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39)
2-109. 아칼루시아(11)
#109
에르제베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답해요 리즈. 언제부터 변절했던 건가요?”
“영애님. 저는···.”
메이드 리즈가 말꼬리를 흐렸다. 퇴로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려본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창문을 포함한 모든 출입구가 보랏빛 역장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아칼루시아에서도 단단하기로 유명한 에르제베트의 방어막이었다.
“발뺌할 생각은 말아요. 증거는 이미 명확하니까.”
에르제베트가 검지를 쳐들었다. 고운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에는 미량의 푸르스름한 가루가 설탕처럼 묻어 있었다.
“이건 별버섯의 포자에요. 아셀 님이 앉았던 소파에 묻어 있었죠. 굉장히 보기 드문 재료라 이걸 어디서 묻히고 오신 건지 의문이었는데, 홍차를 치우던 당신의 손에 묻어 있더군요.”
“제 손에···말입니까?”
“잘 안 보일 거에요. 마나 감응 능력이 뛰어나야지만 선명하게 볼 수 있으니까. 청소의 귀재인 당신이 미처 놓치고 지나간 이유도 그 때문이죠.”
리즈는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려보았다. 과연 에르제베트의 말대로였다. 굳은살이 배긴 손은 평소와 다름없는 살색을 띠고 있었다.
‘그 연구실에서 묻은 건가.’
짐작가는 곳은 한 군데였다. 새벽에 위병조장 아약스의 시체를 넘기려고 갔던 일루안의 연구실이었다. 아셀에게 묻은 시점은, 악몽을 꾼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아 줬을 때였을 터였다. 설마 내가 이런 불찰을 저지를 줄이야.
에르제베트가 말을 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당신은 어디선가 별버섯의 포자를 묻히고, 그 손으로 아셀 님의 손을 맞잡은 거에요. 느낌이 이상해서 추리를 하려 했지만 잠이 쏟아져서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당신이 홍차에 넣은 수면제 때문에요.”
“···알고 계셨군요.”
“당연하죠. 저는 당신의 홍차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솔직히 수면제가 함유됐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원래 당신은 제가 마시는 음료에 조금씩 수면제를 섞어 왔으니까요. 예민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저를 생각하는 행동이라 생각되어 오히려 기뻤어요. 헌데 어제 새벽에 내린 홍차에는 과할 정도로 많은 양이 들어 있더군요. 그조차도 배려인 줄 알았지만···.”
에르제베트가 주억거렸다. 실제로 그녀는 리즈가 내려 주는 홍차를 매우 좋아했다. 아셀이 멀쩡했던 이유는 에르제베트를 의심해서 수면제가 든 홍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덕이었다.
“어쨌든 홍차를 마신 저는 곧 잠들었어요. 여기까지는 당신의 의도대로였죠. 새벽에 들어온 누군가 저를 깨워 주지 않았더라면, 그 주사기는 예정대로 제 목에 박혔을 거에요.”
“그게 누구였습니까?”
바보네요 리즈. 제가 말할 리가 없잖아요.”
리즈의 눈매가 좁혀졌다.
새벽에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던 에르제베트가 몸서리쳤다.
당시에는 정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말 한 번 안 섞어본 남자가 막무가내로 침소에 들어닥친 상황이었으니까. 누군가 볼을 콕콕 찌르길래 눈을 떠 보니, 로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꺄아아···읍!
-쉿. 조용히.
에르제베트는 즉시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허사였다. 힘은 둘째치고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위압적이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로난의 말대로 조용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침에 겪었던 수모를 보복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내 말 잘 들어 에리. 오늘 리즈가 널 죽일지도 몰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살 수 있어.
– ······?!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로난은 자신을 죽이거나 겁탈하는 대신 무언가를 먹였다. 약초를 돌돌 뭉친 것이었는데,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잠기운이 확 달아나 버렸다.
수면제의 효과를 없애 준 로난은 아칼루시아의 무시무시한 비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다 들었어요. 아데샨 언니는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한 거고, 주검은 화장된 게 아니라 보존되어 있고, 저는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지하실에 기거하는 사람으로 전락했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으로 미쳐서 음침한 연구를 일삼는···하지만 가장 끔찍한 건 뭔지 아세요?”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리즈는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모든 악행을 제 아버지와, 자매처럼 여기던 당신이 저질렀다는 거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아버지는 엄마의 손에 죽은 게 아니었나요?! 정말로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거라면, 갑자기 왜 풀려나서 악행을 저르는 건가요!”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와락 터져 나왔다. 에르제베트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적막해진 방 안에서는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침묵하던 리즈가 입을 뗐다.
