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5)
2-105. 아칼루시아(7)
#105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셀은 에르제베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난 죽었다.’
리즈가 함께 있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녀를 따라가던 아셀은 어떤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네 벽면이 모두 고풍스러운 책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방 한복판에는 기다란 소파 두 개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설치되어 있었다. 꼭 서재와 응접실을 합쳐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테이블에 홍차가 든 쟁반을 내려놓은 리즈가 머리를 숙였다.
“그럼 영애님,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리즈.”
에르제베트가 끄덕였다. 아침의 무심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가디건을 제대로 걸친 옷차림도 그렇고, 어느 정도 빗질이 된 머리카락도 그렇고 이번에는 신경을 좀 쓴 것이 느껴졌다.
아셀을 지켜보던 그녀가 갸웃거렸다.
“왜 불편하게 서 계시나요? 어서 앉으세요.”
에르제베트가 소파를 향해 턱짓했다. 아셀에게는 어서 교수대에 올라가라는 집행인의 선고처럼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아셀이 쭈뼛거리면서 소파에 앉았다. 천만다행히도 엉덩이가 닿는 순간 소파가 괴물의 입으로 변하면서 자신을 씹어 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뒤따라 맞은편에 앉은 에르제베트가 다리를 꼬았다.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그러고 보니 비명을 들은 것 같은데, 꿈에서 괴물이나 시체라도 본 건가요?”
아셀의 눈이 커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두 가지를 모두 본 입장으로서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절묘하게 느껴졌다.
진정해 아셀. 넘어가면 안 돼.
조용히 심호흡한 그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런가요? 딱히 뭐가 있지는 않는데···.”
“한 달간 설산에 조난당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 같아요. 마침 잘 됐네,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데 이만한 홍차는 없거든요.”
에르제베트가 홍차를 홀짝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집어든 아셀이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뱉었다. 여기에 뭐가 들었을지알 게 뭔가.
“······확실히 맛있네요.”
“후후, 그쵸? 마음껏 들도록 해요.”
“괘,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저를 왜 부르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성격이 꽤 급하시네요. 가급적 로난이라는 분도 함께 계실 때 말하고 싶었는데···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에르제베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셀은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탈출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염력 펀치를 전력으로 먹이면 시야 정도는 가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바닥이나 천장을 부숴야 하나?
긴장감이 고조되던 찰나, 침묵하던 에르제베트가 입을 뗐다.
“······했어요.”
“네?”
“···어제 아침에는 제가 죄송했어요. 아무리 흥분했어도 그래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가주님과 손님들께 어이없는 무례를 저질러 버렸네요.”
에르제베트가 입술을 질겅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사에 아셀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어제 아침에 벌인 난동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로난이라는 분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 분의 말마따나 저는 어리광을 부렸던 것 같아요. 단지 짜증이 치민다는 이유로 사실파악도 제대로 안 하고, 가주님의 시련을 통과한 정당한 도전자들을 가로막고···확실히 아데샨 언니가 지금의 제 모습을 본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일갈하겠죠.”
“그, 그런···.”
“실책을 깨달으니까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요. 정말 미안해요. 어제 있던 일은 저 혼자의 잘못이지 가주님과 가문은 죄가 없으니 부디 아칼루시아를 탓하기는 말아주세요···물론 가문의 위신을 더럽힌 주제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서도.”
“아,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걸요.”
“후후,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너그러운 분이네요.”
에르제베트가 미소지었다.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모습에 아셀은 할 말조차 잊어버리고 벙쪄 버렸다.
‘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하실에서 봤던 에르제베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무리 여자랑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어도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문득, 아셀과 마주보던 에르제베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래도 착각하지 마세요. 솔직히 저는 당신들이 아직 싫어요. 제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별개로 교활한 사기꾼이라 의심하고 있다고요.”
뺨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감히 추론하자면 용기를 내서 사과했다는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다시 죄인이 된 아셀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렇군요···죄송합니다.”
“애초에 안개 속에서 온전한 길을 봤다는 것부터 못 믿겠어요. 이토록 마나가 미약한데, 제게 버금가는 재능의 보유자라는 소리잖아요. 당신, 마법은 얼마나 배웠어요? 염력을 다루시는 걸 보면 황혼 마탑 견습생 출신이신가요?”
“그게, 정말 초보에요.”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에요. 순수한 궁금증에서 여쭤 보는 것이니 경계하지 마세요. 경지를 밝히기 싫다면 스승 되시는 분의 성함이라도 말해 주시는 게 어때요?”
“으아아···정말 그런 거 없는데.”
어차피 숨겨도 들통날 일이었다. 아셀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궁핍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마법적 성취에 대해 이실직고했다.
