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8)
2-108. 아칼루시아(10)
#108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루안이 당혹성을 흘렸다. 놈은 작금의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세 가지 마법을 겹쳐 만든 화염의 돔은 온데간데없이 소멸해 버렸다. 에르제베트의 모습을 유지하던 폴리모프 마법도 해제된 채였다.
“···됐다.”
아셀이 혼잣말했다.
개운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가녀린 몸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와 객석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일루안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았다. 객석을 채운 아칼루시아의 양자 중에는 놈이 아는 면면도 제법 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자들의 눈빛은 두려움과 의혹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고로 돌아가셨던 일루안 님 아니야?”
“잠깐만, 영애는 어디 갔지?”
“설마···.”
확실히 명문가의 자제들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가주 아드리안은 밀랍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하긴, 봉인된 줄 알았던 남편이 딸 행세를 하면서 개짓거리를 일삼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았다. 딸의 옷까지 훔쳐 입었다면 더더욱.
다시 아셀을 돌아본 일루안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네놈이 모든 걸 망쳤다.”
“하아아···쿨럭! 쿨럭!”
아셀은 대답하는 대신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루안이 팔을 쳐들었다.
“요행도 끝이다. 골수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워 주마!”
창백한 손아귀에 불길이 휘감겼다. 이글거리는 마법진 일곱 개가 허공에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손과 마법진에서 작열하는 광선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이 경악했다.
“아셀 님!”
그녀가 팔을 뻗었다. 반투명한 역장이 아셀을 뒤덮었다.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시전 속도였지만, 불행히도 일루안의 광선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뛰어났다.
콰장창!
단번에 방어막을 녹여버린 광선이 아셀을 향해 쇄도했다.
“아, 안 돼!”
양자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당황하지 않는 것은 나와 아셀 뿐이었다. 뭐라 웅얼거린 아셀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녀석의 몸을 중심으로 아지랑이 같은 마나의 파문이 터져 나왔다.
촤아아악! 파문과 맞닿은 여덟 개의 광선이 마나로 환원되어 흩어졌다.
“무슨.”
일루안의 눈이 커졌다. 대견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완전히 탈진한 아셀이 주저앉는 순간,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역마법이다!”
“뭐라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셀의 고사리같은 손에는 일루안이 시전했던 마법과 정확히 반대되는 형질의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광선을 분해시켜 버린 파문도 바로 저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금의 돔이 사라진 것도 설마···!”
아드리안이 전율했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셀이 역마법을 배운 것은 틀림없는 어제 새벽이었다. 연속으로 마법을 봉쇄당한 일루안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일루안은 마법을 포기하고 아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힘이 엄청 세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셀의 작은 머리통 정도는 홍시처럼 으깨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사람들이 그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슨 짓입니까, 일루안!”
“추태는 그만두시오!”
아드리안과 양자들이 일제히 주문을 영창했다. 수십 개의 마법이 연쇄적으로 일루안을 덮쳤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일루안의 목을 휘감았다. 푸르스름한 전류 다발이 감옥처럼 그를 속박했다. 땅을 부수며 튀어나온 강철 상어가 일루안의 다리를 물더니 묵직한 족쇄로 변모했다.
“크윽!”
일루안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족쇄가 채워진 주먹은 아셀에게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얼음 사슬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일루안은 거대한 마법진과,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남편을 완전히 제압한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일루안…당신이 왜?”
“······아드리안.”
일루안이 입술을 비틀었다. 전체적으로 순박한 인상의 사내였지만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온기와 총명함은 사라지고, 날카로운 지성만 남아 있는 모습은 푸줏칼로 전락한 메스를 보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지하실에서 무슨 짓을 한 거에요?”
“아드리안, 나는.”
“왜 에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에요?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어깨 위로 피어어나는 중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일루안이 말꼬리를 끌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아드리안이 버럭 소리쳤다.
“말해!!”
“······!”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련장에 메아리쳤다. 한순간 일루안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단순한 고함이 아니라 일종의 최면 효과가 있는 마법인 듯했다.
영혼을 흡수당한 것처럼 벙쪄 있던 일루안이 마침내 입을 뗐다.
