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0)
2-110. 바람이 지나간 자리(1)
#110
“어이, 좀 어때요?”
“······.”
“거 사람이 묻는데 무안하기시리. 아직은 내 말 들리지 않아요?”
“······아, 로난 씨.”
일루안이 눈썹을 치켜떴다. 광기가 사라진 눈동자는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다.
아직은 생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를 들은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벌써 죽은 줄 알고 놀랐잖아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그냥···오래 기다렸으니까 몇 마디는 섞어 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되죠? 아칼루시아는 아니지만, 나름 이번 사건을 해결한 공은 있거든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일루안의 옆에 앉았다. 죽음을 앞둔 그는 더 이상 미치광이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겸손하시군요. 사실상 혼자 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똥덩어리 하나를 치웠을 뿐이에요. 진짜 감사를 받아야 할 건 가주님과 양자들이죠. 그 사람들이 흩어진 잔해를 붙들지 않았다면, 아칼루시아는 진작에 박살났을 걸요.”
“하하···집채만한 운석을 똥처럼 여기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일루안이 웃었다. 그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대련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 작품이었다. 먼저 작별인사를 나눈 에르제베트와 아드리안,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이 객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도 로난 씨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신지 궁금했거든요.”
“궁금하실 것 까지야. 한낱 칼잡이죠 뭘.”
“용이나 악마라면 몰라도, 떨어지는 별을 베어낸 검사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제 딸까지 구해 주시다니···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됐어요, 감사는 무슨.”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살다살다 반으로 토막 낸 상대에게 감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루안이 사실은 존댓말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만큼이나 신선했다.
그의 말마따나, 운석 충돌과 함께 아칼루시아가 파멸하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법사가 많아서 망정이었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나는 운석을 보는 순간 요격에 나섰다.
우주에서 온 돌덩이는 지상과 오십 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수백 조각의 파편이 되어 산산이 분해되었다. 뼈 몇 개는 부러질 각오를 했는데 생각보다 무뎌서 다행이었다. 근원을 흡수한 대머리 킹의 주먹에 살짝 못 미치는 경도랄까.
운석을 파괴한 나는 이어서 일루안을 파괴(올바른 표현인지 모르겠다만)했다.
어지간하면 구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미친 채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죽음 외에는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운석보다 물렁거리는 일루안의 몸은 어떤 저항도 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내 예상은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아파서 비명을 내지르던 일루안은 머지않아 정신을 차렸고, 제정신이 아닐 때 저질렀던 악행들에 괴로워하며 다시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찬 절규가 멈춘 것은 내가 리즈의 마수에서 구해낸 에르제베트를 데려왔을 때였다.
“···여보.”
“아빠.”
객석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르제베트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여기는 사실상 임종을 지키는 자리였다.
모녀와 양자들,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본 일루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렇긴 하죠. 솔직히 말하면 아주 그냥 씨발새끼였어요. 만약 네뷸라 클라지에한테 속아서 한 짓이 아니었으면 나는 댁 얼굴에 오줌을 갈겼을 걸요.”
“죄송합니다···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아데샨 그 아이를···.”
“괜찮아요. 이미 끝난 일이니까..”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역시 피해자였을 뿐더러 곧 죽을 사람에게 화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루안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신체의 말단부터 돌로 바뀌는 석화 현상은 어느새 가슴께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운석과 결합된 육신을 강제로 분리해낸 부작용이 뒤늦게 닥쳐오는 것이었다. 희망을 남기고 떠난 사란테와는 달리,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침묵하던 일루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로난 씨.”
“음?”
“갑작스럽게 들리시겠지만···제 딸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아칼루시아의 대를 이어 주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진짜 갑작스럽네.”
진중한 목소리였다. 나는 에르제베트를 힐긋 돌아보았다. 워낙 아데샨이 예뻐서 그렇지 쟤도 정말 미인이긴 했다. 대가문의 외동딸에 위대한 마법사, 심지어 아드리안의 미모를 생각하면 전망도 밝았다. 아마 세상 대부분의 남자는 헤드스핀을 돌면서 장인어른께 절을 올리겠지.
픽 웃은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지만 약혼자가 있어서요. 그리고 쟤는 여자 좋아해요.”
“···맞다. 그랬었죠.”
“나보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재죠. 그리고 저 같은 놈팡이의 피가 안 섞여도 아칼루시아는 위대해질 수 있어요. 아니, 이것도 틀린 말이지 사실. 이미 충분히 위대한 가문이에요.”
숨을 내뱉자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존의 아칼루시아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음슴한 재능 추종 변태들의 모임이라는 선입견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으로 등극한 데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객석에 뻗어 있는 친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저 자식도 들어오니 훨씬 더 위대해지겠죠. 아셀. 차기 대마법사의 이름이니까 죽기 전에 기억해 둬요.”
“아아···정말 가공할 재능이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다섯 개의 마법을 역마법으로 받아치다니···부끄럽게도 스스로를 천재라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저 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일루안의 목소리에서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원래 세상의 아셀을 떠올린 내가 픽 실소했다.
“뭐, 하늘섬이 추락하는 것까지 막은 놈이니까요.”
아셀이 오늘 보여준 활약은 녀석의 앞날을 생각했을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이 흐뭇한 얼굴로 아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도 자는군. 영애님이 어릴 때만큼이나 귀여운 아가씨가 우리의 일원이 되다니. 기쁜 일이야.”
“듣자하니 남자라던데.”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자네. 저게 어떻게 남자야?”
“허허, 성별이 뭐가 됐든 역대 아칼루시아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아이인 건 확실해 보이는구려.”
다들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집단 괴롭힘을 당할 염려는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일루안의 석화는 이제 쇄골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최후가 정말 머지않은 것이다.
