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7)
2-107. 아칼루시아(9)
#107
“이, 이건!”
아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개전과 동시에 펼쳐진 화염의 돔은 일대의 풍경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작열하는 표면을 타고 흐르는 벼락은 탈출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표정이 볼 만하군. 천재 나리.”
대련장 맞은편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르제베트 님.”
아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복을 입은 에르제베트가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토록 거대한 규모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했음에도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거에요?”
“왜라니. 너도 참 머리가 나쁘군. 방해가 될 법한 요소는 당연히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가문의 상징까지 망가뜨려 가면서 경고했는데 들어온 건 엄연히 너희 잘못이라고.”
“가문의 상징이라면···역시 그 사자상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으깬 딸기로 만들어버릴 뻔 했던 수사자의 두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리즈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했는데, 정말로 에르제베트가 한 짓이었을 줄이야.
“그래. 머리 검은 놈은 대충 알아챈 것 같던데, 너는 전혀 몰랐나 보군.”
“이해가···이해가 안 돼요. 저희가 왜 영애님께 방해라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아칼루시아에 방해가 된다. 나는 딱 보면 알거든. 아무리 재주가 특출나도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일을 그르치는 부류가 있는데, 너희 둘은 정확히 거기에 부합하는 인물상이야. 처음에는 성과를 내다가도 결국에는 가문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겠지.”
“제,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되려고 왔는데 왜 발전을 방해하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질문하지. 너는 아칼루시아의 패권을 위해서 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나?”
“…네?”
“만 명을 죽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들이 남과 다른 점은 몸 속에 아칼루시아와 적대하는 가문의 피가 흐르거나, 그 가문에게 협조했다는 것 뿐이야. 당연히 여자나 노인, 말 못하는 아기도 포함되어 있지. 너는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된다면 그 차이점을 ‘죄’로 규정하고 학살을 자행할 수 있나?”
아셀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딴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이 어젯밤 자신에게 홍차를 대접하며 사과했던 영애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르제베트가 실소했다.
“그거 봐라. 대답 못 하지. 내 모든 것을 찬양하며 발등을 핥아도 생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저, 저는···.”
“아칼루시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순종적인 인재, 아니면 조금 덜떨어졌을지언정 시키는 대로 하는 장기말이다. 빛나는 길을 본 네 재능은 그럭저럭 쓸만하다만 불행히도 신념이 너무 강해.”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손을 뻗었다. 염력으로 이루어진 촉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아셀이 반사적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이, 인비저블···컥!”
하지만 허사였다. 보이지 않는 손은 염력 촉수와 충돌하는 순간 폭발하듯 해제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아셀을 휘감은 촉수가 그를 에르제베트의 앞까지 끌고 와서 내동댕이쳤다.
“카악!”
가녀린 몸이 바닥을 굴렀다. 아셀은 수레에 치인 토끼 같은 몰골이 되어 널브러졌다.
콰직! 천천히 걸어온 에르제베트가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끄아아아아악!”
갈비뼈가 부러진 아셀이 비명을 질렀다.
에르제베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남길 말은 있나? 빛나는 길을 본 그 재능을 높게 사서 특별히 들어 주마.”
“하아! 하아아···! 당신은 누구죠? 여, 영애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아셀이 외쳤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에르제베트는 어젯밤에 자신과 홍차를 마시던 영애와 다른 사람이었다. 지하실에서 아데샨의 시체를 보며 킥킥거리던 여자는 에르제베트가 아니라 바로 이 자였던 것이다.
“빨리도 알아차리는군.”
에르제베트. 아니, 그녀의 흉내를 내는 괴한이 웃음지었다.
“네 말대로다. 나도 이 모습으로 살인을 하자니 영 내키지 않아. 모녀 관계가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 아드리안은 더없이 큰 실망을 할 테고, 화도 많이 내겠지. 어쩌면 일 년쯤 말을 안 섞을지도 몰라.”
“크윽···으으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오늘의 살인은 한창 예민했던 시기의 딸이 저지른 사고로 치부되어 잊혀지겠지. 아드리안은 절대로 에리를 버리지 못해. 그녀는 추악한 나와 달리 천성부터 선한 사람이니까······그래, 바보같을 정도로.”
괴한이 말꼬리를 끌었다. 차갑기만 하던 눈빛에 처음으로 감정이 스치며 지나갔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그가 아셀의 이마에 검지를 겨누었다.
“모두 너희가 없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오붓하던 모녀 관계를 망친 책임을 물어서, 너와 네 친구는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다듬어진 손톱 아래로 불꽃이 피어나더니 열매처럼 영글었다. 작은 화염구는 이제 곧 아셀의 두개골을 녹이며 파고들어 뇌를 불살라 버릴 터였다.
“아, 안 돼···.”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괴한이 막 마법을 사출하려던 차였다.