“······아칼루시아는 다시 위대해져야 해.”
“뭐라고요?”
“가문이 번성하고 있다지만 이걸로는 턱도 없어. 그랑시아의 돼지들은 갈수록 세를 불려가고, 변방에서도 위협적인 신흥 귀족들이 나타나고 있지. 이대로라면 아칼루시아는 압도적인 입지를 잃어버리고 말아.”
자리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일루안은 감전된 것처럼 움찔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 봉인에서 풀려났지. 그래서 에리를 대신해 가주가 되려 했어···그 아이는 지나치게 당신을 닮아서 성격이 모질지 못하니까. 노력은 하는 것 같다만 절대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할 성격이 아니잖아.”
“그게 무슨···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요.”
“나를 봉인에서 풀어 준 동업자는 당장 가주가 되는 걸 종용했어. 하지만 당신과 에리에게 해코지를 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당신이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지하에서 세력을 키웠어. 불사의 군대를 육성하고, 가문의 발전을 방해할 여지가 있는 잡초들도 적당히 제거하면서. ”
“잡초를 제거해···?”
아드리안이 멈칫거렸다. 말뜻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르제베트를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서, 설마 당신이 아데샨 그 아이를 죽인 건가요?”
“그래.”
“도대체 왜? 어째서 그런 짓을···!”
“지나치게 영특했거든. 내 계획을 알아차릴 만큼.”
죽음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실족사일리가 없었다.
회귀를 한 번 겪은 아데샨이라도 당대의 마법사인 일루안이 작정하고 죽이려 든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데샨을 죽인 일루안은 그녀를 늪에 빠뜨려서 시체를 빼돌렸다.
하지만 왜?
잠깐 뜸을 들이던 일루안은 그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시체는 상처 하나 없이 보관해 놨어. 에리가 그 아이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훗날 내가 가주가 되면, 따로 마련해준 공간에서 되살린 아데샨과 함께 지내게 해 주려고 했어.”
“······당신은 미쳤어요.”
아드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감하는 바였다.
나는 당장 뛰쳐나가 저 개자식을 만 조각으로 찢어 죽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미 전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성검의 칼자루가 나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내 차례가 아니야.”
나는 칼자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질러 버릴 생각이었다면 지하실을 발견하는 즉시 죄다 썰어 버렸을 터였다.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일루안의 폭로를 경청하고 있었다. 가끔은 생략 없이 모든 전말을 보여줌으로서 충격을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어이.”
나는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대신 아셀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검지로 뺨을 쿡쿡 찌르자, 메마른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난?”
“고생했다 아셀. 잘 싸웠어. 역마법을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깨우쳤던데.”
믿을 수 없는 성과였다. 하긴 이 정도는 해 줘야 대마법사의 재목인가 싶기도 했다. 아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정말 고마운데 몸이 안 움직여···나, 나 이제 죽나봐···흑.”
“니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죽기는 개뿔이 죽어. 단순한 마나 고갈이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훌쩍거리는 아셀을 어깨에 들쳐멨다.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 그런가 지나치게 가벼웠다. 거의 여자애 수준인데, 일단 살부터 좀 찌워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객석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맞다. 로난!”
“아씨, 깜짝이야.”
갑자기 아셀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환자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머리를 쥐어박았을 터였다.
“왜 그래?”
“이, 이대로 있으면 안 돼···범인이 한 명 더 있어. 어, 어디 갔지?! 분명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아셀이 허둥거렸다.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사태의 흑막이자 가장 죄질이 나쁜 인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내가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게, 없네. 아쉬운 대로 다음 목표를 처리하러 가지 않았을까? 워낙에 일이 크게 틀어졌으니.”
“다, 다음 목표라면?”
“여기에 없는 에르제베트 영애님이지 뭐. 남편을 두 번 죽이고 외동딸마저 잃는다면 가주님은 완전 폐인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나저나 기척 지우는 거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아드리안 누님이 못 알아챌만도 해.”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수 년 동안 지하실에서 그 쿵짝을 떨고, 딸아이가 두 명이 됐음에도 아칼루시아가 멀쩡하게 굴러갔던 것은 오로지 흑막의 기깔나는 솜씨 덕이었다.
