주님 몰래 찾고 있다거나.
되살리기 위한 보물. 돌아가신 아가씨.
흔들리던 아셀의 눈동자가 여인의 시체에 고정되었다.
‘그렇다면 설마 저 사람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키 큰 미녀의 정체가 바로 아데샨이었던 것이다. 에르제베트와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칼루시아의 양녀,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로난의 약혼자.
에르제베트는 바로 그녀를 부활시키기 위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하아···하아···.”
아셀의 호흡이 가빠졌다. 당장 자신이 숨어 있는 궤짝에서도 부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엉덩이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잡동사니들은 모두 만듦새가 상당한 마도구거나 값비싼 실험 재료였다. 아마 시체는 몰래 빼돌린 거겠지.
‘···대단하다.’
이쯤 되면 공포보다 경외가 앞섰다. 얼마나 아끼던 사이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추모에 그치지 않고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금단의 연구에 손을 대다니.
그렇다면 나를 쫓아왔던 괴물은 부활 연구의 실험체였던 걸까?
역시 이건 죽을 때까지 모른 척 해야하는 거겠지?
광기 어린 사랑에 아셀이 전율하던 차였다.
“뭐야. 왔어?”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제삼자가 온 듯했다. 궤짝 틈새로 그녀를 엿보던 아셀이 고개를 팍 숙였다. 어둠 너머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아약스는 여기 왜 데려왔어?”
“······.”
아약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에르제베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무 깊게 알려 했다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
“흠, 너도 참 철두철미하다니까.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거지만.”
에르제베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베어 있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심호흡한 그가 뚜껑을 살짝 들었다.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는 실험실 대부분을 볼 수 있었지만 에르제베트의 대화 상대만큼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속삭이는 수준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에르제베트가 실소했다.
“그나저나 힘도 없으면서 어떻게 처리한 거야? 아약스는 상당한 실력자인데.”
‘처리’라는 단어에 아셀이 의아해하던 차였다. 갑자기 시야 너머에서 큼직한 덩어리 하나가 날아와 에르제베트의 발치에 떨어졌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사내의 시체였다.
잠옷 입은 사내의 얼굴을 알아본 아셀이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위병조장···!’
틀림없었다. 자신과 로난을 저택까지 안내해준 위병조장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아데샨과 마찬가지로 탁 풀려 있었다. 묵묵하게 책무를 다하던 사내는 이제 두 번 다시 경계근무를 설 수 없는 주검으로 변한 채였다.
“아하. 독약을 먹였구나. 하여튼 잔머리 굴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충성스러움이 마음에 들었지만···너무 깊게 알아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지.”
에르제베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째 얼굴이 파랗다 싶더니 독살된 것이었다.
잠깐 뜸을 들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이번에 온 녀석들은 심상치가 않더군. 특히 머리 검은 놈은 실력자가 분명해. 그 더러운 눈초리만 봐도 알 수 있지. 일단 멍청해 뵈는 빨간 놈부터 끝장내 버려야겠어.”
“······!”
“그렇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칼루시아는 가장 위대한 가문이야.”
킥킥거리던 에르제베트가 여인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검지를 뻗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잿빛 눈동자는 손가락을 따라 굴러갔다.
딱!
에르제베트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여인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데샨.”
“아···아아아···.”
에르제베트가 냉소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마치 도구를 다루는 듯한 태도에 아셀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휘어진 눈동자에서는 아데샨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이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그리워서 되살리려는 게 맞는 건가?
그가 신음을 내뱉은 줄도 모른 채 경악하던 차였다.
“뭐야. 누가 있나?”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궤짝을 돌아보았다. 아셀의 심장에 벼락이 떨어졌다.
에르제베트의 오른손 위로 붉은 화염이 일어났다.
“흠, 안 그래도 실험체 하나가 혼자 죽어 있던데.”
“······!!!”
“자기 혼자 날뛰다 죽은 게 아니었다거나?”
그녀는 궤짝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궤짝을 닫은 아셀은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머리를 굴려 봐도 이번만큼은 도저히 답이 없었다.
‘죽는다.’
에르제베트에게 어설픈 염력 따위가 먹힐 리가 없다. 순순히 걸어 나와 자수한다면 그냥 죽을 것을 고문까지 당하고 죽을 터였다. 상상하는 모든 미래는 화염의 회오리가 자신을 불살라 버리는 장면으로 귀결되었다.
“응? 이런 곳에 숨어 있을까?”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손이 궤짝 위에 얹어지는 것을 느낀 아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아앙!
부술 기세로 궤짝을 열어젖힌 에르제베트가 눈썹을 으쓱였다.
“···뭐야. 역시 아무것도 없잖아.”