“영특하시군요 영애님. 말씀하신 대로 범인은 제가 맞습니다.”
“리즈.”
“제 목적은 애시당초 아칼루시아를 무너뜨리는 거였습니다. 봉인된 일루안 님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지하실을 청소한 날이었죠. 그 순간, 저는 이 가문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깨달아 버렸습니다.”
리즈가 눈을 감았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다. 실험 사고로 죽었다던 일루안은 그가 소환한 운석과 결합된 채 지하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는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자랑스러운 가문, 이루지 못한 야망에 대해 뇌까리고 있었다.
“좋은 분이었습니다. 무작위로 늘어 놓는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영애님과 가주님의 이름이더군요. 저는 그런 일루안 님과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
“네. 봉인을 풀고 새 육체를 제공할 테니 아칼루시아를 부흥시켜 달라는 조건의 계약서를 작성했죠. 영애님과 가주님이 위험하다는 말을 덧붙이니 곧바로 승낙하시더군요. 계약은 이루어졌고, 계약서의 마법은 일루안 님의 우선 순위를 가족이 아니라 가문의 부흥으로 바꾸었습니다. 저희가 의도한 대로 말이죠. 그 뒤는 영애님도 아시는 대로 흘러갔습니다.”
백치 상태의 일루안을 속여넘기는 것은 어린아이의 사탕을 빼앗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리즈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으셨다면 그런 일이 안 벌어졌을 텐데. 이래서 감정이란 건 참 쓸모가 없다니까요.”
“자, 잘도 그런 짓을···!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어서?”
“위대한 별을 위해서라고 해야 할까요. 죄송하지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리즈가 고개를 내저었다. 충격을 받은 에르제베트는 석상처럼 굳은 채였다. 떨려오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보던 그녀가 설핏 미소지었다.
“그리고 영애님은 참 변함이 없으시군요.”
“···뭐라고요?”
“정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죠. 제가 모시는 내내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영문 모를 소리였다. 에르제베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딱! 갑자기 리즈의 얼굴 쪽에서 부싯돌을 튀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벌어진 입 안에서, 작은 마법진이 새겨진 혓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응? 에히.”
“······!!”
에르제베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다급하게 방어 주문을 영창하려는 순간이었다. 혓바닥의 마법진이 빛을 뿜더니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들소에 치인 것처럼 날아간 에르제베트가 반대편 벽에 충돌했다.
“아윽!”
“네 말이 맞아. 나는 청소 마법을 제외하고는 별 볼일 없어. 봉인을 해제한 것도, 새 육체를 제공한 것도 다른 간부의 솜씨였지.”
성큼성큼 다가온 리즈가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소모된 혓바닥의 마법진은 단순한 문신으로 돌아간 채였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아. 마지막에는 좀 틀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칼루시아의 영애님을 처치했다는 최고의 성과를 냈으니까. 그랑시아에서 7년째 죽쑤고 있는 멍청이 돌란과는 다르지.”
“리, 리즈···쿨럭!”
에르제베트가 피를 토했다. 설마 혓바닥에 마법을 각인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마법을 시전하고 싶었지만 통증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아데샨의 죽음 이후로 게을리 했던 수련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엇다.
다시 한 번 주사기를 테스트한 리즈가 작별인사를 했다.
“즐거웠어, 에리.”
“그···만둬···.”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아데샨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윽, 으으.”
에르제베트가 저항했지만 허사였다. 주사기를 들이대는 리즈는 닭의 모가지를 비트는 주방장처럼 무덤덤했다. 이윽고 주삿바늘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아, 안 돼···.”
자신을 영원한 잠의 세계로 인도할 금빛 액체가 피스톤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바늘의 가장 좁은 부분이 에르제베트의 목에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벽 너머에서, 하늘이 파열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꺄앗!”
“무슨···?!”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보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에르제베트와 리즈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방에 있는 창문이 단번에 박살났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드러나나 싶더니, 유리 파편을 실은 폭풍이 실내에 불어닥쳤다.
