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6)
2-106. 아칼루시아(8)
#106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구름이 잿물마냥 칙칙한 꼬낙서니를 보니 푸른 하늘을 보기에는 글러먹은 것 같았다. 아칼루시아 정원을 가로지르는 타이멘 강의 지류는 넘칠 것처럼 불어난 채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은 푹 주무셨나요?”
가주 아드리안은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붙는 드레스가 참 보기 좋았다. 에르제베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리 봐도 어머니 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푹 자기는커녕 베개에 머리를 댄 적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씩 웃어 보였다.
“덕분에요 가주님. 저택이 아주 끝내주던데요.”
“저, 저도 잘 잤어요···!”
“후후, 다행이군요. 그럼 바로 시험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드리안이 문을 나섰다. 메이드 리즈가 수행원처럼 따라붙었다.
다만 둘 중 누구도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다. 괴롭힘의 일종인가 생각하던 찰나, 아드리안이 하관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허공에 휘적였다.
파아아아···!
일대의 마나가 모여들더니, 염력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벽이 언덕에 난 도로를 뒤덮었다.
“가시죠. 아칼루시아의 정원은 비 오는 날에도 참 예쁘답니다.”
“오오···역시 마법의 명가.”
아드리안이 앞장섰다. 우리는 처음으로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저택에서 정원까지 이어진 대로는 거대한 터널로 변한 채였다. 장대비가 세상을 적시는 와중에도 투명한 벽과 천장은 물방울 하나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역시 에리의 엄마군. 이런 요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줄이야.’
잔디에 닿아 부서지는 빗방울이 아름다웠다. 세공을 거친 뒤에야 광채를 드러내는 보석처럼 수목 위에서 반짝거리는 빗물은 정원의 푸르름을 한결 더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줄곧 위축되어 있던 아셀이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다.”
“얼빠져 있기는. 너도 할 수 있어 인마.”
“지, 진짜로 그럴까? 내가 이런 마법을?”
“그럼. 오늘 시험에서 에르제베트에게 갈기갈기 찢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허억.”
아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함께 걷던 리즈가 쿡쿡거렸다. 풀 냄새가 묻어나는 공기도 상쾌한지라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산책이었다.
“···으음.”
다만 가주 아드리안의 얼굴에는 미묘한 근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내가 눈썹을 으쓱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신경쓰게 했군요. 위병조장이 안 보여서요. 비번도 아닌데, 어제 저녁부터 행방이 묘연해졌다는군요.”
“그거 참 별 일이 다 있네요. 잠깐 땡땡이치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지만···그럴 사람이 아닌데.”
“히극.”
아셀이 딸꾹질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아는 것 같았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높은 확률로 내가 어젯밤 알아낸 것과 연관이 있는 비밀일 터였고, 모든 비밀은 밝혀져야 하는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십오 분 정도를 걸었다. 투명한 터널은 목적지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시험이 치뤄지는 장소는 영지 외곽에 있는 아칼루시아 가문의 대련장이었다.
“더럽게 크네. 이래서 돈이 좋다니까.”
대련장의 자태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일개 가문이 보유한 시설 치고는 지나치게 넓고 훌륭했다. 단순 넓이만 해도 나비로제 누님의 수업이 진행되는 갈레리온 관의 1투기장을 세 개 정도 합쳐놓은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거대한 돔 구조의 대련장 앞에는 갑옷을 입은 위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위병 한 명이 나와서 경례하자 아드리안이 끄덕였다.
“비도 오는데 고생이 많아요. 에르제베트는요?”
“영애께서는 삼십 분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제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더군요.”
“그렇군요. 이런 계기로나마 무기력을 떨쳐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아드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체할 정도로 정중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련장 내부로 이동했다. 드넓은 원형 대련장의 한복판에는 아칼루시아의 제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일찍 왔군요. 에르제베트.”
에르제베트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꾸벅 숙였다. 정중한 예법이 과연 대가문의 영애 다웠다. 옷차림도 깔끔하고 머리카락도 제대로 빗어진 것이 이제야 내가 아는 에르제베트 같았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드리안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가슴의 상처는 좀 괜찮나요?”
역시 아드리안은 좋은 어머니였다. 엊그제 아침에 무례를 저지른 에르제베트에게 염력을 날린 것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에르제베트가 싱긋 미소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가주님. 언제나 그렇듯이.”
“하아···다행이네요. 부디 명예롭게 승부에 임하기를 바래요.”
“후후, 걱정 마시기를.”
입적 시험의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를 나란히 세워 놓은 아드리안이 연설용 단상에 올라갔다. 객석에는 아칼루시아의 양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른에서 마흔 명 정도 앉아 있었다.
“가주 아드리안입니다. 먼저 입회인이 되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대화재를 꿈꾸는 불씨 하나가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도전자의 이름은 아셀. 아칼루시아가 타이멘 강역에 터를 잡은 이래, 여섯 번째로 빛나는 길을 본 사람입니다.”
“으, 으앗?!”
아드리안이 부채를 펼치자 아셀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계집애처럼 놀라는 꼴을 본 내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진짜로 간에 펌프를 박고 부풀려야 하나?
하지만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은 쪼다같은 반응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길을 봤다고? 저 아이가?”
“영애 이후 처음이잖아. 이거 정말 놀라운데···!”
“흐흐, 장차 좋은 마법사가 되겠어. 힘내라 꼬마야.”