홍차를 마시던 에르제베트가 정색했다.
“······그게 사실이에요? 쓸 줄 아는 마법이 하나밖에 없다고요? 그마저도 책에서 편법으로 배운 거고?”
“네, 네에.”
“세상에 기가 막혀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입적 시험을 보겠다 한 거에요?”
아셀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실제로 그는 아는 것이 쥐뿔도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마법인 인비저블 핸드는 마을에 들른 행상인에게 구매한 책에 적힌 것을 따라하다 습득한 것 뿐이었다.
“좋아요. 당신에게 저항의 여지 정도는 주도록 하죠.”
“저항의 여지···라뇨?”
“그래요. 혹시 역(逆)마법이라고 알고 있어요?”
아셀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생전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죄송합니다.”
“후우···그럴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테니 아무 마법이나 한번 써 보세요.”
“가, 갑자기요?”
아셀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나지막이 영창한 그가 서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염력으로 이루어진 손이 세 권의 책을 뽑아들었다.
갈매기처럼 펼쳐진 책 세 권이 둥실둥실 날아오던 와중이었다.
“드핸 블저비인.”
“······!!”
별안간 에르제베트가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읊었다. 몸이 허물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마법이 풀렸다. 힘없이 추락한 책들은 에르제베트의 염력에 붙들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깜빡이던 아셀이 감탄을 흘렸다.
“바, 방금 무슨 짓을 하신 거죠?!”
“이게 바로 역마법이에요. 상대의 마법을 강제로 해제시키는 마법이죠. 인비저블 핸드라···제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사용했던 마법이네요.”
“···엄청 놀랐어요. 그런 대단한 기술이 있을 줄이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상대방이 시전하는 마법의 결을 분석해서 거꾸로 마나를 방출하면 끝이니까. 영창도 곁들이면 좋구요. 역마법을 사용하면, 상대보다 훨씬 적은 마나를 들이고도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어요.”
에르제베트는 역마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처음으로 듣는 마법 강의에 아셀은 그녀가 미치광이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잊어버린 채 몰입했다.
이윽고 설명을 마친 에르제베트가 옅게 헛웃음쳤다.
“끝이에요.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이겼다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그,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그런데 이런 귀한 정보를 알려 주셔도 되는 건가요?”
“전혀 귀한 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마법사라면 누구나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니까. 게다가 무적처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역마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치명적인 단점이요?”
“네. 끔찍하게 어렵다는 거죠. 단순히 주문을 거꾸로 외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일촉즉발의 실제 상황에서 상대의 행동거지와 마나의 패턴을 분석하고, 정확히 반대되는 마나를 도출해내는 일은 엄마···아니, 가주님에조차 힘든 일이에요.”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아셀의 마법을 해제할 수 있던 것은 워낙에 주문이 쉽고 주변의 방해가 없는 상태라서였다.
“알려드린 말 그대로 최소한의 양심을 지켰다 해야 할까요. 그래도 당신에게 진정 재능이 있다면 이 역마법만으로 저와의 대련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죠. 실제로 그런 짓이 가능한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그게 누구죠?”
“일루안 데 아칼루시아. 제 아버지에요.”
에르제베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시선이 아셀의 뒤편으로 향했다. 거대한 책장의 한 구석에는 책이 아닌 액자가 비스듬이 놓여 있었다. 가주 아드리안과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에르제베트, 그리고 아버지인 일루안이 함께 그려진 가족 그림이었다.
“저 분이···?”
아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지적인 미남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농부처럼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정말 무례한 생각이지만, 에르제베트를 판화로 찍어낸 듯 아름다운 아드리안과 부부 사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에르제베트가 끄덕였다.
“아버지는 대단한 마법사였어요. 데릴사위라 아칼루시아의 피를 이어 받지는 못했지만 압도적인 재능의 보유자였죠. 특히나 연산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라, 소싯적에는 크라바 크라티르 님의 공간 이동까지 역마법으로 무효화 시킨 적이 있다 했어요.”
“크, 크라티르라면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 아닌가요?”
“맞아요. 현 시점에서 가장 대마법사에 가까운 인물이죠.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 필레온의 교감 정도는 역임하고 계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에르제베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과거형으로 맺어지는 말에 아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그 말은 역시···.”
“네. 제가 다섯 살때 돌아가셨어요. 실험 사고였죠. 아칼루시아를 가장 강력한 가문으로 만들겠다는 열의로 매일같이 과로하시다가 그만···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폭주하는 마력과 가주님의 비명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에르제베트가 말꼬리를 끌었다. 아드리안에게 들어서 부고를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이 상당했다. 홍차를 한 입 홀짝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맑은 날이었어요. 화장터의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파란 하늘에 흩어졌죠. 가주님은 밥도 먹지 않고 우는 저를 끌어안으면서 아버지는 이제부터 하늘에서 저를 지켜볼 거라 했어요.”