사냥감을 감상하듯 아셀을 훑어보던 시선이 그의 양 손에 고정되었다.
“···별버섯의 포자?”
괴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셀의 손에 푸르스름한 가루가 묻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쏘아질 것 같던 화염구가 사그라졌다.
‘가, 갑자기 왜 멈춘 거지?’
아셀은 기절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괴한을 관찰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어젯밤에 만났던 에르제베트와 미세한 차이가 느껴졌다. 묘하게 이질적이라 해야 할까. 폴리모프로 추정되는 마법의 잔향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가 으르렁거렸다.
“너. 이걸 어디서 만진 거냐.”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시치미 떼지 마라. 네 손에 묻은 가루는 아칼루시아 영지에서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야. 설마 내 연구실에 들어왔던 거냐?”
“······!”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자신의 손에 그런 가루가 묻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지하의 연구실에 가루가 흩날리고 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묻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들어왔더라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어···그렇다면 혹시.”
불현듯 괴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가루의 비밀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중얼거리던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얼빠진 것 같으니, 아드리안이 눈치챘다가는 일을 그르칠 뻔했잖아.”
“뭐라고요?”
“네 손에 묻은 것은 별버섯의 포자라는 약재다. 굉장히 귀하고 유용한 소재지만 한편으로는 참 다루기가 까다로운 놈이지. 잘 묻는 주제에 특수한 방법으로 씻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거든. 아무래도 내 동업자가 어쩌다 보니 네놈에게 포자를 묻힌 것 같군.”
“도, 동업자?”
아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타인과의 접점이 없었다. 응접실에서 아드리안을 만난 이후로는 줄곧 방에서 잠만 잔 그였다. 괴한이 큭큭거렸다.
“글쎄다. 내게 거기까지 대답해줄 이유는 없어서 말이지. 저승에서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포자를 묻힌 게 누구였는지.”
무언가가 다시 검지를 뻗었다. 마나가 모여들며 사라졌던 화염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만둬요.”
“비명은 얼마든지 질러도 좋다. 어차피 누구도 듣지 못할 테니까.”
절망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괴물이다. 퇴로는 모조리 차단된 채였다. 심지어는 화염의 돔 안쪽에 내리깔린 사일런트 마법 때문에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이제 저 화염구가 발사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불행했지만 그래도 후반부는 썩 괜찮았다.
로난과 함께 뗏목 여행을 나선 뒤부터는 일 분 일 초가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즐거웠지.’
안개 속에서 빛나는 길, 아름다운 가주의 환대, 홍차의 따스함과 비 내리는 아칼루시아 정원의 찬란함, 겉은 까칠했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스했던 영애의 진심 어린 사과.
티는 내지 않았지만 입적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에게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기대와 인정은 가슴을 절로 벅차게 만들었다.
이제야 사는 재미를 알았는데.
그런 경험을 더 해보고 싶었는데.
하얀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아셀은 깨달았다.
“······아?”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마법처럼 한 자리에 맞춰졌다.
그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와 그가 언급했던 동업자가 누구인지를, 화장했다던 아데샨의 시체가 지하의 연구실에 있게 된 경위를.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요절한 이유까지도.
모든 것을 깨달은 아셀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에게는···.”
“음?”
에르제베트의 형상을 한 괴한이 갸웃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발을 통해 느껴졌다.
“뭐야. 죽을 때가 되니까 용기가 샘솟기라도 하나?”
“당신. 당신에게만큼은···.”
무언가가 조소했다. 버러지의 저항 따위 알 바가 아니었기에 그는 예정대로 검지에 힘을 줬다. 손끝을 떠난 불덩이가 아셀의 미간을 꿰뚫으려던 차였다.
화륵!
물을 끼얹은 것처럼 허공에서 불이 사그라졌다.
“뭐야. 이게 왜···.”
무언가의 눈매가 좁혀졌다. 마법사가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불발이었다. 바들거리며 팔을 든 아셀이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놔라.”
“크윽···크으으···!”
“정신이 나갔나 보군. 놓으라니까?”
괴한이 발에 힘을 더했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피가 터져 붉어진 아셀의 입술 사이로, 쥐어짜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당신에게만큼은, 절대로 죽을 수 없어.”
[가주 아드리안이 갸웃거렸다.
“아셀 님과 싸우는 사람이 에르제베트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제가 먼저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지하실에는 왜 들어가지 말라 하신 거죠?”
“네?”
아드리안이 흠칫거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관객 대부분이 에르제베트의 불벼락 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하아······사실은, 에르제베트가 요즘 거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데샨 양을 잃은 뒤부터 계속요. 여러분과 마찰이 생길 수도 있고, 실의에 빠진 영애를 손님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이걸 알아두셔야 해요. 가주님의 외동딸인 에르제베트 양은 지하실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한두번은 그럴 수 있어도, 매일같이 들락거린 건 전부 따님이 아니었어요.”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죠? 몇 번이고 오가는 것을 제 눈으로 봤는데.”