궤짝 안에는 실험에 쓰다 남은 잡동사니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삭임을 들은 에르제베트가 뚜껑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귀신 한둘 있어도 이상한 장소가 아니잖아.”
“······.”
“알았어. 알았으니까 신경 꺼. 내일을 준비해야 하니까.”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적막이 방에 내려앉았다.
겨울의 별처럼 차갑고 푸른 조명이 아데샨의 관을 비추고 있었다.
.
.
.
“흐아아아악!!”
아셀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킨 그의 눈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음침한 실험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호화로운 가구로 채워진 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아···! 뭐, 뭐야?!”
로난과 함께 배정받았던 숙소였다. 머리 위에서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아셀의 시선이 검게 물든 창문에 정지했다. 누울 때만 해도 분명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자신의 몸 곳곳을 만져보던 아셀이 머리카락을 쥐어싸맸다.
“꾸, 꿈이었다고? 그게?”
아셀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땀에 젖어 끈적끈적한 피부에는 아직도 지하의 한기가 남아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전부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당시에 느꼈던 호흡 곤란과 통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나는 분명히···!”
겪었던 모든 일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끝없는 복도, 눈 없는 괴물과의 추격전, 에르제베트와 죽은 아데샨까지 전부 다!
문득,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로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담배만 피고 온다던 로난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유령처럼 하얀 커튼이 반쯤 열린 창문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자, 장난치지 마! 로난?!”
이번에도 회답은 없었다. 아데샨의 시체, 파랗게 질린 위병조장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안 돼.”
아셀은 반사적으로 협탁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필요한 게 있을 시 메이드를 호출하는 버튼이었다. 하지만 일 분 정도를 기다려도 메이드는 오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아셀이 미친 사람처럼 방에서 뛰쳐나갔다.
“로난!”
외투를 걸치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에르제베트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고요에 휩싸인 복도였다.
그가 사라진 친구를 찾아 막 움직이려던 차였다.
“···아셀 님? 괜찮으십니까?”
“리, 리즈? 왜 여기에···!”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긴 자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메이드 리즈가 서 있었다. 워낙에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벙쪄 있던 그녀가 입을 뗐다.
“호출 버튼을 누르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을 겪으셨길래 안색이···악몽이라도 꾸신 건가요?”
“그, 그게···!”
말문이 막힌 아셀이 더듬거렸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광이 살인마가 된 에르제베트와 아데샨 아가씨의 시체를 꿈에서 봤다고 말했을 때 돌아올 조치는 기껏해야 따뜻하게 데운 우유나 동정 어린 시선일 터였다.
그럼에도 좌시할 수는 없었기에, 아셀은 주먹을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도, 도망가야 해요. 여기는 이상해요.”
“네?”
“설명을 제대로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제가 뭔가···뭔가를 봤어요.”
아셀이 그녀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위병조장 아약스가 왜 죽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에르제베트를 모시는 리즈라면 언제든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겪은 것은 단순한 악몽 따위가 아니었다.
송아지처럼 눈을 깜빡이던 리즈가 설핏 미소지었다.
“···손이 차갑네요.”
“네···? 으앗!”
아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눈치채고는 손을 떼려 들었지만, 리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셀의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메이드 특유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으니 일단 진정하세요. 곁에 있어 드릴 테니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 그게···여기서는 좀 곤란해서. 이, 일단 로난은 도대체 어디 간 거죠?”
“로난 님과 함께 계신 게 아니었나요···? 그, 아셀 님. 많이 흥분하신 것 같은데 일단 방에서 대화를···”
“두 사람. 지금 거기서 뭘 하는 거죠?”
리즈가 아셀을 진정시키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두 사람의 뒤편에서 초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셀의 가녀린 팔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힉···!”
아는 목소리였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이 굳어졌다.
아셀과 리즈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모퉁이 바로 앞에 담요로 어깨를 덮은 소녀가 서 있었다. 헝클어진 검보랏빛 머리카락이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리즈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입니다 아가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두 손님을 뵈러 왔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 할 말이 있어서. 다른 한 분은 안 계신 건가요?”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셨는지.”
리즈가 아셀을 대신하여 주억거렸다. 아셀은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고 에르제베트만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치켜올라간 눈꼬리는 지하실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난의 부재 소식을 들은 에르제베트가, 조금은 언짢다는 눈빛으로 아셀을 돌아보았다.
“흠, 그럼 어쩔 수 없죠. 당신이라도 따라오세요.”
“······네?”
무심한 말투와는 별개로 아셀은 얼어붙었다.
에르제베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뒤를 돌아 걸어가 버렸다.
-멍청해 뵈는 빨간 놈부터 끝장내 버려야겠어.
지하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셀의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