태연한 말투에 놀란 아셀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그럼 큰일 난 거잖아! 빨리 가서 영애님을 구해야지!”
“괜찮아 인마. 큰일이 났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너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몫을 다했으니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어.”
“아윽!”
나는 아셀의 코를 가볍게 튕겼다. 작은 머리통이 힘없이 떨구어졌다.
했던 말 그대로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았다. 에리를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흑막의 예상은 빗나갈 것이다.
그녀가 소파에 묻은 별버섯의 포자에 신경이 쓰여서 새벽잠을 설쳤기 때문에.
불현듯, 대련장 쪽에서 동시다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억.”
“맙소사, 일루안!”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뭔가 싶어서 시선을 옮겼다. 자유의 몸이 된 일루안과 주저앉아 있는 양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루안의 몸을 구속하던 각양각색의 마법은 모조리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드리안의 얼음 사슬조차도 그의 발아래에서 솟아나는 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전하군 아드리안.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은 걸 말해 버렸어.”
최면이 풀렸는지 눈동자의 빛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일루안이 말했다.
“하지만 역마법은 원래 내 특기였다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지.”
“당신, 여기서 더 추태를 부릴 생각인가요!”
아드리안이 버럭 외쳤다. 일루안은 그녀를 무시한 채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마나의 파문이 퍼지나 싶더니 얼음 사슬조차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마나가 역류하는 충격에 아드리안이 휘청거렸다.
“윽!”
“이렇게 된 이상 처음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겠군. 내가 무슨 마법을 연구하다 실패했는지 기억나?”
“자, 잠깐. 그만둬요!”
난간을 짚고 일어난 아드리안이 당혹성을 흘렸다. 급박한 표정은 남편의 정체가 드러날 때보다 심각해진 채였다.
“걱정 마. 나는 가족을 사랑하니까. 당신과 에리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일루안이 웃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형용 못할 굉음이 울려 퍼졌다. 태고적의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비가 그친 것을 눈치챈 내가 고개를 들었다.
“허.”
그리고 헛웃음쳤다. 자욱하던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이 아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불길에 휘감긴 거대한 암석이 강하하고 있었다. 작열하는 표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분해되고 있었다.
“내게 와라···별이여.”
일루안의 입가에는 균열 같은 웃음이 드리워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연구하던 것은 우주의 별을 끌어와 떨어뜨리는 마법인 듯했다. 열기로 인해 운석 주변의 대기가 일그러져 보였다.
왜 실패했는지 알겠네 씨발.
“일루안! 그만둬!”
아드리안이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양자들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뱀과 마주친 개구리처럼 모든 희망을 잃고 얼어붙어 있었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일 분이 채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아···씨발 진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내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래. 이제 참을 만큼 참았지.”
[“······?”
빗소리가 갑자기 그쳤지만 침입자는 신경쓰지 않았다.
문고리를 살짝 당기자 방문이 열렸다. 경첩을 기름에 절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음이 전무했다. 어두침침한 방 깊숙이, 호화로운 침대가 보였다.
“코오오···.”
그 위에서는 아칼루시아의 영애이자 차기 가주인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천성이 예민한지라 원래는 버릇처럼 잠을 설치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코끼리가 방에 들어와도 깨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어젯밤에 마신 홍차에는 그런 약초가 들어 있었다.
“······.”
침입자가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늘고 긴 피스톤 안쪽에는 금빛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잠 못 이루는 그녀의 수면 시간을 무한대로 늘려줄 특효약이었다.
펌프를 살짝 눌러서 주사기의 동작을 확인한 침입자가 침대로 다가가던 차였다.
“포이카 두꺼비의 체액. 안락사에 사용되는 희대의 극독이죠.”
“……!!”
“그걸 제게 주사할 생각인가요?”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눈을 떴다. 침입자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방의 불이 켜졌다. 몸을 일으킨 에르제베트가 침입자와 마주섰다.
“별버섯의 포자가 당신의 손에도 묻어 있네요. 어째서일까요?”
“······영애님.”
“응? 리즈. 내가 묻고 있잖아요.”
에르제베트의 뺨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침입자, 메이드 리즈가 천천히 주사기 든 손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