“조, 좋은 곳에 가셨을 거에요.”
“후후, 고마워요. 생각해 보니 아데샨 언니를 화장한 날에도 같은 말을 들었었는데···제가 어쩌다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참. 이야기가 새도 제대로 샜군요.”
“······네?”
“제가 잘못해서 사과하기는 했지만 대충 임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시험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상대할 거에요. 하늘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언니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에르제베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쨌거나 댁을 박살내 버리겠다는 선언이었으나 아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채였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 영애님.”
“왜 그러시나요?”
“분명히, 분명히 방금···아데샨이라는 분을 화장하셨다고 했죠?”
자신이 생각해도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에르제베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네. 그랬죠.”
“키,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검은 그 분이 맞나요? 눈도 이렇게 크던···!”
“맞아요. 응접실에서 초상화를 보셨나 보네요. 정말···정말 좋은 사람이었죠.”
에르제베트의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그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 아셀은 자신도 분명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올라왔다.
그는 틀림없이 지하실에서 아데샨의 ‘시체’를 보았었다.
“말도 안 돼.”
“네?”
아셀의 혼잣말에 에르제베트가 갸웃거렸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것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목 없는 유령을 마주친 사람 같았다.
꿈이었나? 정말로 내가 봤던 것이 꿈이었나?
입속말을 뇌까리던 아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 차 잘 마셨습니다!”
“깜짝이야. 돌아가시게요?”
“네, 네엡.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내일 뵙겠습니다!”
“저기, 잠깐만···.”
아셀은 에르제베트가 뭐라 하기도 전에 비틀거리면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무례함에 당황하면서도 아셀을 붙잡지는 않았다. 홍차는 이뇨 작용을 촉진시키니 화장실이 급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한 번 ‘실수’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천적으로 방광이 약한 사람일수도 있었다.
혹시 벌써 저지른 건가?
그녀가 아셀이 앉았던 소파를 별 생각 없이 쳐다보던 와중이었다.
“으응?”
소파 위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가가서 살펴 보니 미세한 파란색으로 빛나는 가루가 원단 위에 묻어 있었다. 가루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가 눈썹을 치켜떴다.
“별버섯의 포자가 왜 이런 곳에···.”
진귀한 약학 재료 중 하나인 별버섯의 포자였다. 머나먼 남부에서만, 그것도 오백 살 넘은 야자수의 밑에서만 자라는 종인지라 주변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디 약재상이나 규모 큰 실험실에 간다면 모를까.
정황상 아셀의 옷에 묻어있던 것이 분명했다.
에르제베트가 혼잣말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요.”
그녀는 아셀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홍차에서 피어나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흩어지고 있었다.
[“에이 제기랄. 한 숨도 못 잤네.”
용무를 마친 내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침이라 부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날이 흐려서 공기가 무거웠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아셀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주변을 훑던 시선이 침대 맨 구석에 정지했다. 두터운 이불이 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동심이라도 찾고 있냐?”
그리 중얼거린 내가 이불을 확 걷어 버렸다.
새된 비명소리와 함께 머리 빨간 난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끼야아아악!”
“놀래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허윽!”
정수리에 한 방을 쥐어박자 비명이 멎었다. 아셀은 밤새 잠을 설쳤는지 눈에 띠게 초췌해져 있었다. 울먹거리던 녀석이 머리를 쥐어싼 채 소리쳤다.
“로, 로난!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생각할 일이 많아서 여러가지 알아보고 왔지. 밤을 꼴딱 샜더니 졸려서 죽을 것 같다.”
“알아보고 왔다니? 아니, 그보다 내 말좀 들어봐. 지금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하실에, 그 지하에…!”
“확실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긴 하지. 가주의 시험이 십 분 뒤에 시작되는데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게 말이 되냐? 요게 미쳤지 그냥.”
“그, 그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이야기라니까!”
“알았으니 일단 가자. 아무리 싹수 없는 아가씨가 상대라도 바람 맞히면 안 되지.”
나는 웅크린 채 떨던 아셀을 잡아 일으켰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절실해 보였지만 싹 기각해 버렸다. 대화할 시간은 급한 일을 해결한 뒤에도 충분히 있었다.
칼자루를 톡톡 두드린 내가 문 쪽으로 턱짓했다.
“자, 어서 박살내러 가자.”
당연하게도, 중의적인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