그들은 하나같이 아셀이 빛나는 길을 봤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원래 세상에서부터 녀석과 붙어 다니며 발전을 지켜보던 입장으로서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업적이었던 것 같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칼루시아는 도전자의 기량에 맞추어 시련을 내립니다. 빛나는 길을 본 도전자에게 걸맞는 시련은 당연히 가장 어려운 내부인과의 대련이죠. 그 명예로운 역할은,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오오! 영애가 직접 상대하는 건가!”
“여러모로 전례가 없는 상황이군.”
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에르제베트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셀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여기서도 들리는 것 같았다.
“상대를 굴복시키면 합격입니다. 다만, 패배하더라도 빛나는 기지를 보여 줄 경우 자체적인 판단 하에 합격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고지드립니다.”
“다행이군.”
두 번째 합격 조건을 들은 내가 픽 웃었다. 역시 아드리안은 아셀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졸전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아칼루시아의 일원으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칼루시아의 피가 묻은 이 전당에서, 명예로운 승부를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매, 맹세합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가 동시에 대답했다. 선서를 마친 두 사람은 투기장의 끝과 끝으로 이동했다. 결투를 앞둔 아셀은 이빨까지 딱딱 부딪혀 가면서 떨고 있었다.
슬며시 다가간 내가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 풀어. 너는 최고의 마법사가 될 놈이니까.”
“로, 로난···왜 아까부터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지하실에, 지하실에···!”
아셀이 울먹거렸다. 볼을 콕 찌르면 당장이라도 물풍선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후···쪼다 새끼가 진짜.”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녀석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데샨의 시체가 있다. 이거지? 화장해서 없어야 할 시체가. 그거 말고도 뭐가 잔뜩 있었고.”
“뭣···.”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나도 알아. 설마 위병조장까지 죽일 줄은 몰랐지만. 내가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비밀을 스스로 파헤치다니, 제법인데 아셀.”
아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녀석은 완전히 벙쪄 버린 채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어쨌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도망칠 수는 없어. 내가 분명히 이건 네 시험이라 이라고 했었는데, 준비한 건 있어?”
“어음, 그, 그러니까···역마법이라는 걸 알게되서, 밤새 연습하기는 했는데···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역마법이라. 괜찮네.”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세상에서 아셀이나 에르제베트가 몇 번 쓰는 걸 본 경험이 있다. 확실히 역마법은 심각한 체급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이었다.
“그거면 됐어. 한 방 먹여 주고 와.”
“사, 살해당할 거야 로난. 분위기가 이상해···! 어젯밤에 대화를 나눴던 에르제베트랑은 또 느낌이 다르다고!”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아윽! 악!”
준비 시간은 끝났다. 나는 녀석의 등짝을 힘차게 두들겼다. 아셀은 채찍 맞은 노예처럼 신음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셀과 에르제베트가 마주보고 선 것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목청 높여 외쳤다.
“그럼, 도전자 아셀의 입적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우레 같은 환호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에르제베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드리웠다.
필사적으로 심호흡하던 아셀이 뭐라도 해 보려고 입을 떼는 찰나.
“이, 인비저블 핸···”
“인페르노 서클. 레이지 스톰. 사일런트.”
에르제베트의 입에서 연달아 주문이 읊어졌다. 일대의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대련장 바닥 전체가 기하학적인 마법진으로 뒤덮였다.
“무슨···!”
아드리안의 눈이 커졌다. 소란스럽던 객석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마법의 규모에 사람들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암적색 화염이 마법진의 테두리를 따라 터져 나왔다. 성난 강처럼 범람하던 불은 울타리처럼 측면을 감싼 걸로 모자라 천장까지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반구가 온전한 형상을 갖춤과 동시에, 균열 같은 전류가 반구를 휘감아 버렸다.
“저,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에리,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대련을 중단하세요!”
다급하게 외친 아드리안이 부채를 뻗었다. 염력으로 이루어진 충격파가 반구를 강타했다. 하지만 화염과 벼락의 장막은 잠깐 출렁거리기만 할 뿐 사라지거나 깨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칼루시아의 가주라도 저걸 뚫으려면 제대로 준비된 마법을 써야 했다.
“···너를 믿었는데.”
아드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대기가 일그러져 보일 만큼 강렬한 마나가 그녀의 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로난 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가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십 미터 정도를 가뿐하게 뛰어오른 몸이 제비를 돌며 아드리안의 앞에 착지했다.
“끼어들지 마세요. 이 정도 역경은 이겨내야 하니까.”
“뭐라고요?”
막 파괴적인 마법을 투사하려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영창을 멈췄다.
“끼어들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아셀 님이 죽을 거라고요!”
“재수없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아마 안 죽을 거에요. 누가 알려줬는지는 모르지만 괜찮은 걸 배웠더라구요.”
“···네에?”
아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자 모여들던 마나가 사그라졌다. 불벼락의 반구는 시간이 갈수록 지랄맞게 빛나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썩 재밌는 상황일 터였다.
아드리안을 진정시킨 나는 연설대 바닥에 철푸덕 앉아 버렸다.
“괜찮으니까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지난밤부터 제가 알아낸 것을 이야기해드릴게요. 이 대가문의 비밀에 대해서.”
“비밀···이라뇨?”
“글쎄요. 여러가지가 있는데···가주님이 가장 흥미로워 할 주제는 아마도 이거겠죠.”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 아셀과 싸우는 건 에르제베트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