그것은 왼쪽에 벽장을 낀 에르제베트와 달리 엄폐물이 없는 리즈에게 큰 불행이었다. 못해도 수백 개의 파편이 리즈의 반신에 날아와 박혔다.
“아악! 누, 눈이!”
리즈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주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편에 적중당한 왼쪽 눈에서 저항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사기를 걷어찬 그녀가 리즈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마나가 모여들더니 작은 화염구가 쏘아졌다. 하지만 시도가 무색하게도, 화염구는 리즈의 머리카락만 그을리며 빗나가 버렸다.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
“에리, 네가···!”
리즈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유리 파편에 고슴도치가 된 채 고통스러워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느새 일어난 에르제베트는 절뚝거리며 문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흐으···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에르제베트를 돌아본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발목까지 오는 자신의 치마를 확 들추었다. 레이스가 달린 속옷,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와 그 위에 새겨진 마법진이 드러났다.
“허억.”
“하아···하···! 내가 왜 목욕 보조만큼은 안 한 것 같아?”
리즈가 큭큭거렸다. 혓바닥에만 새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법진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허벅지 앞으로 불길이 영글었다. 에르제베트가 발사했던 것보다 열 배는 더 커다란 화염구였다. 맞는다면 즉시 소사체가 되어 버릴 위력의.
“그럼 잘 가, 에리!”
이번에는 저항할 없었다. 리즈의 외침과 동시에 화염구가 쏘아졌다. 죽음을 앞둔 에르제베트의 시간이 느려졌다. 모든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아···.”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한 범인에게 죽는다는 것이, 차기 가주 될 자로서 아칼루시아의 어둠을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고, 그 원인이 무기력함에 빠져서 수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 와중에도 문신이 새겨진 리즈의 허벅지가 썩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뇌세포가 자신의 머리에 들어 있다는 저열한 현실이.
‘한심한 죽음이네요. 자업자득이에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느릿하게 가까워지던 화염구와의 간격은 어느새 네 걸음 안팎까지 좁혀져 있었다. 열기가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말단부터 오그라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 봐도, 느린 세상에서는 자신의 몸도 느리다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화염구는 이제 세 걸음 간격까지 다가왔다.
에르제베트가 참담한 심정으로 최후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깨진 창문을 뚫고 들어와 에르제베트 앞에 착지했다.
“······?!”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림자는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에서도 섬전처럼 빨랐다. 뒤늦게 따라붙은 착지음이 울려 퍼졌다. 악마의 날개 같은 코트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를 슬쩍 돌아본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와씨, 혹시나 싶어 와 보기를 잘 했네. 좆될 뻔했잖아.”
“···!!!”
아는 얼굴이었다. 로난의 이름을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아직 성대를 등반하고 있었다. 로난은 지체 없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촤아아악!
화염구가 반으로 갈라지며 리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아직 치마를 들춰올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속옷과 새하얀 허벅지, 차갑게 식은 마법진도 그대로였다.
“당신은···!”
그제야 로난을 발견한 리즈가 헛숨을 들이켰다. 치마 밑단을 쥐고 있던 손이 풀어졌다. 허나 로난은 이미 행동을 마친 뒤였다. 재차 검격이 그어지고, 수작을 부리기 위해 움직이던 그녀의 양 팔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퍼억! 로난이 리즈의 배를 걷어찼다.
뒤로 날아간 몸뚱어리는 아까 에르제베트가 충돌했던 자리에 그대로 처박혔다.
“카학!”
리즈가 피를 뱉었다. 솟구쳤던 두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갈래로 터져 나온 피분수가 침대를 적셨다. 뒤늦게 닥쳐온 격통에 리즈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를 벌레 보듯이 내려보던 로난이 에르제베트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이제 다 끝났어.”
“···네?”
“와아아아아!!”
갑자기 창밖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에르제베트가 시선을 옮겼다. 맑게 날이 개인 하늘 아래 아칼루시아의 정원이 빛나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암석 파편 수백 개가 영지 상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전부 칼로 자른 것처럼 단면이 날카로웠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에르제베트에게 코트를 걸쳐 준 로난이 씩 웃었다.
“일단 나가자. 작별인사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