숨을 껄떡거리던 그가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웅얼거렸다.
“이···대로는···.”
“뭐라고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나는 아직···위대한 마법을···.”
일루안이 버둥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새 성대가 굳었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임종을 직감한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턱 아래까지 석화가 진행된 일루안의 입에서, 쥐어짜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영광을···.”
“일루안?”
그것이 일루안의 유언이었다. 그는 일 분이 지나기 전에 완전히 돌이 되어 버렸다. 곳곳에서 한숨과 탄식이 들려왔다.
“흠. 아직 미련이 남아 있던 건가?”
사람 모양의 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일단 속죄나 가족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헛소리를 한 건지, 죽기 전에 진심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례한 발상이지만 돌이 되는 타이밍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개소리를 지껄였다가는 간신히 형성된 추모의 분위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테니까.
‘인간적이라 해야 할지 참. 안쓰러운 남자였어.’
나는 담뱃대를 털고 주머니에 넣었다. 곧이어 들어온 위병들이 일루안이었던 돌덩이를 대련장 밖으로 가져갔다.
다음으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두 팔이 잘린 메이드 리즈는 대련장 상공에 염력으로 떠 있었다.
“크윽···으으윽!”
리즈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응급 조치를 해서 출혈은 더 없는 상태였다. 증오 어린 시선이 리즈를 향해 퍼부어지는 중이었다.
“다들 잘 봤죠? 네뷸라 클라지에는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들이에요. 빗물처럼 스며들어 위대한 마법사조차 미치게 만들고, 대가문의 초석을 흔들어 버리죠.”
나는 객석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네뷸라 클라지에의 위험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 설마 저 메이드가 흑막이었을 줄이야.”
“나도 방 청소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거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몰라도 가주님이나 영애께서도 발견하지 못하다니···정말 무시무시한 놈들이군. 네뷸라 클라지에.”
진상을 알게 된 양자들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수색을 강화해야 한다거나, 온 대륙에 이번 사태를 알려야 한다는 대화가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바라던 바였다. 대륙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아칼루시아의 양자들이라면 황제가 칙령을 내린 것만큼이나 빠르게 소문을 퍼뜨려 줄 터였다.
양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리즈를 올려보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저 발칙한 메이드 때문이에요. 청소의 귀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더라고요. 어찌나 흔적을 감쪽같이 지워 놨던지, 로르혼 영감님이 왔어도 잘 모르겠다 하고 돌아갔을 걸요?”
겸손이 아니었다. 리즈는 내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네뷸라 클라지에의 끄나풀 중에서 가장 약했지만, 모순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늪을 갈라서 지하실과 연결된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녀가 일루안과 내통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것을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터였다.
‘설마 세례조차 받지 않았을 줄이야.’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에게서는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거리는 마나가 감지되지 않았다. 기본적인 전투 능력을 입증한 신도는 아벨에게 세례를 받고 마나에 그 힘이 묻어나게 되기 마련인데, 리즈는 애초에 전투 능력이 전무해서 세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청소 마법으로 기깔나게 흔적도 지우니 찾을 수 있을 리가.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나도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리즈를 올려보던 아드리안이 엄중한 목소리로 고했다.
“리즈. 당신은 오늘 중에 로돌란으로 송치될 겁니다.”
“가, 가주님.”
“절대 죽음으로 도망치게 두지 않겠습니다. 비명의 요새의 심문관들은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자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자백한 뒤에도.”
“히익···!”
리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든 제국인인은 로돌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두 팔을 잃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가주님! 차라리 죽여 세요!”
“그런 말은 로돌란의 심문관에게 하길 바랍니다. 절대 들어 주지는 않겠지만.”
“시, 싫어! 안 돼! 제발! 영애님!!”
리즈가 울부짖었다. 의연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투명한 소변이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에르제베트가 못 견디고 시선을 피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칼루시아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아드리안이 하늘 높게 팔을 쳐들었다. 하얀 손을 타고 퍼져 나간 마나는 역장이 되어 영지 전체를 뒤덮었다. 누구도 나갈 수 없는 반구는 대규모 숙청의 시발점이었다.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어지간해서는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철저한데. 산책 한번만 슥 해주면 죄다 잡겠군.’
행동력이 마음에 들었다. 에르제베트가 능력을 증폭하는 오러로 그녀를 지원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사흘 내에 모든 해충을 박멸하겠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기에, 저는 겪었던 모든 비극을 황제 폐하와 다섯 마탑에 고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의가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반대는 없었다. 이제 대륙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원래 세상에서는 그랑시아의 스파이 돌란이 시발점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장담컨데 아칼루시아에 숨어든 쥐새끼는 리즈 외에도 있을 터였다.
“흐아아악!”
그때, 기절해 있던 아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내가 언제부터···?!”
“깨어나셨군요.”
“네에?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이죠?”
아셀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주변을 살폈다. 기절하기 전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셀을 보며 쿡쿡거리던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결과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입적 시험은 합격입니다. 아셀 님.”
“···네?”
“아칼루시아의 가주가 된 이래 최고의 시험이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아셀이 아닌 아셀 데 아칼루시아이며, 원하신다면 저를 어머니라 불러도 좋습니다.”
“네, 네에? 그런···!”
“농담입니다. 그리고 로난 님.”
귀족 등극을 축하할 틈도 없이 내 차례가 왔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당신이 아니었다면 아칼루시아는 파멸을 면치 못했겠지요. 사랑하는 딸을 두 번이나 잃을 뻔 했습니다.”
“별말씀을. 다들 도와 줘서 된 건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이도 말했던 것처럼 이상한 부분에서 겸손하시군요.”
아드리안이 웃었다.
잠깐 뜸을 들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약속드렸던 것처럼, 아칼루시아의 명예를 걸고 최고의 장비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