“그러니까, 그건 에르제베트의 흉내를 내는 존재지 에르제베트가 아니라는 거에요. 지금 아셀을 죽이려 하는 것도 바로 그 새끼고요. 저한테 숨기는 게 있죠, 가주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되물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아니, 그 괴물을 삼킨 반구는 작은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벙쪄 있던 아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숨기는 거라니···로난 님. 방금의 언사는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는군요. 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그럴 수도 있죠. 왜냐하면 지금 가주님이 감추고 있는 정보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정보거든요. 잘못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게 사실이죠.”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일어났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드리안이 움찔거렸다. 십대 시절의 아데샨이 보일 법한 귀여운 반응이었다.
허리를 굽혀서 그녀와 눈을 맞춘 내가 작게 속삭였다.
“일루안 데 아칼루시아···그러니까 남편 분이 지하실에 계시잖아요. 살았다 하기에도, 죽었다 하기에도 애매한 상태로.”
“······!”
“마력 폭주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주님은 일루안을 죽이지 못하고 지하실에 봉인했어요. 사람들은 화장했다 알고 있지만 그의 육신은 저택 지하 깊은 곳에 안치되어 있죠. 물론 에르제베트와 마주칠까봐 지하실에 들어가지 말라 하신 것도 있겠지만, 행여나 일루안을 발견할까봐 걱정하신 것도 사실이죠?”
“어, 어떻게 그걸···.”
“쉽지 않았죠. 가주님, 저는 어젯밤에 늪에 다녀 왔어요. 아데샨이 빠져 죽었다는 그 늪에요. 아무리 납득하려 해 봐도 그 똑 부러진 사람이 족사했다는 말은 믿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늪을 반으로 갈라 봤어요.”
“가르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꽤 깊긴 했는데 그리 넓지는 않더라고요.”
기껏해야 이 투기장 만한 넓이였으니 못할 것도 없었다.
첫 번째 평행세계에서는 얼어붙은 땅도 갈랐는데 뭘.
지난밤을 반추하던 내가 헛웃음을 쳤다.
“흐, 진짜 어이가 없어서···늪 아래에서 뭐가 나왔는지 아세요?”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비밀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통로가 나왔어요. 아칼루시아 저택의 지하실과 이어진 통로가.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이프도 몇 개나 있었는데, 워낙에 직경이 커서 시체를 바꿔치기에도 적당해 보이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통로를 따라 걸어보니 음침하기 짝이 없는 지하실이 나왔어요. 인간과 동물의 시체를 개조해서 만든 괴물들이 복도에 늘어선 방마다 가득 차 있더군요.”
“말도 안 되는···! 제가 그이를 봉인한 건 사실이지만, 지하실에 그런 건 없어요!”
“아뇨. 분명히 있어요. 생겼다고 해야 할까? 가주님께서 눈치채지 못하신 것 뿐이지. 어쨌든 저는 그 중 어느 방의 연구실에서 아데샨의 주검을 발견했어요. 남편 될 사람으로서 장담컨데 틀림없는 아데샨이었죠. 에리가 건져내고 화장한 것은 지하의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가짜였어요.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설마···.”
“한 명밖에 없잖아요 가주님. 남편 분이 한 짓이에요.”
“···아아.”
아드리안이 비틀거렸다. 나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기에 배풀 수 있는 친절이었다. 아드리안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악령이 된 그녀의 남편과 후술할 흑막의 죄질에 비하면 그녀의 잘못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아무 문제 없었을 거야.’
수호령 비슷한 역할을 하던 남편이 미쳐 버린 것도, 이쪽 세상의 아데샨이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 흑막 탓이었다.
아드리안을 일으킨 내가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나요 가주님? 지금 아셀과 싸우고 있는 건 에르제베트가 아니에요. 아데샨의 시체를 바꿔치고, 가문을 번성시키겠다는 욕망에 미쳐서 폭주하는 일루안이죠. 못 믿겠다면···”
내가 말을 잇던 차였다.
퍼어어어어엉-!
갑자기 대련장을 휘감고 있던 반구가 폭발하듯 흩어졌다. 벼락도, 이글거리는 화염도, 소통을 차단하던 사일런트 마법도 모조리 마나로 환원되어 분해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아칼루시아의 제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죽일 애송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저건?!”
관객들이 경악했다. 몸에 맞지 않는 제복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사내의 얼굴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번씩은 본 적이 있었다.
아드리안의 부군이었던 일루안 데 아칼루시아.
폴리모프 마법이 해제되며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후우···후우우···.”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자명했다.
일루안의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아셀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당장 쓰러져서 죽을 것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녀석이 보여주는 사내다운 모습에, 저절로 입꼬리 한 쪽이 올라갔다.
“거 봐요. 할 만 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